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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의 입술은 쉼 없이 움직였지만, 준우의 고막에 닿은 말들은 의미를 맺지 못하고 흩어졌다.
카페 안의 소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옆자리에서 달그락거리는 커피잔 소리, 창밖을 지나는 차 바퀴 소리.
준우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제 앞에 남은 커피 컵만 응시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의 삶은 거창한 대의명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눈을 뜨면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고, 어둠이 내리면 기절하듯 잠드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온 단어들은 생경했다. 촉매, 뒷배. TV 화면 속에서나 유통되던 활자들이 현실의 공기를 타고 넘어와 그를 압박했다.
“준우 씨? 듣고 계시는 거 맞죠?”
현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준우의 멍한 의식을 낚아챘다. 준우는 움찔하며 컵을 쥐었던 손을 떼었다. 손바닥에 맺힌 차가운 수분이 바지에 스며들었다.
“아, 네. 그런데…… 좀 체감이 안 돼서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대략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셨을 거라 믿어요.”
현수의 확신에 찬 어조에 준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지나치게 반짝였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 특유의 그 열기가 준우에게는 오히려 부담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에게 협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준우는 대답 대신 창밖을 보았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발을 놀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일을 하러 간다. 하지만 자신은? 준우는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것 같습니다.”
현수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완벽하게 짜인 시나리오에서 예상치 못한 오타를 발견한 편집자의 얼굴이었다.
“어째서죠? 조건이 부족한가요?”
“그런 게 아니라요. ……제 상태가 이렇습니다. 우울증이 낫지도 않아서, 그냥 들어오는 임무나 간신히 처리하고 남은 시간은 뻗어 지내요. 이런 중차대한 일을 감당할 여력이 저한테는 없습니다.”
현수는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준우의 휑한 눈가와 구부정한 어깨를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기묘한 위화감의 실체가 보였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욕이 거세된 자 특유의 무채색 분위기였다.
‘그래서 기록이 비어 있었구나.’
현수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넘겼다. 정화 능력자 데이터베이스. 최근 유독 비정상적인 정화 수치를 기록한 이름, ‘최준우’.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죽 가방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어 넣었다.
준우는 귀찮은 듯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글자를 읽는 행위조차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라 금방 내려놓으려 했지만,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박혔다.
폭주자들의 마지막. 사진 속 시신들은 참혹했다. 하지만 준우의 눈에 들어온 건 찢긴 살점이 아니었다. 시체 표면에 도드라진 검푸른 약흔, 그리고 현장 구석에 떨어진 주사기.
준우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잊으려 애썼던 기억 한 조각이 수면 위로 솟구쳤다. 이현승. 그를 제압하던 날, 불길 속에서 보았던 그 어색한 변색. 현승의 팔뚝 위를 기어 다니던 검푸른 혈관의 모양이 사진 속 시신들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준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현수가 물었다.
“이현승을 제압할 때, 같은 양상을 보셨죠?”
준우는 대답을 망설이며 그녀를 흘깃 보았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망막에 각인된 그 불길한 색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도 평소보다 훨씬 고통스러웠을 테고요.”
“……맞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다른 정화 능력자들은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어요. 오직 준우 씨만이 그 독기를 완전히 뽑아냈거든요.”
현수의 목소리가 쐐기처럼 박혔다. 준우는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탁자 위로 되돌려주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현승의 기억은 여전히 날카로운 통증으로 남아 있다. 그때 느꼈던 건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이한 악의였다.
‘방화복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었으면 좀 나았으려나.’
그런 장비가 늘 준비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만약 이런 약물이 시장에 더 퍼진다면, 자신이 그토록 고수하려던 ‘겨우 버티는 일상’조차 무너질 게 뻔했다.
선택의 여지가 좁아질수록 호흡이 가빠졌다. 준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현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음성에는 체념 섞인 결단이 실려 있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
현관문이 묵직한 철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준우는 운동화 뒤축을 대충 구겨 벗으며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둠 속에 잠긴 거실은 고요했지만, 귓가에는 현수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나중에 연락드리면 그때 와주세요.”
