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광장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얼음 꽃잎 사이를 빠져나가며 가늘게 울었다.첨탑 창가에서 베네딕트의 사제복 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그 손끝에 매달린 은함이 햇빛을 받아 반짝, 반짝, 신호하듯 빛났다.엄마의 재.엘로라는 한 번도 그런 걸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불탄 사람에게는 무덤이 없었다.북부 언덕 위 아빠의 비석 옆자리는 늘 비어 있었고, 마르타는 그 빈자리에도 꽃을 놓았다."……엄마."허리를 감은 칼리안의 팔이 조여들었다."믿지 마. 거짓말일 수 있어.""알아요.""그럼.""진짜일 수도 있잖아요."이반이 기록에서 읽어 준 적이 있었다.마녀사냥 때 교단은 화형대의 재를 거두었다고.신이 이겼다는 증거로 성유물함에 모셨다고.'저 안에 엄마가 있어.'초상화 한 장, 서재의 책, 빗살에 걸린 머리카락 한 올, 날개 하나.이십 년 동안 그녀가 가진 엄마는 그게 전부였다.그런데 엄마의 마지막 조각이, 엄마를 태운 자의 손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명치 밑이 얼음을 삼킨 듯 시렸다.턱이 저절로 덜덜 맞부딪쳤다.무너지고 싶었다.무릎이 그쪽으로 기울었다.엘로라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손바닥 밑에서 아이들이 꼼지락거렸다.그 작은 움직임을 붙잡고 목소리를 끌어올렸다."원하는 게 뭐예요!"떨리지 않았다.떨지 않으려고 배 위의 손에 힘을 주었다."황후 혼자 대성당으로 오십시오. 오늘 자정, 제단 앞으로.""그다음엔요.""교단의 정화를 받으시지요. 그러면 이
세라피나가 꺾이듯 쓰러졌다.몸이 얼음 꽃 위로 넘어지며 붉은 꽃잎 몇 장이 와장창 부서졌다.흑장미 수가 놓인 드레스 옆구리가 검붉게 젖어 갔다.사내가 단검을 뽑아 다시 치켜드는 찰나, 꽃밭을 가로질러 온 세드릭의 검이 그 손목을 쳤다.단검이 얼음 위를 미끄러졌다.쓰러진 사내의 소매가 찢어지며, 안감에 수놓인 교단 성표가 드러났다.가까이 선 사람들이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엘로라는 분수대 난간을 넘었다."엘로라!"칼리안이 팔을 잡았지만 그녀는 뿌리쳤다.얼음 꽃 사이로 미끄러지듯 달려가 세라피나 곁에 무릎을 꿇었다.피에 젖은 머리를 제 무릎 위로 받쳤다.얼음보다 그 머리가 더 차가웠다."세라피나 양. 눈 떠요.""……황후 폐하.""그래요, 나예요."세라피나의 입가에 피가 번졌다.그런데도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말하지 마요.""대사제님은 늘…… 이러셨으니까.""말하지 말라니까요.""편지는, 제 방 침대 밑에……."가느다란 손가락이 엘로라의 소매를 붙들었다.힘이라곤 없었다.놓지도 않았다.엘로라는 반지 낀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에녹의 등을 눌렀던 그날처럼.손가락 사이로 은빛이 새어 나왔다.그날보다 밝았다.배 속에서 두 개의 맥이 그녀의 손목 박동에 맞춰 뛰고 있었다."……뜨거워요.""참아요.""뜨거운데, 안 아파요."피가 멎었다.벌어진 살이 가장자리부터 오므라들
기름 먹인 장작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불길이 한 바퀴 둥글게 돌며 붉은 벽이 되었다.열기에 공기가 일렁여, 그 너머 사람들 얼굴이 물속처럼 휘었다.비명과 발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엘로라!"칼리안이 그녀를 품 안에 끌어넣었다.분수대 위, 사방이 불이었다.불의 벽 바깥에서 세드릭이 고함을 질렀다.흑장미 사병들이 물동이를 쏟아부었지만, 기름 위의 불은 물을 먹고 도리어 치솟았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데었다.망토 자락에 불티가 튀었다.칼리안이 그것을 맨손으로 쳐냈다.손등이 금세 벌겋게 부풀었다."손……!""가만있어."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의 망토 깃을 여몄다.목덜미 한 치도 드러나지 않게.데인 손가락이 그녀의 턱 밑에서 미세하게 떨렸다.계단 위에서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불길을 넘어왔다."보라! 신의 불이 마녀를 심판한다! 이십 년 전처럼!"남은 사제들이 그 말을 받아 외쳤다.외침을 먹은 듯 불이 한 길 더 솟았다.'엄마.'이 불이었다.엄마를 삼킨 불.엘로라의 무릎이 제멋대로 떨렸다.눈꺼풀 안쪽까지 뜨거워서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러웠다.그때 배 속이 크게 뒤채었다.두 개의 맥이 한꺼번에.배를 덮은 칼리안의 손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방금.""폐하도 느끼셨어요?"대답 대신 반지가 빛났다.은빛이었다.이어 그녀의 배에서, 보랏빛이 아닌 맑은
