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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출장 품의서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2 12:01:57

나는 찬영의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다음 주 금요일이면 5월 22일이었다. 내 일정표에는 글벗문구에 견본을 보내는 일이 적혀 있었다. 시환의 저녁 일정은 없었다.

없어야 맞았다.

나는 이유는 모른다고 답하고,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덧붙였다. 전송한 뒤 휴대폰를 뒤집었다.

‘확인. 내 일정 아님.’

그런데 날짜는 외워 버렸다.

안 외워도 되는 걸 외우는 데에는 5년 경력이 도움이 안 됐다.

▲

목요일 오후, 규민 팀장이 내 책상에 서류를 놓았다.

『출장 품의서』

“내일 종이 공장에 가요. 대표님하고 저, 대리님. 하루 자고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에요.”

나는 출발 시간보다 먼저 방문 목적을 봤다.

종이 재단과 포장 공정 확인. 하반기 다이어리용 종이 출고일 협의.

“솔숲인쇄는요?”

“출발 전에 들르려고요. 종이 공장 쪽하고 제가 통화는 했는데, 직접 보고 날짜를 잡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럼 인쇄소에서 필요한 입고일을 먼저 확인할게요.”

“네. 공장 일정만 듣고 돌아오면 또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어서.”

규민 팀장이 숙소 안내를 짚었다. 채 대표와 내가 한 방을 쓰고, 팀장은 따로였다.

나는 교통편을 확인하다가 손을 멈췄다.

참석자 칸 맨 아래에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우시환.

“의장님도 가세요?”

“생산 현장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대표님하고 얘기하셨대요.”

창가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쪽을 봤다. 시환은 고개를 들었다.

“대주주로서 생산 현장을 봅니다.”

물어보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일정은 그대로 진행하십시오. 나는 참관만 합니다.”

“차도 같이 타세요?”

“가능하면요.”

내가 규민 팀장을 보자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이면 한 차로 가도 돼요. 숙소도 방 하나 추가했고요.”

나는 참석자 이름 옆에 확인 표시를 했다.

금요일 저녁이 비었다는 말은 다음 주였다. 이번 출장은 이번 주였다.

‘아니. 구분은 잘하네. 내가.’

종이 한 장에 저 사람 이름이 들어온 것뿐인데, 준비할 물건이 갑자기 늘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가방 목록에서 업무 자료만 다시 확인했다.

▲

5월 15일 금요일 아침, 솔숲인쇄 안에서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모덕규 사장은 손에 묻은 잉크를 천으로 닦으며 우리를 작업대 쪽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다른 거 찍고 있어요. 종이달 건 이 일정 뒤에 들어오면 됩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작업대에 펼쳐진 공정표를 봤다.

“종이가 한 번에 들어와야 할까요?”

“일단 절반만 먼저 와도 시작은 해요. 다만 나머지가 늦으면 중간에 멈춰야죠.”

“얼마까지 간격을 둘 수 있어요?”

모 사장이 공정표 위에 손가락을 댔다.

나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처음 들어오는 종이로 진행할 작업과 나머지가 필요한 시점을 나눠 적었다.

채 대표는 옆에서 견본 종이를 만져 보고 있었다.

“이 질감은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그걸 확인하러 가는 거죠.”

규민 팀장이 웃으며 답했다.

나는 견본 봉투에 오늘 확인한 내용을 끼웠다. 시환은 작업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기계가 돌아가는 쪽을 보다가, 모 사장이 설명할 때만 가까이 왔다.

결재할 사람처럼 가운데 서지 않았다.

모 사장이 시환을 보고 물었다.

“이분께도 견본을 드리면 돼요?”

“같이 보시면 돼요. 종이달 의장님이세요.”

“아, 그러세요.”

모 사장이 깨끗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시환은 두 손으로 받아 가장자리를 살폈다. 셔츠 소매는 늘 그렇듯 걷혀 있었다.

나는 모 사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공장에서 가능한 날짜를 받아서 오늘 오후에 연락드릴게요. 그때 이 공정표 기준으로 다시 맞춰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가져오기 전에 연락만 주고.”

“네.”

내가 견본 봉투를 챙기자 채 대표가 빈 작업대를 돌아봤다.

“빠진 거 없죠?”

“대표님 가방이요.”