가볍게 던진 말 같았으나 그 안에는 거절하기 힘든 무게가 실려 있었다. 준우는 벽면의 스위치를 눌렀다. 명멸하던 형광등이 겨우 불을 밝혔지만, 드러난 집 안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구축 아파트 특유의 습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바닥에는 배달 음식 용기와 뜯지 않은 고지서들이 발치에 채였고, 가구 위에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세상을 정화한다는 능력자의 거처라기엔 지독히도 탁한 공간이었다.
준우는 침대로 쓰러지려다 말고 책상 의자에 몸을 부딪치듯 앉았다. 습관적으로 모니터를 켰다. 모니터 빛이 얼굴을 때리자마자 포털 사이트 메인에 낯익은 이름이 걸려 있었다.
[속보] 헌터 이현승 폭주 사건, 조사 결과 발표… ‘과로로 인한 마력 역류’가 원인.
준우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마우스 휠을 내리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사는 짧고 명료했다. 과도한 일정 소화와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폭주. 국가능력관리청의 공식 입장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과로라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현장에서 본 그 검푸른 약흔과 기괴하게 뒤틀린 혈관들, 그리고 현수가 보여준 사체들의 공통점. 그것들을 목격한 준우에게 이 기사는 조잡하게 짜 맞춘 거짓말에 불과했다. 관리청이 왜 이토록 서둘러 사건을 덮으려 하는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준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연락처 목록을 내려가다 ‘팀장’이라는 두 글자에서 멈췄다. 평소라면 업무 외엔 절대 하지 않을 연락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인이 필요했다. 자신이 쏟아부은 정화의 기운이,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단지 ‘과로’라는 단어 아래 휘발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린 뒤, 거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아, 팀장님. 접니다. 전에 그 화재 건…… 이현승 씨 건 말입니다. 어떻게 해결됐나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순간 수화기 너머의 공기가 굳었다. 짧은 정적이 준우의 뒷목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아, 그거? 관리청에서 이양받아서 다 처리했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니까 걱정 말고.”
팀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지나치게 차분했고, 묘하게 친절했다.
“그런데 네가 웬일이냐? 사건 뒤처리에 관심을 다 갖고.”
“그냥…… 기억에 좀 남아서요.”
“뭐, 몸을 그렇게 갈아 넣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라. 끊는다.”
뚝, 소리와 함께 통화가 종료됐다. 준우는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의구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팀장의 그 노골적인 선 긋기는 오히려 현수의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감추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덧붙이거나,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곤 하니까.
‘관리청은 이 일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 없군.’
그 거대한 벽을 혼자서 파헤쳐도 되는 걸까.
고민에 잠긴 찰나, 손바닥 안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란 준우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하며 화면을 확인했다. 김현수 경위였다.
“여보세요?”
“네, 준우 님. 김현수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카페에서보다 한층 더 낮고 다급했다.
“혹시 한 시간 뒤에 관할서로 와주실 수 있나요? 정문에 제가 마중 나가 있겠습니다.”
준우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부름에 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평온하지만 무너져가던 일상을 완전히 등지고, 그 검푸른 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네,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 가죠.”
전화를 끊은 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른세수를 했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구석에 던져두었던 낡은 바이크 헬멧을 집어 들었다. 쉴드에 비친 자신의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은 더 또렷해 보였다.
***
부천 ㅇㅇ경찰서.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저녁이었지만, 경찰서 정문에 서 있는 현수의 표정은 그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준우가 바이크의 엔진을 끄고 헬멧을 수납함에 집어넣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화 메커니즘 쪽으로 확인이 필요한 게 있어서요.”
인사는 짧았다. 현수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준우를 안내했다. 1층 로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지하 전용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깊게 가라앉는 하강감 끝에 문이 열리자, 백색광이 쏟아지는 과학수사대 전용 실험실이 나타났다.
준우는 실험실 중앙, 두꺼운 강화유리 너머에 놓인 비커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저거였군.’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압박감이 달랐다. 비커에 담긴 액체는 원유처럼 진득한 질감이었지만, 그 안에서 검푸른 빛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숙주의 혈관을 찾아 헤매는 기생충의 움직임과 흡사했다.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준우의 기운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길을 터주었다.
