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
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
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
◊
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
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
“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
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
『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
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
“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
“노정표에 있습니다.”
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
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첨부된 것은 없습니다.”
“요청한 기록은요?”
“제가 받은 서류에는 없습니다. 문서고에도 확인하겠습니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기는 탁자 옆에서 물러나 다른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낮은 대화 뒤에 서랍 여는 소리가 났다.
베르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외투를 벗는 손에 종이 봉투가 들려 있었다.
“창고 쪽 답은 조금 늦는답니다. 출고 장부부터 맞춰야 한다더군요.”
“기다리지.”
베르트는 칼릭스 앞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칼릭스가 대답하지 않자 베르트는 빈 의자를 당겼다.
“그럼 안 드셨군요.”
종이 봉투에서 빵이 나왔다. 베르트는 손에 묻은 가루를 털고 빵을 반으로 갈랐다. 갈라진 틈에서 김이 조금 나왔다.
칼릭스는 빵보다 먼저 노정표를 옆으로 밀었다.
“부스러기 떨어진다.”
“그래서 이 위에 드리는 겁니다.”
베르트가 봉투를 펼쳐 빵을 놓았다. 칼릭스는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빵을 집어 들었지만 먹기 전에 수량표를 다시 보았다.
베르트가 남은 반쪽을 입에 물었다.
“밀가루가 모자랍니까?”
“총량만 보면 모자라지 않아.”
“그런데요.”
“어디까지 먹일 양인지가 다르다.”
칼릭스는 빵을 내려놓고 노정표를 돌렸다. 베르트가 의자를 가까이 당겼다.
“요새를 떠나 고개에 닿는 데 4일이다. 말로 가도 그렇지.”
“눈이 길을 막지 않을 때 말입니다.”
“이 안에는 고개를 넘는 날까지 거기에 넣었어.”
베르트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입에 든 것을 삼킨 뒤 다시 노정표를 읽었다.
“짐수레도 함께 갑니다.”
“그래. 먼저 간 병사가 고개에 닿는다고 밀가루 수레도 도착하는 건 아니지.”
칼릭스는 행군 수첩을 꺼냈다. 모서리가 접힌 장을 펴자 날짜 아래에 길 상태와 수레가 멈춘 곳이 적혀 있었다.
서기가 돌아오다가 탁자에서 조금 떨어져 섰다.
“현지 보급 요청서는 없답니다. 다만 이 계획은 군량을 전부 고개로 올리는 안은 아닙니다.”
“설명해 보십시오.”
서기는 수량표 아래쪽을 가리켰다.
“일부는 요새에 남겨 둡니다. 뒤에서 계속 실어 보내는 방식입니다. 출발할 때 모두 싣지는 않습니다.”
칼릭스는 서기가 가리킨 줄을 읽었다. 요새 창고에 남는 양과 운반을 맡을 수레 수가 나뉘어 있었다.
“이 수레가 돌아오는 날도 같은 노정으로 셌습니까?”
“그렇습니다. 빈 수레는 내려올 때 빠르다고 보았습니다.”
“고개 위에서 마주 오는 수레는 어디서 비켜 갑니까?”
서기는 노정표로 눈을 옮겼다.
“대기 장소를 확인하겠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다만 지금은 이 일수부터 확인하십시오. 비켜 설 곳이 없으면 빈 수레도 기다려야 합니다.”
서기가 옆에 둔 종이에 항목을 적었다. 칼릭스는 수첩을 돌려 길가에 수레를 세웠던 기록을 보여 주었다.
“여기는 길을 넓히지 못했습니다. 눈을 치워도 바퀴가 설 땅이 나오지 않습니다.”
“공병이 먼저 길을 정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병의 식량은 어느 수레에 있습니까?”
서기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배급표를 펼쳤다. 줄을 따라 내려가던 손끝이 멎었다.
“출정 병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공병은 다른 병사와 같이 도착해서 길을 고쳐야 하는군요.”
베르트가 빵을 봉투에 내려놓았다. 서기는 배급표 옆에 펼쳐 둔 종이를 더 가까이 끌어왔다.
“먼저 보내는 부대의 몫이 빠졌습니다. 병력 합계에는 들어 있지만 별도 출발일은 없습니다.”
“빠졌다고 표시해 주십시오. 수량을 고치기 전에 출발일부터 맞춰야 합니다.”
칼릭스는 밀가루 항목 옆에 손을 얹었다.
전선에서는 밀가루 자루가 남아 있어도 배급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젖은 자루를 풀고 쓸 수 있는 가루를 고르는 동안 취사병은 솥에 물부터 올렸다.
칼릭스는 수첩에서 배급이 늦어진 기록을 찾았다.
“이날은 식량이 떨어진 게 아닙니다. 취사 도구를 실은 수레가 늦었습니다.”
서기가 기록을 읽었다.
“도착한 인원만 세어서는 안 되겠군요.”
“먹일 수 있는 시각을 적어야 합니다.”
칼릭스가 수첩을 거두자 베르트는 찻주전자를 찾았다. 벽 옆에 놓인 주전자에는 물만 남아 있었다. 베르트는 빈 잔을 가져와 칼릭스 앞에 놓았다.
“일단 드십시오. 식으면 또 남기십니다.”
칼릭스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껍질이 갈라지며 봉투 위로 가루가 떨어졌다.
서기가 종이를 들고 물러나자 베르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봄이라고 적혀 있으니 눈도 없다고 여겼나 봅니다.”
칼릭스는 빵을 삼킨 뒤 물을 마셨다.
“여긴 그때 겨울 외투를 벗지.”