규민 팀장이 작업대 아래를 가리켰다.

채 대표가 얼른 가방을 들었다.

“어떡해. 나만 두고 갈 뻔했네.”

“대표님은 타시면 됩니다.”

시환이 차 열쇠를 가진 규민 팀장 쪽으로 몸을 비켰다.

나는 웃다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아침부터 조금 따가웠다.

▲

규민 팀장이 운전석에, 시환이 그 옆에 앉았다.

채 대표와 나는 뒷좌석이었다. 견본 봉투는 둘 사이에 뒀다.

차가 솔숲길을 벗어나자 채 대표가 봉투를 열려고 했다. 나는 손을 뻗어 입구를 눌렀다.

“공장 가서 볼게요. 차에서 섞이면 찾기 어려워요.”

“한 장만.”

“대표님이 한 장을 고르시면 제가 나머지를 잡고 있어야 해서요.”

채 대표가 봉투를 놓았다.

“그렇겠네.”

앞자리에서 시환이 짧게 말했다.

“도착해서 보시죠.”

“의장님도 종이가 궁금하세요?”

“네.”

채 대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이어리를 무릎 위에 올렸다. 공장까지 차로 2시간 30분이었다. 가는 동안 질문할 항목을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먼저 받을 물량. 남은 물량의 출고 간격. 운송 전 연락할 담당자.

다 적고 고개를 들었을 때 룸미러에 시환의 눈이 잠깐 보였다.

나는 다시 종이를 봤다.

‘아니. 확인할 건 이쪽.’

채 대표는 어느새 창밖을 보고 있었고, 규민 팀장은 길을 살피느라 조용했다.

차 안에서 들리는 건 방향을 알려 주는 소리와 내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였다.

시환은 내가 일정을 읽을 때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도착하기 전에 질문 순서까지 정할 수 있었다.

▲

공장 사장은 사무실 탁자에 생산 일정을 펼쳤다.

종이를 직접 만져 본 채 대표가 견본과 나란히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돼요. 우리 다이어리에 잘 맞아요.”

사장은 출고일을 짚었다.

나는 다이어리에 적어 온 솔숲인쇄 일정을 그 옆에 놓았다.

두 날짜 사이에 손가락이 멈췄다.

“이날 전량 출고면 인쇄소 입고가 늦어져요.”

“앞 주문이 있어서 전부 당기기는 어려워요.”

“전부 말고, 먼저 작업이 끝나는 물량부터 나눠서 받을 수 있을까요?”

사장이 생산 일정의 다른 칸을 봤다.

“포장을 따로 해야 해요. 차도 나눠 가고.”

“추가 운송비는 확인해 주세요. 다만 지금 바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나는 규민 팀장을 봤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 받아서 대표님하고 검토할게요.”

채 대표도 종이에서 손을 떼고 일정표를 들여다봤다.

나는 모 사장이 알려 준 작업 순서를 설명했다.

“먼저 들어온 걸로 인쇄를 시작하고, 다음 작업 전에 나머지가 도착하면 돼요. 여기까지 간격을 둘 수 있다고 하셨어요.”

공장 사장이 안경을 고쳐 쓰고 생산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옆에서 기다렸다.

시환은 내 다이어리가 아니라 벽에 붙은 공정표를 보고 있었다. 사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가능하겠네요.”

사장이 날짜를 나눠 적었다.

나는 바로 솔숲인쇄에 전화를 걸었다. 모 사장은 내가 읽어 주는 날짜를 듣고 잠깐 계산했다.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나는 안경을 조금 밀어 올렸다.

“인쇄소도 이 일정이면 진행할 수 있대요.”

채 대표가 작게 손뼉을 쳤다.

“어떡해. 됐다.”

공장 사장은 출고 내역을 새로 적었다. 나는 첫 물량과 나머지 물량을 구분하고, 연락 순서까지 확인했다.

규민 팀장이 서류를 받아 읽었다.

“대리님, 여기 담당자 연락처도 받아 주세요.”

“네.”

도장을 받을 자리는 따로 없었다. 서로 확인한 일정과 견적을 메일로 주고받기로 했다.

탁자 끝에 앉은 시환은 끝까지 펜을 들지 않았다.

공장을 나와 차로 걸어가는데 규민 팀장이 말했다.

