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제국의 수도 에테르노의 밤.
그곳은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럽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일 년 중 가장 성대하게 열리는 제국 최대의 축제.‘에테르노의 밤’이 마침내 시작된 덕분이었다.높디높은 황궁의 육중한 담벼락 너머.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들뜬 함성과 노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경쾌한 선율.그것은 성벽을 타고 넘어와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가볍게 두드렸다.“우와…”엘로라는 집무실 창가에 바짝 붙어 서서 멍하니 그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았다.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금빛과 붉은 빛의 등불로 넘실거리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황궁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는 대조적으로, 그곳에는 사람 사는 냄새와 따스한 온기가 가득했다.“그렇게나 저 바깥세상이 좋은 것이냐.”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칼리안세라피나는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평생 한 번도 빛난 적 없던 깃털이 거기서 은빛을 내고 있었다.그녀가 두 손으로 그것을 감쌌다.손등의 힘줄이 파르르 섰다."……언니?"묻는 건지 부르는 건지 모를 소리였다.엘로라는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옆구리 붕대를 피해, 팔을 조심스레 둘러서.세라피나는 나무토막처럼 서 있었다.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안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몸이었다.엘로라는 그 굳은 어깨에 뺨을 대고 기다렸다.한참 만에, 세라피나의 손이 엘로라의 등 위로 올라왔다.허공에서 한 번 멈칫했다.그러고는 드레스 천을 꽉, 구겨 쥐었다.*서쪽 별채의 창가로 아침 햇볕이 비스듬히 들었다.세라피나는 그 볕 속에 앉아 엄마의 고해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마지막 줄의 두 글자 위에서 손가락이 오래 머물렀다."피나는 고아원 수녀님들이 붙였어요. 세라만으론 짧다고. 성녀 피나에서 따서요.""예쁜 이름이에요.""언니는요?""나?""엘로라는 누가 지었어요?""선황 폐하가요. 에인젤 마마의 죽은 딸 이름이래요."세라피나가 고개를 돌렸다."그럼 진짜 이름은요.""리아요. 아빠가 배 속의 나를 그렇게 불렀대요.""엄마는요?""……엄마는 한 번도 못 불러 봤겠죠."세라피나가 고해 마지막 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둘째의 이름은, 세라였습니다."그럼 저는 엄마가 지어 준 이름이네요."'
열린 문으로 밤바람이 밀려들었다.제단 앞 성수 대야에 잔물결이 일었고, 그 위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졌다.흑장미 사병들이 대사제를 끌고 나가는 쇠사슬 소리가 천장에서 몇 번이고 되울렸다.엘로라에게는 그 모든 소리가 물 밖에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세라피나는 문턱에서 멈췄다.세드릭의 팔에 기댄 채.붕대 위로 피가 손톱만큼 배어 나와 있었다."사제관에서 눈 뜨자마자 여기 오겠다고 했습니다."세드릭이 짧게 보고했다."말렸습니다. 안 들었습니다. 상처보다 고집이 깊습니다."세라피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그녀의 눈이 제단 계단에 앉은 엘로라에게 닿았다.그 손에 들린 양피지에, 그리고 젖은 얼굴에.엘로라는 울고 있었다.소리도 내지 않고.세라피나는 그 얼굴 앞에서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누군가 자신을 보며 우는 걸 처음 보았다.고아원 수녀들도, 양부도, 대사제도 그녀를 보며 울어 준 적은 없었다."……황후 폐하?"엘로라는 대답하지 못하고 일어섰다.무릎이 휘청했다.칼리안이 팔꿈치를 받쳤다.그녀는 그 손을 붙든 채 문 쪽으로 걸었다.제단에서 문까지 스무 걸음.몇 걸음 만에 발이 엉켰다.치맛자락을 밟았고, 대리석 틈에 굽이 걸렸다.칼리안은 그때마다 말없이 그녀를 끌어올려 세웠다.재촉하지도, 멈추게 하지도 않았다.그의 손바닥이 닿은 팔꿈치만 이상할 만큼 뜨거웠다.나머지 몸은 전부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세라피나 앞에 섰다.가까이서 보니 그녀가 엘로라보다
'신부님.저는 내일 탑니다.그러니 신께 한 가지만 고해하겠습니다.이건 제 남편도 모르는 일입니다.'엘로라는 그 줄에서 눈을 떼고 칼리안을 보았다.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둘 다 아무 말 없이 다음 줄로 시선을 옮겼다.바람 한 점 없는데 촛불들이 일제히 기울었다.제단 아래서 세드릭에게 짓눌린 대사제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그 소리가 다른 방에서 나는 것처럼 멀었다.'열흘 전, 저는 아이를 낳았습니다.그레이스 성이 아니라 수도의 은신처에서.남편이 저를 빼돌릴 날을 기다리며 숨어 있던 곳에서.산파는 마르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열흘 전.엘로라는 그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자신이 태어난 날이었다.마르타가 그해 받아 낸 아이들 가운데 마지막이었다는 날.엄마가 그녀를 낳았고, 선황이 데려가 에인젤의 죽은 딸 자리에 넣었고, 엄마는 탔다.그녀가 아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양피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신부님, 저는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그 한 줄만 유난히 컸다.펜촉이 종이를 찢을 듯 눌러 쓴 글씨였다.잉크가 획마다 뭉쳐 있었다.이 한 줄을 쓰기 전에 엄마가 얼마나 오래 펜을 쥐고 있었는지, 그 뭉친 잉크가 말해 주었다.양피지가 손에서 미끄러졌다.칼리안이 모서리를 붙잡았다.그의 손가락도 떨리고 있었다.이십 년 묵은 종이 한 장을 두 사람이 함께 붙든 채였다.'쌍둥이였습니다.로이센의 피는 쌍둥이를 낳습니다. 제 어머니처럼, 저처럼.첫째는 은발이었습니다. 저를 닮은.둘째는 흑발이었습니다. 남편을 닮은.'흑발.
