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290 화

작가: 양순이
last update 게시일: 2026-06-18 10:31:05
탁-.

마지막으로 방을 빠져나간 궁녀가 문을 닫았다.

두꺼운 문창살 너머로 바스락거리던 치맛자락 소리마저 완전히 멀어지자, 사방이 꽉 막힌 처소 안에는 지독할 만치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오직 하얗게 타들어 가는 향로의 연기만이 허공을 맴도는, 그 누구의 눈과 귀도 닿지 않는 완벽한 밀실.

이 닫힌 문을 경계로, 궐 안의 고귀한 귀비와 굽어살피던 상선의 서열은 허무하게 뒤집혔다.

"공사가 시작된 지 불과 닷새 만에 예순 명이 넘는 장정이 깔려 죽거나 얼어 죽었다."

차를 따르는 미옥의 앞으로, 하륜의 나직한 반말이 툭 떨어졌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잠긴 챕터

최신 챕터

  • 환관의 비   300 화

    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이 스며드는 전각 안.미옥은 나른한 손길로 정무를 앞둔 연호의 허리띠를 매어주고 있었다. 연호는 말없이 턱을 괸 채, 제 앞의 미옥을 내려다보았다.어젯밤 초희가 쏟아낸 그 끔찍한 병증.포궁악창이라 했던가.연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네가 부린 수작이겠지. 그러니 셋이 함께하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냈겠지.’연호는 제 옷깃을 여미는 미옥의 턱을 느릿하게 쥐어 올렸다.‘궁에 나가 있던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너를 이리 변하게 만든 거지? 아무래

  • 환관의 비   299 화

    안락당(安樂堂).평안을 누리라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은 황궁에서 가장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웅크린 무덤이었다.굳게 닫힌 창살 너머로 훅 끼쳐오는 공기는 멀쩡한 사람의 폐부마저 단숨에 병들게 할 만큼 무겁고 탁했다.독하게 달여낸 탕약 냄새, 시체를 닦아낼 때 피우는 값싼 향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도 덮지 못한 채 허공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썩은 피고름의 비린내.낡은 병풍 너머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생명이 꺼져가는 자들의 가래 끓는 숨소리와 건조한 신음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생기(生氣)라고는 단 한 줌

  • 환관의 비   298 화

    "아읏……!"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래를 파헤쳐지는 수치심에 초희가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초희의 안쪽 깊은 곳을 짚어보던 의녀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확장되었다. 부드러워야 할 살점 너머로, 기괴할 정도로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만져진 탓이었다.의녀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폐하! 이, 이건 단순한 염증이 아니옵니다!""무슨 소리야! 네년이 내게 분명 며칠 쉬면 낫는 병이라 하지 않았느냐!"초희가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으나, 의녀는 사시나무 떨듯 고개를

  • 환관의 비   297 화

    끔찍한 악취의 근원이 다름 아닌 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초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초희는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며 허겁지겁 침상 위에 깔린 붉은 비단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제 흉한 아래를 가렸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끝에 피가 섞인 끈적하고 탁한 갈색 고름이 미끈하게 묻어나오자,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뒤덮혔다."당장 치워라."머리 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저 더러운 것을 당장 연화당 밖으로 내던져."연호는 초희를 여인은커녕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듯, 혐오가 담긴 얼굴로 굳게 닫힌 문 너

  • 환관의 비   296 화

    그 순간, 초희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처박혔다.위는 입은 채 아랫도리만 벗으라니. 그것은 여인으로서의 최소한의 교감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이고 수치스러운 명령이었다.하지만 굴욕감에 굳었던 것도 아주 찰나였다. 초희는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번들거리는 눈빛을 빛냈다.'수치심? 그깟 게 대수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내의 혼을 쏙 빼놓고 옭아매는 건 아랫도리뿐이야. 세상천지에 그보다 확실하고 중요한 게 어디 있어.'애초에 고고한 귀족 영애들처럼 고상한 교감을 나눌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단 한 번, 저 오만하고

  • 환관의 비   295 화

    끼기긱-.무거운 연화당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독한 향유를 머리끝까지 들이붓고, 치맛자락 아래로는 아직도 매캐한 쑥 훈증 냄새를 품은 초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턱을 넘어서던 찰나였다."……!"초희의 걸음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의 시선은 반쯤 걷힌 붉은 휘장 너머, 너른 침상 위로 벼락처럼 내리꽂혔다.그곳에는 숨 막히도록 농밀하고도 노골적인 정사(情事)의 한복판이 펼쳐져 있었다.붉은 곤룡포를 반쯤 벗어 던진 연호가, 제 무릎 위에 미옥을 온전히 올려앉힌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

  • 환관의 비   147 화

    도성이 시뻘건 화마와 천 장군의 광기로 들끓고 있는 시각.쥐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하륜의 옛 사가, 그 높은 담장 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뭇잎처럼 소리 없이 마당으로 내려앉았다.강진의 발끝이 흙바닥에 닿는 순간조차 바스락거리는 마찰음 하나 일지 않았다.그는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위(四圍)를 훑었다.기척은 없었다.집주인은 진작에 흔적을 지웠고, 천 장군의 사병들이 감시하던 포위망은 경화전의 불길과 함께 허술하게 뚫려버린 참이었다.어둠 속에서도 강진의 시선은 곧장 서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기이한 구조물을 향

  • 환관의 비   146 화

    연호는 제 상처 부위를 거칠게 움켜쥐어 기어이 살점을 짓이기고서는, 매캐한 연기 속으로 미련 없이 자취를 감췄다.“폐, 폐하! 폐하……!”콜록이며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짙은 흑연(黑煙)이 유희의 시야를 완전히 앗아가고, 시뻘건 불길이 마침내 그녀가 주저앉은 비단 침구 위로 탐욕스럽게 엉겨 붙었다.“꺄아아아악!”유희의 몸에 겹겹이 덧발라져 있던 서역의 유액이 화마의 완벽한 심지가 되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그녀가 기껏 다시 걸친 옷을 녹여버리고, 희고 풍만한 살결을 게걸스럽게 핥아 올렸다.“살려,

  • 환관의 비   145 화

    화르르륵—!굶주린 화마(火魔)가 기름진 유액과 비단 침구를 집어삼키며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황동 향로에서 쏟아진 짐승의 기름이 바닥을 타고 흐르며, 경화전 내부는 순식간에 시뻘건 화마(火魔)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졌다.“꺄아아아악! 불, 불이야!”절정에 달했던 쾌락은 가장 끔찍한 공포로 돌변했다.유희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연호의 아래서 빠져나가려 버둥거렸다. 살갗을 구워버릴 듯한 열기가 사방에서 덮쳐왔다.하지만, 연호는 도망치지 않았다.오히려 그는 유희의 손목을 쥔 채, 제 발끝까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번져오는 불

  • 환관의 비   143 화

    천 귀인 유희의 처소인 경화전은 흡사 축제 분위기였다.백일 만에 황제의 발길이 닿는다는 소식은 경화전뿐만 아니라 궐 전체의 공기를 바꿔놓았다.나인들은 상궁의 서슬 퍼런 호통 아래, 황소의 기름을 섞어 만든 진득한 향료를 화로마다 가득 채웠다.사방에서 타오르는 기름진 향연(香煙)은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전각 내부를 몽환적인 안개로 채워 나갔다.“조금 더 세밀하게 닦아내어라. 털끝 하나에서도 향기가 배어 나와야 한다.”커다란 욕조 안에서는 유희의 목욕이 한창이었다.갓 따온 장미 꽃잎이 핏물처럼 떠다니는 따스한 유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