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기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는 걸 깨달았다.그 사실이 더 싫었다.하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거의 씹어 삼키듯 말했다.“나한테 지금 무슨 일 있는 거야?”건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하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아주 선명하게 알았다.건우는 뭔가를 알고 있다.정확히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하나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너, 뭔가 알고 있지.”건우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 순간 하나는 자기 안쪽에서 이상한 감정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두려움과, 분노와,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 같은 것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 감정이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날것이라서,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더 거리를 벌리고 싶어졌다.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낯선 감정 하나가 스치듯 올라왔다.'그를 너무 가까이 두지 마.'그건 분명 자기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문장이라기보다 감각에 가까웠다. 아주 차갑고 단호한 경고 같은 것. 하나는 그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느꼈다. 자기 안에서 자기 것이 아닌 어떤 감정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메모보다 더 선명하게 사람을 무너뜨릴 때가 있다.하나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나 이상해.”그 말은 건우에게 한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고백처럼 들렸다.건우는 바로 그녀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그런데 하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오지 마.”짧은 한마디.그 말이 떨어진 뒤, 둘 사이 공기가 순식간에 멈췄다.하나 자신도 놀랐다. 건우를 향해 저렇게 날카롭게 거리를 둔 적이 있었던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방금 그 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마치 원래 자기 안 어딘가에 있었던 말처럼. 그 사실이 소름 끼쳤다.건우는 걸음을 멈췄
그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자 목 안쪽이 서늘해졌다.그녀는 컵을 치우려다가 문득 자기 손목을 봤다. 아주 희미한 자국 하나가 안쪽 피부에 남아 있었다. 누가 세게 잡은 것처럼 선명한 건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이 잠깐 닿았다 떨어졌을 때 생길 수 있는 정도의 옅은 붉은 자국. 남이 보면 별것 아니라고 넘길 정도의 흔적이었지만, 하나는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자기 기억 안에는 이 자국이 생길 만한 장면이 없었다.하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문지른다고 해서 흔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대로 두기가 불편했다. 그녀는 그 불편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너무 사소해서 더 무서운 종류의 위화감이었다.그때, 식탁 아래쪽 바닥에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보였다.처음에는 영수증인 줄 알았다. 그런데 허리를 숙여 집어 들어 보니, 손바닥 안에 접혀 들어갈 만큼 작게 반으로 접힌 메모였다. 종이는 집 안에 늘 두는 평범한 메모지였고,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종이였다.하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천천히 그 종이를 펼쳤다.짧은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그 애를 믿지 마.'하나는 그대로 굳었다.처음에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한 쪽에 가까웠다. 그 문장은 너무 단순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끔찍했다. 그 애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왜 믿지 말아야 하는지, 누가 이런 문장을 써서 식탁 아래 떨어뜨렸는지. 질문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질문보다 먼저 그녀를 붙잡은 건 글씨체였다.자기 글씨였다.틀릴 리가 없었다.자음의 각도, 받침을 눌러 쓰는 버릇, 모음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는 습관까지 전부 자기 것이었다. 몇 년째 손으로 써온 문장을 자기 눈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그런데 하나는 이걸 쓴 기억이 없었다.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종이를 쥔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을 줬다가, 금세 다시 풀었다. 너무 세게 구기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
그 말은 이상하게도, 건우가 예상했던 어떤 설명보다 더 깊게 박혔다.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단순히 정보를 숨기는 사람의 대답이 아니었다. 마치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밤이 건우에게 닿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건우는 한참 뒤에야 낮게 물었다.“그걸 누가 정해.”서하는 이번엔 거의 숨처럼 말했다.“내가.”짧은 문장이었다.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게 들어 있었다.건우는 더 묻지 못했다.왜냐하면 그 짧은 대답 안에서, 서하가 지금까지 혼자 감당해온 밤의 무게 같은 것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명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더 많은 게 전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거실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둘 다 더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 정적은 비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말이 끝내 문장으로 되지 못한 채 둘 사이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건우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고, 서하도 그 손을 끝내 떼어내지 않았다.그날 밤, 건우는 아주 분명하게 알았다.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하나가 감당하지 못하는 어떤 밤을 대신 들고 있는 존재라는 걸.그리고 더 끔찍한 건, 그걸 알면서도 자기가 이 사람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아침은 늘 잔인할 만큼 평범하게 온다.밤새 어떤 감정이 지나갔든, 어떤 불안이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었든, 해는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떠오르고 방 안으로는 얇은 빛이 들어온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연한 햇빛은 방 안 구석구석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췄고,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물컵과 충전기에 연결된 휴대폰, 어젯밤 대충 벗어둔 카디건까지 전부 너무 익숙한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하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몸이 묘하게 무거웠다.잠을 오래 자서 생기는 나른함과는 조금 달랐다. 머리는 맑지 않았고, 어깨와 팔에는 이유 없이 잔피로가 얹혀 있었다. 마치 깊이 잠든 게 아니
