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재킷을 벗으려던 손을 멈췄다.
조금 더 덮고 있었으면 한다는데, 얼마나 더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물으면 종이달에 도착할 때까지라고 답할 것 같았다.
‘아니. 다 깼다고 했는데. 듣고도 저러네.’
옆에서 채 대표가 뒤척였다. 나는 재킷을 무릎 쪽으로 당겨 옷자락이 넘어가지 않게 했다.
“도착하면 드릴게요.”
“네.”
이번에는 시환도 더 붙잡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정리하다 만 연락처가 펼쳐졌다. 공장 담당자 이름 옆에 쓰려던 글자가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그 아래에 연락할 내용을 마저 적었다.
재킷 소매가 손등에 닿을 때마다 글씨가 조금씩 어긋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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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화요일, 내 책상에는 견적서가 두 장 놓여 있었다.
전량을 한 번에 받을 때의 운송비와 나눠 받을 때의 운송비였다. 종이 공장에서 보내온 자료였다.
나는 안경을 쓰고 항목을 나란히 맞췄다. 출고를 나누면 차가 한 번 더 움직였다. 그 돈만 보면 한 번에 받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인쇄소였다.
종이를 늦게 받으면 다음 작업에 걸렸다. 종이달 일정만 미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견적서 옆에 인쇄소 공정표를 펼쳤다.
규민 팀장이 내 책상 앞에 섰다.
“추가 운송비 확인됐어요?”
“네. 차가 한 번 더 오는 비용이에요. 포장비는 같고요.”
“대표님께 같이 드리면 되겠네요.”
“이것도 붙이려고요.”
나는 공정표에서 입고일과 작업 시작일을 짚었다.
“한 번에 받으면 이 날짜를 못 맞춰요. 비용만 보시면 왜 나눠 받는지 다시 물으실 것 같아서요.”
팀장은 견적서 두 장을 번갈아 봤다.
“제가 설명하려던 게 벌써 여기 있네요.”
“결정하시려면 같이 보셔야 하니까요.”
“대리님, 이런 거 잘 묶으시네요.”
칭찬을 받았는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서류 아래쪽을 맞추고, 빠진 항목이 없는지 봤다.
예전에는 시환의 책상에 올리기 전에 하던 일이었다.
지금은 내가 확인한 생산 일정이었다.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할 사람도 나였다.
나는 종이 맨 위에 짧게 적었다.
『분할 입고 검토』
“팀장님 확인하시면 대표님께 올릴게요.”
“네. 이대로 주세요.”
팀장이 서류를 가져가자 나는 안경을 벗었다.
창가 책상에서 시환이 고개를 들었다. 토요일에 돌려준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목은 괜찮습니까.”
“네. 다 나았어요.”
“다행입니다.”
시환은 곧 자기 서류로 눈을 내렸다.
견적서를 보겠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마우스를 잡았다가 놓았다.
‘확인. 오늘은 내 일을 한다.’
그때 은채가 커다란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대리님. 저 샀어요.”
가방에서 다이어리가 나왔다.
종이달 것이 아니었다.
▲
표지 아래쪽에 푸른연필 이름이 작게 찍혀 있었다.
나는 은채가 펼친 다이어리를 봤다. 반듯한 표지에 종이가 고르게 붙어 있었다. 안쪽 구성도 깔끔했다.
“비교하려고 샀어요?”
“네. 사진으로 보면 다 비슷하잖아요. 직접 넘겨 봐야 알아요.”
은채가 종이달 견본을 옆에 놓았다.
책상에 물건이 늘어나자 나는 견적서 사본을 서랍에 넣었다. 은채는 두 권을 한 면에서 펼쳤다.
“이건 날짜 칸이 좀 넓어요.”
“대신 옆에 적는 칸은 우리 게 크네요.”
“맞아요. 그러니까 어느 게 무조건 좋다, 이건 아닌데.”
은채는 두 다이어리의 종이를 손끝으로 집었다. 창 쪽으로 들어 올려 보고, 앞뒤로 넘겼다.
나는 종이달 견본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일을 적다가 공간이 모자라면 쓰는 빈 면이었다.
은채가 자를 꺼냈다.
“잠깐만요. 두께도 볼게요.”
은채는 표지를 빼고 종이 부분을 모아 나란히 세웠다. 조금씩 눌러 보다가 자를 내려놓고 끝장을 세기 시작했다.
숫자를 중얼거리던 입이 멈췄다.
“우리 게 두 장 더 두꺼워요.”
“두께요, 장수요?”
“남는 종이가 두 장 더 있어요. 이쪽은 여기서 끝인데 우리는 여기까지.”
은채가 각 다이어리의 끝부분을 들어 보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리해서 적어 주세요. 전체 두께하고 쓸 수 있는 면은 따로요.”
“네. 두 장 더 쓸 수 있는 게 중요하죠.”
‘두 장. 그걸로 이기나. 이긴다. 우리는 그런 데서 이긴다.’
은채는 종이달 다이어리를 내 쪽으로 밀었다.
“대리님은 마지막까지 쓰세요?”
“네. 모자라서 뒤쪽 빈칸도 써요.”