자정의 대성당은 텅 비어 있었다.아치 천장 아래 촛불 수백 개가 흔들렸고, 그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바닥에 붉고 푸른 얼룩을 흩뿌렸다.밀랍과 오래된 향 냄새가 돌기둥마다 배어 있었다.성가도 기도도 없었다.저 끝 제단 앞에서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엘로라는 혼자 걸어 들어갔다.혼자처럼 보이게.칼리안은 그녀 바로 뒤, 기둥 그림자 속에 있었다.세드릭은 제단 옆 고해실 안에.흑장미 사병들은 대성당의 모든 문밖에.초저녁에 세드릭이 대성당 도면을 펼쳐 놓고 짚어 준 자리들이었다."기둥 그림자가 제일 깊은 데가 여깁니다. 촛불이 안 닿습니다.""고해실은.""제가 들어갑니다. 좁은 데는 익숙합니다. 군대 막사보다는 넓을 테니까요."그 건조한 농담에 엘로라는 그때 처음으로 웃었다.이십 년을 이 성당에서 산 대사제도 기둥 그림자 깊이까지 재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그녀는 반푼이처럼 순하게,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들어왔다.베네딕트가 제단 앞에 서 있었다.한 손에 은빛 성유물함.옆에는 성수를 담은 은 대야.제단 위에는 정화 의식에 쓰는 단검 한 자루."오셨군요, 황후 폐하. 혼자서.""네.""현명하십니다. 어미보다는.""엄마가 어리석었다는 말씀이세요?""고집이 셌지요.""그건 닮았나 봐요."제단 세 걸음 앞에서 엘로라는 멈췄다.발밑 대리석의 냉기가 신발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스테인드글라스의 붉은 빛이 흰 드레스 위에 핏자국처럼 번져 있었다."그게 정말
광장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얼음 꽃잎 사이를 빠져나가며 가늘게 울었다.첨탑 창가에서 베네딕트의 사제복 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그 손끝에 매달린 은함이 햇빛을 받아 반짝, 반짝, 신호하듯 빛났다.엄마의 재.엘로라는 한 번도 그런 걸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불탄 사람에게는 무덤이 없었다.북부 언덕 위 아빠의 비석 옆자리는 늘 비어 있었고, 마르타는 그 빈자리에도 꽃을 놓았다."……엄마."허리를 감은 칼리안의 팔이 조여들었다."믿지 마. 거짓말일 수 있어.""알아요.""그럼.""진짜일 수도 있잖아요."이반이 기록에서 읽어 준 적이 있었다.마녀사냥 때 교단은 화형대의 재를 거두었다고.신이 이겼다는 증거로 성유물함에 모셨다고.'저 안에 엄마가 있어.'초상화 한 장, 서재의 책, 빗살에 걸린 머리카락 한 올, 날개 하나.이십 년 동안 그녀가 가진 엄마는 그게 전부였다.그런데 엄마의 마지막 조각이, 엄마를 태운 자의 손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명치 밑이 얼음을 삼킨 듯 시렸다.턱이 저절로 덜덜 맞부딪쳤다.무너지고 싶었다.무릎이 그쪽으로 기울었다.엘로라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손바닥 밑에서 아이들이 꼼지락거렸다.그 작은 움직임을 붙잡고 목소리를 끌어올렸다."원하는 게 뭐예요!"떨리지 않았다.떨지 않으려고 배 위의 손에 힘을 주었다."황후 혼자 대성당으로 오십시오. 오늘 자정, 제단 앞으로.""그다음엔요.""교단의 정화를 받으시지요. 그러면 이
세라피나가 꺾이듯 쓰러졌다.몸이 얼음 꽃 위로 넘어지며 붉은 꽃잎 몇 장이 와장창 부서졌다.흑장미 수가 놓인 드레스 옆구리가 검붉게 젖어 갔다.사내가 단검을 뽑아 다시 치켜드는 찰나, 꽃밭을 가로질러 온 세드릭의 검이 그 손목을 쳤다.단검이 얼음 위를 미끄러졌다.쓰러진 사내의 소매가 찢어지며, 안감에 수놓인 교단 성표가 드러났다.가까이 선 사람들이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엘로라는 분수대 난간을 넘었다."엘로라!"칼리안이 팔을 잡았지만 그녀는 뿌리쳤다.얼음 꽃 사이로 미끄러지듯 달려가 세라피나 곁에 무릎을 꿇었다.피에 젖은 머리를 제 무릎 위로 받쳤다.얼음보다 그 머리가 더 차가웠다."세라피나 양. 눈 떠요.""……황후 폐하.""그래요, 나예요."세라피나의 입가에 피가 번졌다.그런데도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말하지 마요.""대사제님은 늘…… 이러셨으니까.""말하지 말라니까요.""편지는, 제 방 침대 밑에……."가느다란 손가락이 엘로라의 소매를 붙들었다.힘이라곤 없었다.놓지도 않았다.엘로라는 반지 낀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에녹의 등을 눌렀던 그날처럼.손가락 사이로 은빛이 새어 나왔다.그날보다 밝았다.배 속에서 두 개의 맥이 그녀의 손목 박동에 맞춰 뛰고 있었다."……뜨거워요.""참아요.""뜨거운데, 안 아파요."피가 멎었다.벌어진 살이 가장자리부터 오므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