포고문이 붙은 지 반나절 만에 수도가 끓었다.시장 상인들이 덧문을 내렸고, 골목 어귀마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댔다.교단을 믿는 목소리와 원로원의 황후를 기억하는 목소리가 부딪쳤다.그 소란이 서쪽 별채의 창유리까지 웅웅 떨게 했다.대성당 앞 광장에는 수천이 모였다.계단 위에서 사제들이 성가를 불렀다.그 아래, 몇몇이 발치의 돌을 주워 손바닥에서 굴렸다.돌이 어디로 날아갈지는 아직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종탑에서 비둘기 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광장 위를 맴돌았다."가지 마."칼리안은 창가에 등을 기댄 채였다.엘로라는 거울 앞에서 망토 끈을 쥐고 있었다."가야 해요.""넉 달이야.""세어 주셔서 감사해요.""돌 든 놈들 안 보여?""보이니까 가는 거예요."끈이 자꾸 손가락에서 빠져나갔다.엘로라는 떨리는 손을 감추지 않고 다시 묶었다."로웰이 지하에 갇혔을 때도 광장에 나갔었어요.""알아.""그땐 아무도 안 들었죠. 반푼이 말이니까.""이번엔?""이번엔 교단이 먼저 겁을 냈잖아요. 포고문까지 붙이고."칼리안이 창에서 등을 뗐다.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끈을 빼앗더니,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그러고는 제 망토를 벗어 그 위에 한 겹 더 덮었다.검은 모직에서 그의 체온과 쇠 냄새가 났다."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마.""네.""돌 날아오면 내 뒤.""네.""그리고.""
자정이 넘은 집무실에는 등잔 기름 타는 냄새가 짙었다.책상 위에 펼친 수도 지도의 귀퉁이를 문진 넷이 눌러 두고 있었다.대성당 자리에 누군가 붉은 잉크로 동그라미를 쳐 놓았다."교단을 친다."세라피나의 고백을 다 듣기도 전이었다."대사제 목을 쳐서 대성당 첨탑에 건다.""폐하."엘로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그럼 교단이 통째로 들고일어나요.""그래서.""백성들은 아직 교단을 믿어요. 대사제를 죽이면 폐하는 마녀한테 홀린 폭군이 돼요.""이미 폭군이야.""레이너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소리로 사람을 모을 거라고요.""그럼 닷새 뒤에 기사단이 널 치는 걸 구경하라고?""막아야죠. 칼 말고요."칼리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붉은 눈 속에서 오래된 불이 타올랐다.폭군의 불이었다.다만 그녀의 손이 팔 위에 얹혀 있는 동안, 그 불은 번지지 않았다.문가에서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폐하. 교단 기사단은 삼백입니다.""우리는.""두 배입니다. 다만 교단 기사와 붙으면 칼을 내려놓는 자가 나올 겁니다. 신을 베는 일이라 여길 테니까요.""…….""하나 더 있습니다. 대사제는 원로원 의원이 아닙니다. 불체포 특권도 없지요.""그럼 잡으면 되겠네.""교단의 수장은 황제의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 교단법입니다.""법 좋아하는 놈들 많네.""저도 싫어합니다, 폐하."'또 법이야. 또 벽.'엘로라는 지도 귀퉁이를 손끝으로 눌렀다.양피지가 손톱 밑에서 바스락 구겨졌다.에반디스도 원로원의 법 뒤에 숨었다가, 그녀가 소리 내어 읽은 법과 펼친 장부에 끌려 나왔다.신의 이름이 걸린 벽이라도, 그 벽돌을 쌓은 건 사람의 손이었다."세라피나 양."엘로라가 돌아보았다.세라피나는 집무실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칼리안은 그녀를 지하로 내려보내려 했지만, 엘로라가 막았다."대사제가 보낸 편지, 아직 있어요?""……네. 다 태우라고 하셨지만, 못 태웠어요.""왜요.""언젠가 누가 물어볼 것 같아서요. 제가 왜 그랬는지."엘로라의
레이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로라가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살려 두었습니까?” 긴 침묵 끝에. 레이너드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살린 것이 아닙니다.” 엘로라의 눈이 커졌다. “그럼 누가…….” 레이너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당시 황궁에 있던 단 한 사람이.” 레이너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선대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엘로라는 숨을 삼켰다. 그 순간 칼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레이너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선대 황제의 황후였습니다.” 레이너드의 말이 끝난 순간 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왜 그 이름이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등장했는지, 엘로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가 저를 살렸다고요?” 레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