이런 식이다.하나일 때는 말이 닿기 전에 먼저 망설이는 쪽에 가까운데, 서하는 늘 사람을 한 발 먼저 읽고 그걸 짧게 찔러오는 식으로 대답했다. 설명은 적고, 정답은 이상하게도 정확한 방식. 그래서 더 짜증 나고, 더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하게 되는 사람.건우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그럼 하나만 물어보자.”서하는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선만 아주 느리게 건우 쪽으로 옮겨왔다.“뭐.”“너, 나한테 뭘 숨기고 있어?”그 문장은 의심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더 이상 탐색하듯 떠보는 단계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질문.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바로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은 거절이라기보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재는 사람의 침묵에 가까웠다. 건우는 그걸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늘 비슷한 종류의 피로를 느꼈다.또 저 표정이다.말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사람의 얼굴.건우는 낮게 웃었다.“또 그 표정이네.”“무슨 표정.”“말 안 할 거면서, 할 수도 있는 척하는 표정.”그 말에 서하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웃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애매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흔들림만으로도 건우는 확신했다. 지금 이 사람은 완전히 냉정한 척하고 있을 뿐, 속으로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걸.“알면서 묻는 거잖아.”서하가 말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지.”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그래서 더 열 받아.”거실 안 공기가 잠깐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조명 아래 드러난 서하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건우는 그 표면 아래에 숨겨진 피로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늘 밤의 서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힘이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힘이 빠질 만큼 오래 버틴 사람이 겨우 표정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건우는 잠시
집 안이 완전히 잠든 시간이었다.시계는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고, 거실 한쪽에 켜둔 스탠드 조명만이 소파와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창밖은 비가 올 듯한 눅눅한 어둠으로 가득했으며, 닫힌 유리창 너머로는 가끔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만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조차 없어진 뒤부터는 집 전체가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사람이 잠든 집이라는 건 원래도 조용하지만, 어떤 날의 새벽은 단순히 조용한 수준을 넘어 마치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건우는 그 정적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있었다.노트북은 진작 덮어두었고, 휴대폰도 화면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은 채였다. 그는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두 손을 비워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머릿속까지 비워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생각은 더 선명해졌다. 형의 녹음 파일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그걸 듣던 하나의 눈빛, 그리고 그 뒤로 몇 번이나 떠올랐다가 다시 지워지듯 사라진 서하의 얼굴까지. 오늘 하루는 이상할 정도로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고, 그 감정들은 밤이 깊어질수록 하나로 뭉치기보다 더 세세하게 갈라졌다.그중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건 서하였다.정확히는 서하가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는 감각이었다.건우는 그걸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왔다. 서하는 원래 그런 식이었다. 필요한 말은 하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더 적게 말하는 사람. 처음엔 그게 냉정하다고 생각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이 사람 나름의 방식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됐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하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진 뒤에는 더 그랬다.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이 안 오는 이유가 단순한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머릿속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이런 날은 억지로 잠들
하나 안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시간 말고도,전혀 다른 결의 시간이 따로 있다는 걸.그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너… 기억 안 나?”하나가 눈을 깜빡였다.“뭘.”“방금 전.”건우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솔직한 쪽으로 갔다.“내가 형 목소리 얘기했을 때.”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이 건우의 얼굴을 훑듯 머물렀다가, 아주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 그 눈빛은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건우는 그 안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 같은 걸 읽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자기 안에서 너무 오래 반복해온 사람의 피로.“기억은 나지.”하나가 낮게 말했다.“그 뒤가 좀… 멍했어.”건우는 그 대답을 곧바로 믿지 못했다기보다, 그 문장이 너무 익숙한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 더 걸렸다. 하나는 지금 자기 상태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설명 가능한 범위 안으로만 끌어들이고 있었다.그건 꼭 형이 하던 방식과 닮아 있었다.건우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스스로 놀랐다.닮았다는 사실이 불편했다.하지만 외면할 수는 없었다.그는 조용히 물었다.“너도 그렇게 느껴?”“뭘.”“가끔… 중간이 비는 것처럼.”하나는 이번엔 눈을 바로 들지 못했다.건우는 숨을 아주 얕게 들이마셨다.지금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형에 대해서만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하나 자신에게, 하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한참 뒤에야 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가끔.”그 짧은 한마디가 생각보다 훨씬 크게 가슴에 박혔다.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나는 시선을 내린 채 말을 이었다.“아예 기억이 없는 건 아닌데… 뭔가가 끊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건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 식탁에서 보았던 손끝의 떨림과, 오늘 방금 전 그 눈빛이 하나로 겹쳐지는 걸 느꼈다. 그건 단순한 스트레스 반응으로 보기엔 이상할 만큼 선택적이었다. 특정한 말, 특정한 결, 특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