“오늘 통화만 했으면 안 됐겠네요.”

나는 견본 봉투를 품에 붙였다.

“한쪽에서는 늦는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못 당긴다고 했을 것 같아요.”

“중간에서 날짜를 나누니까 되네요.”

나는 대답하려다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시환이 걸음을 늦췄지만, 나는 먼저 차 쪽으로 갔다.

▲

저녁을 먹고 숙소 로비에 내려온 건 수정한 일정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방에서 채 대표는 씻고 있었고, 나는 노트북을 들고 작은 탁자에 앉았다. 조용한 데서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출고일을 나눠 적고, 운송비는 견적 확인 뒤 확정이라고 표시했다. 수신인도 다시 봤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목이 간질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기침했다.

“감기입니까.”

언제 내려왔는지 시환이 탁자 옆에 서 있었다.

“아직은 목만 좀 따가워요.”

“약은요.”

“열은 없어요. 오늘 자고 나면 괜찮을 수도 있고요.”

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사 오겠습니다.”

“저 물 있어요.”

나는 탁자 위 물병을 가리켰다.

시환이 물병을 확인했다.

“따뜻한 걸로 사 옵니다. 드시겠습니까.”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릴게요.”

시환은 로비를 나갔다.

나는 발송한 메일을 다시 열지 않고 노트북을 닫았다. 목이 아프다는 이유로 일을 더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때 규민 팀장이 휴대폰를 귀에 대고 계단을 내려왔다.

“지금? 방금?”

팀장은 내 탁자에서 떨어진 곳에 멈췄다.

“응. 듣고 있어.”

그 뒤로는 한참 말이 없었다.

입만 벌어져 있었다.

나는 혹시 좋지 않은 일인가 싶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팀장이 갑자기 한 손을 들었다. 휴대폰를 반대 손으로 옮기더니 혼자 박수를 두 번 쳤다.

통화 중이라 소리는 작았다.

“잘했네. 잘했어.”

나는 노트북 덮개를 잡은 채 기다렸다.

규민 팀장이 전화를 끊고 나를 봤다. 눈가가 접혀 있었다.

“아기가 발로 찼대요.”

“느껴지셨대요?”

“네. 아내는 전에도 조금 느꼈다는데, 오늘은 손 대고 알았대요.”

팀장은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여기서는 닿지도 않는 손이었다.

“영상으로 보고 있지 그랬냐고 할 뻔했어요.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일 가서 손 대 보세요.”

“네. 자고 있어도 좀 기다려 보려고요.”

그때 채 대표가 머리끝을 털며 내려왔다. 팀장이 그 말을 다시 하자 채 대표도 박수를 쳤다.

“우리 회사 첫 아기잖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미리 축하하면 되지. 다음 다이어리에 아기 이름 넣어요.”

규민 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회의에서 검토하셔야죠.”

“후보로는 넣을 수 있잖아요. 이름 정하면 알려 줘요.”

나는 탁자 끝에 놓인 출장 서류를 당겼다. 채 대표가 들뜬 손으로 짚다가 구길 것 같았다.

규민 팀장이 내 쪽을 보고 웃었다.

“대리님, 그것도 기록하시는 거 아니죠?”

“아기 이름은 아직 못 들었는데요.”

“정하면 말씀드릴게요.”

채 대표는 벌써 다이어리 어느 자리에 이름을 넣으면 좋을지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닫힌 노트북 위에 손을 얹었다.

오늘 확인한 날짜 사이에, 팀장이 기다리는 날짜도 하나 있다는 걸 알았다.

▲

시환은 편의점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팀장이 아기 얘기를 전하자 걸음을 멈추고 들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나온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축하할 일입니다.”

규민 팀장은 또 휴대폰를 봤다. 아내에게 더 할 말이 생각난 듯했다.

채 대표와 팀장이 먼저 올라간 뒤, 시환이 내 앞에 생강차를 놓았다.

두 개였다.

나는 하나를 시환 쪽으로 밀었다.

“드세요.”

시환이 다시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둘 다 원지유 씨 겁니다.”

“두 개를요?”

“하나는 지금. 하나는 나중에.”

나는 봉투 안을 봤다. 다른 음료는 없었다.

“의장님 건 안 사셨어요?”