“역시. 여기 늘 뭐가 있더라고요.”
은채가 내 다이어리를 가리켰다. 나는 펼쳐 둔 페이지를 덮었다. 종이 공장 연락처와 모 사장에게 물을 내용이 빽빽했다.
“잘 쓰는 사람한테는 두 장도 도움이 되겠네요.”
“저한테는 큰데요.”
은채가 웃었다.
“그 말 회의 때 해 주세요.”
“자료에 적어 두면 제가 안 해도 돼요.”
“그럼 적을게요. 빈 면 두 장 추가.”
은채는 경쟁사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좋은 부분에도 표시를 남겼다. 날짜를 찾기 쉬운 위치, 넘길 때 덜 걸리는 제본.
나는 그 옆에 종이달 견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비교표를 완성하려던 순간 계단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
“채 대표 계십니까.”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사무실 문 앞에 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보다 먼저 넥타이와 서류 가방이 기억났다. 작년 11월, 온빛 대표실 앞에서 저 가방을 의자 옆에 세웠었다.
미팅이 끝난 뒤 차를 불러 달라고 했던 사람.
푸른연필 대표 지창모였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를 받은 지창모가 사무실을 둘러봤다. 시선이 창가에서 잠깐 멎었다가 내게 돌아왔다.
“어디서 봤는데.”
“채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채 대표 자리로 갔다. 채 대표는 작업복 앞자락을 펴며 일어났다.
“지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근처에 왔다가요. 전화하고 올 걸 그랬나.”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채 대표는 회의실로 가려다가 책상 위 서류를 봤다. 규민 팀장이 막 전달한 견적서였다.
지창모도 그쪽으로 눈을 내렸다.
“일이 많네요.”
“하반기 준비해야죠.”
“이제 온빛이 있으니 든든하겠어요.”
말끝에 웃음이 붙었다.
채 대표는 서류를 뒤집지 않았다. 대신 견적서를 자기 자리로 당겨 놓았다.
“그래도 만드는 건 똑같아요. 종이도 맞춰야 하고, 인쇄소 일정도 봐야 하고.”
“그렇죠. 팔아 줄 곳도 있어야 하고.”
나는 손님이 앉을 의자를 빼려다 멈췄다. 지창모의 시선이 은채 책상에 놓인 다이어리로 넘어갔다.
푸른연필과 종이달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은채가 손에 든 자를 내려놓았다.
“비교하고 있었나 봅니다.”
“네. 하반기 제품 준비하면서 보고 있었어요.”
은채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지창모는 자기 회사 다이어리 표지를 손끝으로 눌렀다.
“직접 사 온 거예요?”
“네.”
“다음에는 얘기해요. 견본 보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은채는 두 권을 그대로 두었다. 숨기지도, 급하게 치우지도 않았다.
지창모가 웃으며 채 대표 쪽으로 돌아섰다.
“우리가 샀어야 했는데.”
채 대표의 손이 견적서 위에서 멈췄다.
“인수는 끝났어요, 지 대표님.”
“알죠. 아쉬워서 하는 말입니다.”
지창모는 사무실 안쪽을 다시 봤다. 낡은 책장과 벽에 걸린 제품 사진, 창가 책상까지.
“보경 씨, 내 돈 아직 거기 있는 거 잊지 마요.”
채 대표는 잠깐 입술을 눌렀다.
“잊은 적 없어요.”
“그럼 됐고.”
나는 채 대표의 얼굴을 봤다.
내 돈.
물건값을 덜 받았다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을 수 있는 얘기도 아니었다.
규민 팀장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대표님, 회의실 준비할까요?”
“아니에요.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요.”
지창모가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나를 다시 봤다.
이번에는 알아봤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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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빛 비서가 왜 여기.”
지창모가 웃었다.
나는 내려놓았던 명함 묶음을 집었다. 새 명함은 아직 모서리가 단단했다.
“종이달 브랜드팀으로 입사했습니다.”
“아, 우 대표 따라서?”
“종이달 경력 공채로 왔습니다.”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지창모는 바로 받지 않고 내 얼굴부터 봤다.
“원지유 씨였죠. 기억납니다. 작년에 일정 잡아 줬잖아요.”
“네. 지금은 출시 일정과 거래처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비서가 하던 일이랑 비슷하겠네.”
나는 명함을 든 손을 조금 내렸다.
비슷한 부분은 있었다. 날짜를 맞추고, 사람에게 확인하고, 빠진 내용을 찾았다.
하지만 종이가 늦게 오면 내가 다음 작업을 바꿔야 했다. 거래처에 어떤 조건을 제안할지도 내가 준비했다.
“제품이 나오는 일정이라 확인할 내용이 다릅니다.”
지창모가 명함을 받았다.
“그렇군요.”
명함을 읽는 눈은 빠르게 지나갔다. 가방에 넣으려던 손이 멈췄다.
창가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시환이 일어섰다.
“종이달 브랜드팀 원지유 대리입니다. 호칭 바로 하시죠.”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시환은 내 옆을 지나 채 대표 자리 가까이에 섰다. 내 앞을 가리지 않았다.
