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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hor: 신선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11:18:42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세상의 냉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또다시 서류 탈락 통보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드물게 면접까지 가게 되면 질문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최종 학력이 고졸이네요. 그리고 부모님은···"

그들끼리 주고받는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고아는 좀 불안하지 않냐?"

"그렇지. 신뢰가 안 가지."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조건들이 나의 가능성을 좀먹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이 나라에서 내게 허락된 위치 같았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분노를 표출할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더 가슴 아팠다.

그래서 나는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하지만 등록금, 생활비, 학원비까지. 내 처지에서 공부는 너무 멀고 값비싼 꿈이었다. 먼저 돈을 모아야 했다. 기반을 다져야 했다. 그러던 중, 고용센터 게시판에서 우연히 한 채용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신발 공장 / 생산직 / 숙소 제공 / 식사 제공 / 정규직 전환 가능 / 근무지 부산

가슴이 철렁였다. 살 곳과 일,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면. 이건 기회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고 기차를 타 부산의 공장 앞에 섰다. 서울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엄마가 살던 골목도, 삼촌이 담배를 피우던 의자도, 이모가 밥을 퍼주던 주방도 이제 모두 사라졌다. 새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철문을 밀고 들어서자 기계 소리가 우르르 울려 퍼졌다. 공기 중엔 고무 냄새가 진하게 떠다녔고, 바닥은 눅눅하게 기름을 머금고 있었다. 땀에 젖은 작업자들이 회색 작업복 차림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누군가 나를 훑듯 쳐다봤다.

"신입?"

관리자 한 명이 다가왔다.

"넌 3라인. 밑창 찍는 데야.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기계한텐 사람이 실수했다는 게 통하지 않거든."

작업복을 입고, 방진모를 쓰고, 철제 덧신을 신고 라인에 섰다. 기계는 숨도 쉬지 않고 으르렁거렸고, 압착 금형에서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신발 밑창을 토해냈다. 그걸 집어내고, 틀에 고무를 다시 붓고, 또 눌러야 했다.

3초라도 늦으면 금형이 망가졌다. 손끝에선 감각이 사라졌고, 물집은 밤이 되기도 전에 터졌다.

"쟤 서울에서 왔대."

"부모가 없다더라. 하긴, 그 나이에 왜 이런 데서 일하겠냐."

속삭임은 뒤에서 들렸지만, 나는 앞만 바라봤다. 여기서 울지 않겠다고, 버텨내겠다고 다짐했다.

숙소는 공장 바로 옆 컨테이너였다. 여름엔 찜통, 겨울엔 냉동창고 같다고 했지만, 내겐 지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고 돌아와,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에서 등을 벽에 기댄 채 책을 펼쳤다. 책장은 느리게 넘겨졌고, 눈꺼풀은 무거웠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공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늙어가겠지만, 나는 다르다고 믿었다.

반드시 달라져야 했다.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기계 소음이 윙윙거리는 현장에 낯선 무리가 들어섰다. 어딘가 어색한 걸음, 아직 다 벗지 못한 교복 티. 애띤 얼굴의 남자아이들 몇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옆에서 일하던 박 씨 아저씨에게 슬쩍 물었다.

"저 애들 누구에요?"

박 아저씨가 안전모를 벗으며 피식 웃었다.

"실습생들이야. 고3이라더군. 취업반 애들이 현장 체험 나온 거지. 급여도 적게 줘도 되니까 회사에선 아주 반기지."

잠시 후, 헐렁한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아이들의 손엔 아직 무게를 모르는 새하얀 면장갑이 쥐어져 있었다. 얼굴엔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고, 낯선 기계 기름 냄새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야, 여기 진짜 시끄럽다."

"잘 보이면 월급 좀 더 준다던데?"

반장이 그들을 쭉 세워두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 여긴 교실이 아니다. 장난치다 다치면 본인 책임이야.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아."

아이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 눈빛이 바뀌었고, 입술을 꾹 다무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렇게 실습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어설펐다. 볼트 하나 제대로 잡지 못했고, 장비 이름도 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 사이에도 묘한 리듬이 생겨났다. 눈빛이 달라졌고, 말투엔 책임이 묻어났다.

그 무리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박재욱. 짙은 쌍꺼풀에 눈매는 선하고 깊었고, 웃을 때마다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갔다. 어색하게 눌러쓴 헬멧 사이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그 얼굴을 어른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실습생 박재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마주친 날부터 이상하게 그 아이가 마음에 밟혔다. 뭔가 남다른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실습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그는 매일 누구보다 늦게 퇴근했고, 쉬는 날에도 자진해서 근무했다. 한 번은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맨날 야근에 주말근무까지, 안 피곤해?"

그는 멋쩍은 듯 웃었다.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해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무게는 담담하지 않았다. 열여덟, 겨우 고등학생. 친구들과 웃으며 놀아야 할 나이에 그는 가장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무거운 자재를 나르면서도 땀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늘 먼저 나섰다.

"형, 이거 제가 할게요!"

때로는 장난도 쳤다.

"이제 나이 좀 생각하셔야죠?"

그럴 때면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살짝 툭 쳤다.

"야, 네가 나보다 두 살 어린 거 뻔한데 뭔 소리냐."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형과 동생처럼 가까워졌다. 다른 실습생들이 하나둘 손을 빼거나 농땡이를 피울 때도, 재욱이는 끝까지 묵묵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이 아이, 정말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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