“고개에서는 못 벗습니다.”
“그걸 서류에 남겨야 해.”
베르트는 칼릭스가 펴 둔 수첩을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칼릭스도 더 말하지 않고 겨울옷 장부를 가져왔다.
옷은 모두 출고 가능한 물량으로 적혀 있었다. 장갑과 덧신도 같은 칸에 묶여 있었다.
“창고에서 온다는 답이 이겁니까?”
“아닙니다. 그건 재상부에서 보낸 집계입니다. 창고에서는 상태를 확인하고 있답니다.”
“직접 본 것은?”
“겉옷은 봤습니다. 수선한 물건이 섞여 있습니다. 못 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베르트가 자기 소매를 걷었다. 손목 안쪽에 덧댄 천이 드러났다.
“꿰맨 것까지 빼면 수량은 더 줄 겁니다.”
“수선했다고 버리라는 게 아니야.”
칼릭스는 장갑과 덧신이 적힌 칸을 나눠 줄을 그었다.
“젖었을 때 바꿀 몫이 있는지 보려는 거지.”
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벌 입혀 보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군무청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근위병의 창 끝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뒤이어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류함이 들어왔다.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릭스도 의자를 밀고 섰다.
서류함을 가져온 시종이 당부를 전했다.
“폐하께서는 검토를 마친 뒤 재상부로 돌려보내라 하셨습니다. 조달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검토 기한도 정하셨습니까?”
“별도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시종이 나가고 나서도 직원들은 잠깐 서 있었다. 칼릭스는 먼저 앉아 겨울옷 장부를 펼쳤다. 펜을 집는 소리가 다시 났다.
베르트가 서류함에서 나온 겉장을 읽었다.
“조달 승인까지는 났군요.”
칼릭스는 서명란을 보았다.
『재상 로웬 백작』
이름 아래에 찍힌 인장은 종이 뒷면까지 눌려 있었다. 칼릭스는 손가락으로 뒤쪽을 짚어 보고 다음 장을 넘겼다. 노정표에도 같은 서명이 있었다.
“군무청이 정한 날수가 아니었군.”
서기가 고개를 들었다.
“재상부에서 노정과 예산을 함께 내려보냈습니다. 이곳에서는 창고 수량을 맞추고 있습니다.”
“행군 담당자의 검토서는요?”
“아직 회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칼릭스는 승인 날짜와 빈 첨부란을 차례로 보았다.
“회신 전 승인입니까?”
서기가 입술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조달을 서둘러야 해서 먼저 내려온 것으로 압니다.”
“그 사유도 그대로 적으십시오.”
칼릭스는 승인서 밑에 종이를 받쳤다. 서명란을 가리지 않고 아래쪽에 검토 항목을 써 내려갔다.
행군 일수. 수레 대기 장소. 선발대 식량. 겨울옷 교체분.
베르트가 말먹이 장부를 가져왔다. 칼릭스는 겨울옷 옆에 놓고 줄을 맞췄다. 말먹이도 같은 노정표를 기준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병사 몫만 고칠 수는 없겠군.”
“말이 멈추면 뒤의 군량도 멈춥니다.”
“돌아올 때 먹일 양까지 확인해.”
베르트는 장부를 들고 창고 담당 직원에게 갔다. 칼릭스는 수첩을 넘기다가 펼쳐진 지도 사본을 보았다.
회색 고개 아래에 마을 이름이 있었다. 탈로였다.
그 옆에는 길을 따라 작은 표시가 붙어 있었다. 창고로 쓸 건물인지, 단지 숙영할 곳인지 설명은 없었다. 칼릭스는 그 표시를 손톱으로 짚었다.
엘리네는 저 길을 알았다. 전시장에서 틀린 선을 보고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어느 부분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부터 물었다.
지도 위에 놓였던 엘리네의 손이 떠올랐다. 장갑을 벗은 손가락 끝에 잉크가 남아 있었다.
칼릭스는 지도에서 손을 뗐다. 지금 엘리네에게 저 마을의 창고를 묻는다면 어떻게 들릴지도 알고 있었다.
칼릭스는 빈 종이를 당겨 지도에 빠진 항목만 적었다. 길의 너비와 경사, 겨울 통행 여부였다.
“전시 지도 원본은 확인됐습니까?”
돌아온 서기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가 기록을 모으고 있습니다. 옮겨 그린 경로가 여럿이라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대로 두십시오. 누가 맡았는지와 언제 받은 것인지만 먼저 보내 달라고 하십시오.”
“지도도 다시 검토하십니까?”
“이 노정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서기는 지도를 거두려다 멈췄다.
“그러면 이곳에 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베르트가 돌아와 빵 봉투를 접었다. 칼릭스 몫은 아직 남아 있었다. 베르트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깨끗한 종이로 감쌌다.
“마차에 넣어 두겠습니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통 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서기가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검토 의견은 모두 붙이겠습니다. 승인서도 함께 돌려보낼까요?”
칼릭스는 재상 서명이 있는 장을 맨 위로 올렸다.
“사본부터 남기십시오. 고치기 전 수량과 노정이 필요합니다.”
서기가 종이를 세어 묶었다. 복도에서는 서류함을 받으러 온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트가 문 쪽을 보고 물었다.
“이대로는 출고할 수 없다고 전할까요?”
칼릭스는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이 적힌 장을 차례로 맞췄다. 마지막으로 노정표를 넣고 보급 계획서를 덮었다.
“이 계산은 사람을 죽인다.”
(14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노정표에 있습니다.”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첨부된 것은 없습니다.”“요청한 기록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