지창모는 명함을 다시 내려다봤다.
“직함을 잘못 불렀네요. 원 대리.”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창모가 시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 대표,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환은 악수를 받았다.
“종이달에서는 의장입니다.”
“직접 챙기시네요.”
“이사회 일을 봅니다.”
“유통 쪽에서 문구까지 넓히면 볼 게 많겠어요.”
“검토하고 있습니다.”
짧은 답이 이어졌다.
지창모는 시환의 책상에 놓인 서류를 보려다가 채 대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에는 전화하고 오죠. 보경 씨, 아까 얘기는 기억하고.”
“알고 있어요.”
채 대표가 답했다.
나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계단 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올라온 길인데.”
지창모는 명함을 가방 안쪽에 넣었다.
은채 책상 앞에서 한 번 더 걸음을 멈췄다.
“좋은 점도 적어 줘요. 우리 제품.”
“네. 같이 보고 있어요.”
은채가 비교표를 가리켰다.
지창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갔다.
구두 소리가 아래층으로 멀어졌다.
나는 문을 닫은 뒤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확인. 명함 받았다. 직함도 읽었다.’
그런데 채 대표에게 한 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 돈 아직 거기 있는 거 잊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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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대표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바로 묻지 않고 물을 가져왔다. 채 대표가 컵을 받아 책상 위에 놓았다.
“놀랐죠. 갑자기 와서.”
“전에 뵌 적은 있어요.”
“온빛에서요?”
“네.”
채 대표는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아까 말씀하신 돈은 저희 업무에 영향이 있는 건가요?”
채 대표가 나를 봤다.
“옛날에 회사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돈이 필요했어요. 그때 들어온 돈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 대표는 서류를 한쪽으로 모았다.
“오늘 받은 견적이나 발주하고는 달라요. 그건 내가 따로 확인할게요.”
“네. 그럼 입고 건은 그대로 검토하시면 될까요?”
“그렇게 해 줘요.”
채 대표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모르는 돈의 조건을 내가 짐작해서 적을 수는 없었다. 나는 견적서 사본을 다시 꺼냈다.
규민 팀장이 채 대표 옆에 앉아 분할 입고 이유를 설명했다. 채 대표는 운송비를 확인하고 공정표의 날짜를 따라갔다.
“이걸 안 나누면 인쇄가 밀리는 거죠?”
“네. 공장하고 인쇄소 양쪽에서 가능한 날짜를 맞춘 거예요.”
내가 답하자 채 대표가 서류 아래에 손을 놓았다.
“그럼 나눠 받아요. 이 일정으로 진행해 주세요.”
“확인 메일 보내겠습니다.”
결정된 항목에 표시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시환은 창가 책상에 다시 앉아 있었다. 내가 지나가자 시선이 잠깐 올라왔다.
“아까는 감사합니다.”
“당신 직함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도요.”
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대화가 끝났으면 좋았는데, 내 입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제가 할게요.”
“알겠습니다.”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잠깐 시환을 봤다.
“이런 말 하면 보통 설명을 더 하시던데요.”
“원지유 씨가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까와 다르지 않은 답이었다.
나는 명함 묶음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님 앞에서 한 장 꺼낸 자리만 비어 있었다.
‘아니. 말이 짧으니까 싸울 틈도 없네.’
은채가 의자를 조금 당겨 왔다.
“대리님, 저 아까 자 들고 있었죠.”
“네.”
“내려놓길 잘했어요. 손에 뭐 들고 있으면 계속 만지거든요.”
“대답 잘하셨어요.”
“견본 준다는 건 진짜일까요?”
“필요할 때 정식으로 요청하면 되죠.”
은채는 비교표를 봤다.
“일단 산 걸로 충분해요. 끝까지 다 봐야지.”
은채가 마지막 장을 다시 펼쳤다.
나는 그 옆에서 공장에 보낼 메일을 작성했다. 첫 입고일, 남은 물량의 출고일, 확정한 운송비.
받는 사람을 확인하고 전송했다.
채 대표가 멀리서 물었다.
“지유 씨, 보냈어요?”
“네. 회신 오면 인쇄소에도 전달할게요.”
“고마워요.”
은채가 비교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빈 면 두 장이 따로 적혀 있었다.
나는 그 항목 옆에 활용 예시를 짧게 보탰다.
회의 메모. 연락처. 다음 일정.
오늘만 해도 내가 쓴 것들이었다.
▲
퇴근 무렵, 나는 명함을 작은 칸에 세워 넣었다.
지창모에게 준 명함과 같은 글씨가 맨 앞에 보였다.
『종이달 브랜드팀 대리 원지유』
서랍을 닫으려는데 메신저 알림이 떴다.
창가 책상은 비어 있었다. 시환은 조금 전 온빛 일정 때문에 나갔다.
나는 알림을 눌렀다.
첫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이름.
오늘 지창모는 내가 명함을 건네기 전에는 몰랐고, 건넨 뒤에도 읽기 전에 말했다.
원지유 씨였죠.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괜찮다고 답하려는데, 마지막 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시환 대표이사: 지창모가 당신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옆에 있겠다는 뜻입니다.』
(8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