“지금 바로 정화가 가능할까요?”
현수의 물음에 준우가 비커를 가리켰다.
“전부 다 말입니까?”
“아니요. 우선 샘플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준우가 천천히 비커 앞으로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정화의 기운을 흘려보냈지만, 손끝에 닿는 저항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준우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뭐야, 왜 밀려나지?’
평소보다 서너 배는 더 강한 출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준우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광이 비커를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타올랐다. 지켜보던 현수와 수사대원들이 눈이 부신 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광채가 잦아들었을 때, 비커 안에는 불순물 하나 없는 투명한 액체만이 남았다.
정화가 끝나기 무섭게 실험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준우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였지만, 빳빳하게 세운 날카로운 눈빛에선 묘한 선민의식이 느껴졌다. 준우는 직감했다.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남자는 준우를 힐끗 훑어보더니, 옆에 놓인 다른 샘플 비커에 손을 올렸다. 남자의 손에서도 비슷한 정화의 빛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1분도 채 되지 않아 남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손을 뗐다.
결과는 참담했다. 준우가 정화한 비커는 맑은 샘물 같았으나, 남자가 손댄 비커에는 여전히 검푸른 잔여물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현수가 왜 자신을 그토록 절박하게 찾았는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남은 것들도 제가 하죠.”
준우가 덤덤하게 손을 뻗어 나머지 비커들을 정화해 나갔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준우의 손과 비커를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무리하신 건 아니고요?”
현수가 다가와 준우의 안색을 살폈다. 준우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자신의 상태를 가늠해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평소보다 좀 더 피곤한 정도네요. 다만 확실히 질기긴 합니다. 기존 폭주자들이 10 정도의 힘을 요구했다면, 이건…… 한 30 정도는 쏟아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네요.”
수사대원이 준우의 말을 받아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우는 투명해진 비커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에 젖었다. 만약 이 정체불명의 약물이 표준이 된다면 자신의 비루한 일상도 송두리째 뒤바뀔 터였다.
그때, 정적을 깨고 준우와 현수의 주머니에서 동시에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준우가 먼저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 너머로 팀장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최준우! 지금 어디야? 근처에 폭주 사건 터졌다. 위치 문자로 찍을 테니까 바로 튀어가!”
현수 역시 상부의 보고를 받는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116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거 성심 통제망의 잔여 오염이었다.준우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나서려 하자, 재범이 그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아까 브리핑한 거 벌써 잊었어?”“아, 맞다. 몸이 먼저 나갔네.”준우는 숨을 가다듬고 차례를 기다렸다.팀은 브리핑대로 민간인 대피부터 시작해 제압과 정화를 순서대로 수행했다.덕분에 폭주자는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멀쩡히 의료진에게 들려갔다.이전과 완전히 다르고 명확해진 제압 절차에 준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안 했다고? 미치겠군.’준우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불에 타서 뼈와 근육만 남아 있었다.
115몇 달간은 서로 떨어진 채 바쁜 시간을 보냈다.광고 모델로 일하거나 막노동, 알바로 번 돈을 차근차근 모았다. 그렇게 넷이 모은 자금으로 겨우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마침내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 정리를 시작했다.우선 준우가 박스를 정화하고 재범이 박스를 모았다. 혜진이 박스 내부 벽을 잘라 큰 공간을 확보했고, 전기와 수도는 기사를 불러서 마련했다.채은은 재빠르게 방들을 꾸몄으며, 각각 장비와 자신들의 물건을 올려둘 곳 역시 마련했다.준우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카페 쿠폰과 생체에너지 보충제를 넣었다.책장 위에는 책 몇 권과 피규어 몇 개를 대충 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각자의 책상을 둘러보니 고스란히 취향이 드러났다.재범의 자리는 칼같이 각이 잡혀 있었고, 혜진은 카메라나 렌즈가 많았으며, 채은은 아기자기하고 분홍빛이 돌았다.현수는 경찰 형사 같은 책상이었고, 승아는 이전에 봤던 책상 모습과
