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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최고급 통유리창을 거칠게 때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형 로펌 ‘태산’의 대표 변호사 탑층 집무실. 차태경은 짙은 회색 슈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 창밖의 흐린 도심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태경 변호사님. TK그룹 측에서 의뢰한 적대적 M&A 건, 타겟 기업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뒤에 선 수석 비서가 조심스럽게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태경은 천천히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를 스치는 그의 길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타겟: 성원테크. 대표: 송학수. 실질적 경영 대행: 송지안 본부장.]
태경의 시선이 서류 우측 상단에 클립으로 고정된 증명사진에 머물렀다.
송지안. 단정하게 묶은 머리, 옅은 화장기,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기울어가는 가업을 살리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는 스물일곱의 여자였다.“현재 성원테크의 재무 상태는 바닥입니다. 주거래 은행에서 대출 연장을 거부하면 당장 다음 주에 1차 부도가 납니다.”
“기술력은.” “확실합니다. TK그룹이 노리는 것도 성원테크의 미공개 특허 기술 세 건입니다. 껍데기는 버리고 핵심 기술만 집어삼키는 것이 이번 합병의 목표입니다.”태경은 서류를 덮으며 낮게 입꼬리를 올렸다.
완벽한 사냥감이었다. 숨통을 조이면 조일수록 발버둥 치겠지만, 결국 스스로 목줄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약자. 그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며 서늘하게 명했다.“은행 쪽에 손을 써둬. 내일 오전 중으로 대출금 상환 압박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라고 해.”
“예. 그리고 성원테크 측에는 어떻게…….” “내가 직접 가지.”태경의 짙은 눈동자에 서늘한 흥미가 스쳤다.
가장 완벽한 파멸은, 사냥감이 제 발로 사냥꾼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 날 오후, 장대비가 쏟아지는 K은행 본점 로비.
지안은 물에 젖은 서류 가방을 품에 끌어안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낡은 정장 재킷을 적셨지만, 그녀는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지점장님! 제발 3개월, 아니 한 달만이라도 기한을 연장해 주십시오! 당장 다음 달이면 특허 승인이 떨어집니다!”
조금 전, 지점장실 문을 붙잡고 매달리던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과 보안요원의 제지뿐이었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공장 직원들의 월급은 석 달째 밀려 있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점멸했다. 무너지는 다리에 힘을 주며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툭.
지안의 손에서 미끄러진 서류 가방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며 안의 서류들이 쏟아져 내렸다.
지안은 숨을 헐떡이며 황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젖은 종이들을 긁어모았다. 그때, 불쑥 뻗어 나온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흩어진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성원테크의 부채 상환 연기 신청서라.”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묘하게 귀를 파고드는 서늘한 음성이었다.
지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네이비 슈트,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칼,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짙고 깊은 눈동자. 태경은 무릎을 굽혀 지안과 시선을 맞추며, 젖은 서류를 털어 그녀에게 건넸다.“이런 서류 백 장을 들이밀어도 은행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들은 가능성이 아니라 담보를 믿으니까요.”
“누구시죠……?” “차태경이라고 합니다.”태경은 품에서 명함을 꺼내 지안의 손에 쥐여주었다.
‘기업 회생 및 법률 컨설팅 전문 변호사 차태경’. 지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성원테크의 특허 기술에 관심이 있는 투자자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송지안 본부장님, 맞으십니까.”
“저를…… 아십니까?” “비를 너무 많이 맞으셨군요. 일단 일어나시죠.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지금 당신 눈앞에 있습니다.”태경이 지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안은 벼랑 끝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을 보듯,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태경의 입가에 찰나의 호선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덫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성원테크의 허름한 본사 사무실 안은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서늘한 아침 안개가 형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한양 도성 밖, 서소문 형장.거친 모래바닥 위로 무릎이 꿇린 서연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피와 오물로 엉망이 된 소복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모진 고문으로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빠지고, 살갗은 불에 지져져 감각조차 희미했다.하지만 서연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빨리 끝났으면.’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형조 옥사에 끌려온 뒤 줄곧 바라왔던 것처럼, 어서 이 끔찍한 숨통이 끊어지기만을 바랐다.“죄인 서연은 들으라!”단상 위에 앉은 판관이 근엄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너는 옛 역모 사건의 잔당으로 몰린 죄인으로서, 국법에 따라 참수형에 처한다!”구경꾼들의 야유와 침 뱉는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망나니가 비릿한 막걸리를 입에 머금고 번쩍이는 대도의 칼날 위로 뿜어냈다.푸우우-!허연 막걸리 거품이 칼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자, 간다!”망나니가 기괴한 춤을 추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서연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목덜미로 쏟아져 내리려는 찰나였다.“멈춰라!!!”형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동시에,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구경꾼들을 거칠게 밀치며 형장 한가운데로 난입했다.히이잉-!거대한 흑마가 앞발을 치켜들며 모래바람을 일으켰다.말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사내의 모습에, 형장의 모든 사람의 숨이 멎었다.짙은 붉은색의 곤룡포.어깨와 가슴에 수놓아진 거대한 금빛 용 문양.
