LOGIN이아준은 미국 지사에서 회의를 끝내자마자 쏟아지는 휴대전화 알림들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감히 하늘이를 건드려? 김희주, 그 여자는 나중에 어떤 피눈물을 흘리려고 이따위 수작을 부리는 거지?”
지평선 끝까지 아득하게 뻗어 있는 광활한 텍사스 공장 부지를 바라보며, 그의 매끄러운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안경을 올려 쓰며 눈썹을 찌푸리자, 옆에 서 있던 김정규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아이고, 사장님! 지금 한국에 계신 회장님께서 난리가 나셨습니다. 대체 왜 김희주 의원을 대놓고 건드려서 이 사단을 만드냐고요! 빨리 전화 한 통만 넣어주세요.”
비서인 김정규가 이마의
차준호에게 이 저택은 언제나 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오늘도 저택에는 늘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깊은 침묵이 밀려들자, 마치 적진 한가운데로 발을 내딛는 장수의 심정으로 비장하게 발을 디뎠다.1층 다이닝 룸 근처에 있던 고용인 두 명이 차준호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아, 대표님.”“오셨습니까.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차준호는 대답 대신 1층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평소라면 거실에 머물며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틀어놓았을 터였다.“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회장님께서는 2층 서재에 계십니다.”집 안을 둘러보는 차준호의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위화감이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경계심이 솟구쳤다.“요즘 아버지는 식사를 잘하십니까?”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두 고용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짧은 침묵 속에 말을 아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평소와 다름없으십니다.”“차는 서재로 올려 보낼까요?”차준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섰다.***도대체 이 찜찜한 기분의 정체는 뭘까. 무언가 결정적인 한 끗을 놓치고 있다는 조바심이 차준호를 짓눌렀다.1층 공간을 재차 훑고 손님방 문을 슬쩍 들여다본 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2층에 다다르자 서재 너머로 앵커의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뉴스에서는 차준호, 신하늘, 김희주,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강남경찰서에서 새벽녘에 잠실로 돌아온 이아준과 도국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이아준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리앉았고 몸은 솜뭉치처럼 둔하게 가라앉았다. 겨우 소파에 누워 몇십 분 남짓 쪽잠을 청했던 이아준은 샤워를 마친 뒤 수트를 갈아입으며 타이를 매만졌다.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와 그늘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육체보다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을지도 모를 신하늘의 잔상이었다.그런 이아준을 묵묵히 바라보던 도국이 어느새 손님방에서 나와 텀블러에 쉐이크를 타서 무심한 듯 건넸다.“빈속으로 출근하지 말고.”단백질 음료가 담긴 텀블러를 받아 든 이아준의 입가에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더 자지 뭐 하러 나와.”“너 가는 거 보고. 자도 돼. 이거라도 마셔.”“사실 아무것도 안 넘어가는데. 네가 준 거니까 먹고 가야겠다.”이아준이 쉐이크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정수기로 걸어가 차가운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마셨다.차가운 수분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답답한 열기와 타들어 가는 애타함은 전혀 식지 않았다.“김희주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니까 일이 더 복잡하고 기괴해진 느낌이야.”“그러게. 김희주라면 잃을 게 많아서 겁만 주겠지 싶었는데······.”도국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이아준은 들고 있던 컵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차라리 김희주라는 명확한 적이
강남경찰서 복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일촉즉발의 기류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평소라면 한밤중의 소란스러운 취객이나 잡상인이 들끓던 평범한 형사과 복도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차준호를 필두로 이아준과 도국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든 까닭에 경찰서 전체에는 숨조차 편히 쉬기 힘든 중압감이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그리고 평화로웠던 신하늘의 일상을 짓밟고 권력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김희주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걸어오자,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져갔다.김희주의 뒤로는 사복 차림의 정장 사내들이 빽빽하게 장벽을 치며 호위하고 있었다.그녀는 피의자나 조사 대상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표정이라 기가 찼다. 그때 김희주의 뒤에 바짝 붙어 있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힐끔 흘겨본 허기찬이 차준호에게 낮게 읊조렸다.“호화 변호인단을 대동하고 나타났군요. 대표님, 도발을 한번 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허기찬의 말을 들은 차준호는 격앙된 마음부터 가라앉혔다. 이럴 때 먼저 흥분하는 쪽이 패배하는 법이었다. 차준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묵직하게 한마디를 뱉어냈다.“김 의원님, 선을 너무 많이 넘으신 것 같습니다만.”그러자 김희주는 비틀린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다들 두고 봐.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 거니까.”“비참이라니요! 자업자득입니다. 본인이 판 무덤에 본인이 빠진 겁니다!”이를 악물고 던진 이아준의 차가운 일침에 이어, 옆에 서 있던 도국이 핏발 선 눈으로 김희주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하늘이에게 티끌 하나라도 상처가 더 생긴다면, 당신 앞날도 결코 편치 못할 겁니다