1140팀은 카페에서 길드의 조건을 정하기로 했다.다만 이들은 예약실을 따로 잡아야 했다.이전에 일반 테이블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인과 사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어딘가 비공식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안 되겠다. 다음번에는 예약실을 잡자.”그렇게 해서 들어온 예약실이었다.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화하고 토론한 끝에, 이들은 다음 조건들을 정리해 냈다.- 비영리 운영- 폭주자 구금 권한 없음- 정화와 구조만 담당- 출동 기록과 회계 공개- 피해자 신병은 의료/복지기관에 인계- 관리청의 부당
113추가적으로 새로운 폭주 대응 체계가 발표되었다.- 관리청과 경찰청의 상층부 교체- 경찰, 소방, 의료진, 능력자 합동 출동 강제- 현장 지휘관에게 긴급 판단 권한 부여- 약물 및 원격 조종 여부 우선 검사- 폭주자를 우선 구조 대상으로 분류- 정화 가능성 확인 전 사살 금지- 대응 기록 외부 감사- 피해자 가족과 의료진의 이의제기 절차 마련현수는 신설된 폭주대응본부의 현장지휘관 자리를 제안받았다.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 정도 변화면 나름 개선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진서
112며칠 뒤, 국회의사당.성심과 경찰청, 능력자관리청의 결착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현수와 승아, 의료진, 성심 현장대장, 구조된 능력자들이 나와 차례로 증언했다.현수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현장 보고를 꾸준히 올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성심의 자료만 받아들이고 제 보고는 무시했습니다.”승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절대로 성심 전체가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층부,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구조된 능력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는 전부 폭주해서 괴물이 되거나 버려져 죽었을 겁니다.”마지막 순서로 준우가 증언대에 섰다.준우는 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직접
111김진서의 체포가 확정되자, 정부는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자신들은 다르다는 외침이었다.어찌 보면 손바닥 뒤집기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상징성을 지우기 위함이었다.경찰 특수본은 성심 길드는 물론 능력자관리청과 경찰청을 압수수색했다.특수본에 들어간 현수와 경찰 실무자들 역시 제0관제센터를 공식 압수수색하고 모든 기록을 확보했다.체포된 일부를 제외한 성심 현장대원들은 피해자 구조에 참여했다.그 수가 워낙 많아 성심 전체가 달라붙어도 힘에 부쳤다.준우는 정화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지만, 곁으로 다가온 혜진의 어깨를 빌려 겨우 걸음을 옮겼다.관제센터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수많은 카메라와 생존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준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기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밀어 넣으며 급하게 물었다.
019산길을 수 차례 돌아 들어간 끝에야 차가 멈춰 섰다. 사방이 가파른 능선으로 가로막혀 지도상으론 그저 험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은밀한 은거지나 비밀 시설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면에는 'OOO 연구원'이라는 투박한 현판이 대놓고 걸려 있었다. 오히려 너무 당당해서 더 이질적인 광경이었다.차 문을 열고 내리던 채은이 미간을 좁혔다. 건물 외벽은 이미 세월에 깎여 나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그녀의 감각은 전혀 다른 신호를 읽어내고 있었다.“이상해. 왜 아직도 전력이 흐르고 있지?”“전력?”혜진이 되물으며
018소독차 냄새가 밴 공기는 이제 폐 깊숙한 곳까지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준우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무심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집을 병실로 옮기는 게 아니라, 병실을 집으로 등기 이전해야 할 수준이었다. 창밖으로 저무는 노을이 병실 안쪽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병상 한편에는 재범과 채은, 혜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앉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맞은편, 현수만이 유일하게 노트북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
017서울의 외곽, 간판조차 없는 건물의 지하 연구소. 낮은 웅성거림이 가득한 공기 속으로 날 선 대화가 섞여 들었다. 모니터 속에서는 준우가 움직이는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결국, 저놈을 확보해야 한단 소리군.”연구원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화면 속 준우의 몸짓 하나하나를 뜯어보던 다른 연구원이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저 친구의 정화 능력만 있으면 약의 결함을 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소거할 수 있어. 이론상으론 완벽해지겠지.”“협력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난감하군.”“그럼 협력하게 만
016집을 나선 준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 쓰러지면 다시는 관리청의 의료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 제 발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원히 괜찮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그를 움직였다.현수는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