“필요 없었습니다.”

따뜻한 병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끝이 먼저 풀렸다.

‘아니. 하나씩 나누는 게 아니네.’

시환은 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도 됩니까.”

“네.”

시환이 앉았다. 나는 뚜껑을 열고 조금 마셨다. 목 안쪽으로 따뜻한 게 내려갔다.

탁자에는 닫힌 노트북과 생강차 두 개가 있었다. 일이 끝났는데도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병에 붙은 설명을 읽는 척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예요.”

시환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추가로 물으면 방금 차를 사 온 시간이라고 둘러댈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병을 탁자에 놓았다.

“이렇게 하시는 거요.”

시환은 잠시 내 얼굴을 봤다.

“지금 말하면 당신이 불편해질 겁니다. 당신이 괜찮다고 할 때 말합니다.”

미리 준비해 둔 듯 짧았다.

나는 뚜껑을 만졌다. 닫지도 않고, 열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래됐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시간은 아직 말하지 않겠습니다.”

거짓말로 줄이지도 않았다.

모른 척하지도 않았다.

나는 병을 다시 들었다.

“그럼 지금은 묻지 않을게요.”

“알겠습니다.”

시환은 더 보태지 않았다. 언제 다시 물을 건지 정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두 번째 병은 아직 봉투에 있었다. 내 손이 닿는 쪽에.

“잘 마실게요.”

“네.”

오늘 받은 답 중에서 가장 짧았다.

그런데 방에 올라가서도 그 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

5월 16일 토요일 아침, 나는 채 대표보다 먼저 일어나 짐을 챙겼다.

목은 전날보다 나아졌지만 몸이 무거웠다. 채 대표는 내가 빈 생강차 병을 정리하는 걸 보고 따뜻한 물부터 마시라고 했다.

돌아가는 차에서도 자리는 그대로였다.

규민 팀장은 아내에게 출발했다고 연락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채 대표는 뒷좌석 창가에서 공장에서 받은 종이를 한 번 더 만졌다.

나는 안경을 쓰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일정 확인 메일 오면 같이 볼게요.”

규민 팀장이 앞에서 말했다.

“지금은 좀 쉬세요. 어제 다 확인했으니까.”

“연락처만 정리하고요.”

나는 공장 담당자 번호 아래에 연락할 내용을 적었다. 마지막 글자가 조금 기울었다.

차가 움직이자 눈이 자꾸 감겼다.

다이어리를 덮어 가방에 넣었는데도 손은 안경 다리를 잡고 있었다.

앞자리에서 시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경은 빼 두시죠.”

“네. 잠깐만요.”

내가 대답하고도 손을 내리지 않자 시환이 다시 물었다.

“정리해 드릴까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려요.”

채 대표가 내 가방을 옆으로 옮기는 소리가 났다.

“재킷도 덮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작게 네 하고 답했다. 그 뒤로 차 안의 말소리가 멀어졌다.

▲

눈을 떴을 때는 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무릎 위에 짙은 재킷이 덮여 있었다. 안경은 벗겨져 접힌 채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안경부터 잡았다.

채 대표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견본 봉투는 발치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앞자리 시환의 셔츠가 보였다.

소매가 걷힌 팔은 문 쪽에 놓여 있었고, 재킷을 벗은 등은 조금 전보다 가까워 보였다.

나는 안경을 쓰려다 멈췄다.

정리해 달라고 한 건 기억났다. 재킷을 덮어도 되는지 묻던 목소리도.

그때는 쉽게 네라고 했는데, 눈을 뜨고 나니 손이 재킷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잠결에 결재했네.’

나는 안경을 쓰고 옷깃을 조금 당겼다.

“의장님.”

시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네.”

“재킷, 이제 드릴까요?”

“아직 입고 계십시오.”

“안 춥습니다.”

“그럼 깨어날 때까지만요.”

나는 시계를 보는 척 손목을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숫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다 깼어요.”

시환은 운전석 옆자리에서 앞만 보며 말했다.

“압니다. 조금 더 덮고 계셨으면 해서요.”

(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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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 퇴사 사유: 대표님   37화. 재인쇄 발주서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 퇴사 사유: 대표님   36화. 송년 행사 기획안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 퇴사 사유: 대표님   35화. 완판 보고서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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