일본 한 특급 호텔의 숙소에 도착해서도 계속 모두는 신하늘의 이야기로 열기를 돋우었다.그 기사를 보고도 세나와 나나는 놀랐지만, 하나와 두나는 늘 그렇듯 평소처럼 비아냥거리는 반응만 보였다.“신 비서님은 좋겠어. 연예인 이상으로 주목이나 받고.”“우리 대표님도 그리 아껴주고, 도국 오빠나 L-DS 사장님까지 떠받들어 주다니 어우 부러워. 이거 다 쇼야! 쇼!”도국이란 이름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함이 세나의 폐부를 찔렀다.신하늘과 차준호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매번 깨닫는 자신이었다.역시 지금 보니 도국은 여전히 신하늘에게는 전부를 다 건 남자라는 것 같아서 마음은 절망을 헤맸다.그때 옆에 있던 나나가 호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세나에게 건네주었다. 물방울이 페트병 밖에서 구슬처럼 굴렀다.“언니들, 너무 잔인하네요. 사람이 사라졌는데 부럽다니. 신 비서님은 능력 있고 처신도 잘하니 그만큼 대접받고 있는 거예요.”나나가 퉁명스럽게 굴자, 하나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끈했다.“딱 보면 모르겠어? 연예인 중에 가끔 잠적했다가 동정심 받고 돌아오는 사람 종종 있잖아!”“신 비서님은 여우야. 잘 봐. 차준호 대표님 마음도 거머쥐고, 김희주도 지옥으로 보내고, 국회의원 선거 안 나가도 욕 안 먹고! 너무 대단한 시나리오잖아?”알고 보면 그렇기는 한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정말 신하늘을 하나와 두나처럼 꼴보기 싫어 누군가 해코지를 한 거라면?생수가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위장에 찬 기운이 서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나는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닦으며 말했다.“그런데, 언니들이라면
강소희는 울음을 뚝 그친 채 물끄러미 주원형을 바라보았다.평생을 살아오며 늘 그에게 감사했고, 의지했으며, 때로는 비겁하게 이용하기까지 했던 자신이었다.차준호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도 사실이었고, 한때는 최기범을 차선책으로 삼아 화려한 미래를 꿈꿨던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 세상이 자신을 버리고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지금, 앞으로의 미래를 주원형과 함께해야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될 줄이야.그때, 주원형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살기 어린 결심이 오롯이 번뜩였다.“나랑 결혼해. 프러포즈 선물로 김희주 그 여자, 피눈물 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리고 내 인생에서 넌 늘 빛나는 여자였어. 계속 빛나게 만들어 줄 거야. ”어떻게 이 순간에 이런 엄청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주원형의 묵직한 진심이 가슴에 와닿자,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울컥 터져 나왔다. 자신처럼 이기적인 여자가 받기엔 지나치게 과분한 사랑이었다.강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등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 주원형의 손길을 느끼자, 마음속 깊은 곳을 막고 있던 단단한 둑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대표님, ······고마워요.”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뜻밖에도 다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소희는 생전 처음 알게 되었다.주원형은 강소희의 차가운 손을 꼭 쥔 채로 시선을 돌려 김훈을 향했다.“김 실장, 언론과 국민을 완벽하게 속여 넘길 만한 그럴듯한 시나리오 좀 짜 봐. 나 연기 하나는 잘하는 거 알지?”
“윽······!”차준호는 짓눌리는 통증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내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관자놀이가 부서질 듯 지독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는 책 첫 장에 적힌 신하늘의 글귀를 보고, 또 다시 파고들 듯 읽어 내려갔다.12월 24일. 날짜를 되뇌는 순간, 기억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 와 순식간에 또렷해졌다.크리스마스이브, 뜨겁게 서로를 안았던 그 밤. 눈빛을 미세하게 떨며 순수한 애정만을 품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려 했던 신하늘의 얼굴이 떠올랐다.하지만 차준호는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차갑게 철벽을 쳐버렸었다.[신하늘, 참고로 나한테 고백 따위는 하지 마. 난 연애 안 해.]순간 하얗게 질려 깊은 상처를 입었던 그녀의 얼굴이 잔상처럼 뇌리를 스쳤다.사실 그 직후, 자신은 왜 그런 말을 뱉었는지 신하늘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목걸이를 걸어 주고 설명을 하려던 그때, 갑작스럽게 일이 터지는 바람에, 상처 입은 신하늘을 눈 오는 그날 돌려보내야 했다.그날이었다. 신하늘은 이 책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전해주고 싶어 가져왔지만, 차가운 거절에 차마 건네지도 못한 채 쓸쓸히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게 분명했다.그 쓰라린 전말이 비로소 완성되자, 차준호의 가슴이 찢어질 듯 쓰려 왔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지독한 죄책감이 목구멍을 막아섰다.차준호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런데 왜 하필 오늘 이 책을 여기에 두고 간 거지?’설마.차준호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 시선이 마지막 구절에 단단히 박혔다.[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제가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이건 절망에 빠진 사람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