옥방 안, 횃불의 희미한 빛이 쓰러진 여인의 얼굴을 비추었다.산발이 된 머리카락,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창백한 뺨.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눈동자.쿵.이헌의 심장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무섭게 곤두박질쳤다.숨이 턱 막히고, 전신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송지안.’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고문으로 찢긴 저 처참한 몰골은, 며칠 전 펜트하우스 베란다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투신하던 지안의 마지막 모습과 완벽하게 겹쳐졌다.같은 얼굴. 같은 눈빛.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그 지독한 절망까지.“문 열어.”이헌의 목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깔렸다.형조판서가 기겁하며 막아섰다.“자, 자가! 아니 되옵니다! 저 계집은 내일 참수형을 받을 대역 죄인이옵니다! 대군의 옥체에 부정한 기운이……!”“당장 열어라!!”이헌의 핏발 선 사자후가 옥사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그 압도적인 살기에 옥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황급히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끼이익.무거운 옥문이 열리자마자 이헌은 미친 듯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는 짚더미 위에 쓰러진 서연의 곁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값비싼 곤룡포가 더러운 흙바닥에 끌리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지안아…… 지안아…….”이헌의 커다란 두 손이 허공에서 벌벌 떨렸다.감히 그녀의 피투성이가 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그는 서연의 얼굴 주위를 허우적거
옥체에 아직 열이…….”“전부 다 나가라고 했다.”태경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법정에서 상대를 짓누르던 특유의 서늘한 기백.그 압도적인 살기에 눌린 자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방 안에는 다시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태경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짚었다.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뇌리에 강제로 꽂혀 들어왔다.‘진안대군 이헌.’가상 조선의 실세. 현 국왕의 이복동생.병권을 틀어쥐고 조정의 생사여탈권을 쥔 무소불위의 권력자.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숙청으로 정적들을 베어 넘긴 폭군 중의 폭군.현대의 변호사 차태경의 논리적인 두뇌가, 이헌의 기억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하며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죽지 않았다.아니, 차태경의 육신은 바닥에 부딪혀 죽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이 낯선 시대, 낯선 권력자의 몸에 완벽하게 안착했다.태경은 침상에서 내려와 맨발로 방 안을 걸었다.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며 이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임을 증명했다.방 한쪽에 놓인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거울 속에는 흉터가 희미하게 남은 턱선,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분명 차태경의 지독한 절망과 독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째서…….’태경의 주먹이 서서히 쥐어졌다.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져 마땅한 죄인이었다.그녀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그런데 왜 형벌 대신 이토록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빛이 들지 않는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사방에 나뒹구는 고급 양주병들이 발끝에 채이며 탁한 소리를 냈다.태경은 카펫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었다.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헝클어진 지 오래였고, 날카롭던 턱선에는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있었다.대한민국 최고의 승소율을 자랑하며 법정을 호령하던 에이스 변호사 차태경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핏발 선 시선은 오직 두 손에 쥐여진 낡은 종이 한 장에 고정되어 있었다.끝부분이 검붉게 말라붙은 유서.지안의 피가 묻은 종이였다.‘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너 같은 악마와 얽히지 않기를.’‘네가 평생, 내 피를 뒤집어쓰고 지옥에 살기를.’종이를 쥔 태경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잘게 떨렸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녀의 짙은 피비린내가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지안아…….”갈라진 목소리가 텅 빈 거실의 허공을 맴돌았다.대답은 없었다.태경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어둠 속 저편에서, 낡은 하얀 셔츠를 입은 지안이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환각이 보였다.태경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떨리는 손을 뻗었다. 닿을 것만 같았다.“지안아,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하지만 허공을 가른 손끝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흩어질 뿐이었다.환각이 사라진 자리엔 끝없는 적막만이 남았다.그녀가 없는 세상.어떤 완벽한 승소 판결문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임료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저 심장
끼이익!타이어가 주차장 바닥을 날카롭게 긁으며 거칠게 멈춰 섰다.태경은 차 문을 발로 차듯 열어젖히고 승강기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문 열어! 당장 열어!”펜트하우스 전용 승강기 버튼을 부서져라 내리쳤다.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층수가 올라가는 붉은색 숫자가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태경의 시야를 찔러댔다.띵동.문이 열리자마자 태경은 거실로 뛰쳐 들어갔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테라스 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대표님! 그게, 저희가 다가가려 했지만 사모님께서……!”태경은 경호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테라스를 향해 내달렸다.활짝 열린 통유리창 너머로 매서운 고층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그리고 그 끄트머리.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아찔한 난간 위에, 지안이 서 있었다.“송지안.”태경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가 입고 있는 낡은 흰 셔츠 자락이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고 있었다.한 발자국만 뒤로 디디면 까마득한 허공이었다.태경의 핏발 선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거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와.”“…….”“내려오라고 했어! 송지안!”태경이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지안의 발끝이 허공을 향해 반 뼘 뒤로 물러났다.“움직이지 마.”바람에 흩날리는 옅은 목소리였지만, 태경의 발걸음을 바닥에 못 박기에는 충분했다.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경을 내려다
분노도 원망도 모두 하얗게 타버려 차가운 재만 남은 상태.오직 이 지옥을 스스로 끝낼 수 있다는 서늘한 안도감만이 그녀를 지배했다.사각, 사각.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지안의 입술 사이로 조용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다음 생이 있다면…….”차태경이 이 종이를 보게 될 순간을 상상했다.오만하고 완벽한 그의 세상에 자신이 남길 유일한 오점.“절대 너 같은 악마와 얽히지 않기를.”만년필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필체가 이어졌다.“네가 평생, 내 피를 뒤집어쓰고 지옥에 살기를.”탁.만년필의 촉이 종이 끝을 강하게 찌르며 마침표를 찍었다.지안은 만년필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마지막 저주가 담긴 유서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유리창 쪽을 응시했다.바깥으로 연결된 넓은 베란다.지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훅 끼쳐오는 차가운 고층의 바람이 그녀의 낡은 흰 셔츠를 매섭게 흔들었다.난간 너머로는 까마득한 서울의 빌딩 숲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지안은 난간을 짚고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공포는 없었다.차태경의 곁에서 숨을 쉬는 것이, 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것보다 백 배는 더 끔찍한 지옥이었으니까.---같은 시각.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원고 측이 제시한 증거는 법적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피고 법인은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태경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변론을 이어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