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이유영과 박연준이 끝나자마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거절하시면 안 될 텐데요?”“저는 거절할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이유영의 말이 끝나자 엔데스 신우는 가볍게 웃었다.분명 부드러운 울음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이만 끊을게요.”짜증이 치밀어 오른 이유영은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주저 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박연준과 이혼하기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이유영의 마음은 결코 평온할 수 없었다.아무리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박연준과 강이한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전화기 너머의 엔데스 신우는 더블루 리버스에 있었다. 그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발표한 뒤로 주변은 연일 복잡했다.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직감으로 숱한 사람들을 밀어냈다.지금까지 곁을 지켜온 종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중요한 시점일수록 신분을 감추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을 텐데, 왜 하필 이때 건강 회복을 발표한 걸까?’특히 송씨 가문의 반응은 추악했다.셋째 도련님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발표가 나오자마자 넷째 도련님과 혼인했던 여자를 앞세워 접근해 왔다.탐색이라는 명분은 허울일 뿐이었다.오랜 병환으로 셋째 도련님에게 든든한 지지 세력이 없다고 판단한 송씨 가문은 외동딸을 앞세워 이 사태를 이용하려 들었다.종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에게 딸이 한 명이라 다행이지 여러 명이었다면 더 끔찍한 일을 벌였을지도 모른다.건장이 회복되었다는 발표 이후, 엔데스 신우의 상황이 명백히 달라졌음을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도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 씨가 거절했습니다.”종수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신우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그 씁쓸함은 더 깊어졌다.엔데스 신우는 수년간 병을 핑계로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그 곁을 지켜온 이들은 그 시간 동안 인간관계의 온기와 냉혹함을 뼈저리게
그렇다.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집도 가족도 모두 잃었고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었다.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시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최대한 빨리 도련님을 찾겠습니다.”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지금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강이한이 있었기에 그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시윤이 강이한을 언급하자 진영숙의 마음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돌아오면 뭐가 달라지는데?”돌아온다고 해도 고통스러움은 여전할 것이다.그녀는 강이한과 이유영의 결말이 이토록 참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결국 이유영에 대한 증오심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이유영이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영숙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음란한 여자 같으니라고!”자기 아들은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희생했는데 정작 이유영은 다른 남자들과 잘만 어울려 다녔다.“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진영숙은 답답한 마음에 숨이 막혔다.강이한의 행동이 결국 아무 가치도 없는 희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진영숙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럴 가치가 있든 없든, 그건 도련님의 선택입니다.”시윤이 봤을 때도 이유영을 탓할 일은 아닌 것이다.이 모든 것 또한 이유영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시윤아!”진영숙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시윤을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 그 여자가 날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 몰라서 그래? 내 아들은 걔 때문에 모든 걸 다 잃었어.”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마녀가 틀림없어.”진영숙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에게 이유영은 마녀와 같은 존재였다.강이한은 이유영 때문에 모든 걸 잃었고 진영숙은 아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이 생각을 하자 진영숙은 괴롭다 못해 분노로 차올랐다.이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이미 의미 없었다.“빨리 아이를 찾아야겠어.”강이한 뿐만 아니라 아이도 빨리 찾아야 했다. 강씨 집안에 속한 모든 걸 더 이상 이
이유영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진영숙 옆에 서 있던 시윤이 공손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작은 사모님.”시윤이 어쩌다가 진영숙 같은 사람 곁에 오래 머물게 된 건지 이유영은 내심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시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영숙의 곁에 있었다.“시윤 씨, 기억력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한번 다시 말씀드리는데요. 그 사람과 전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요.”이유영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이미 끝난 일임을 단호하게 전했다.늘 온화한 모습의 시윤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이렇게 지혜로운 인물이 왜 진영숙 곁에 머물게 된 것인지 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도련님께 작은 사모님은 언제나 소중한 아내셨습니다. 그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아내?’아내라는 말에 이유영은 쓴웃음을 터뜨렸다.‘아내라고?’“잊으셨나 본데 전 아내였던 적이 없었어요.”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강씨 집안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리고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에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시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휴...”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자리를 뜨려 일어났다.그러나 겨우 두 걸음을 옮겼을 때, 시윤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사모님 생각도 하셔야죠. 사모님도 불쌍한 여자입니다.”‘불쌍하다고?’그 말에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래, 불쌍하지.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해.’“저한테 그 여자는 불쌍하기보다 증오스러운 존재에 불과해요.”그 단호한 한마디에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시윤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증오스러운 존재라...’이유영은 더는 시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자리를 떠났다.차 안에 혼자 남게 된 이유영은 씁쓸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불쌍하다고? 흥.”지금 모두가 그녀더러 진영숙을 용서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 한다.진영숙만 눈앞
진영숙은 표정이 변하더니 눈에는 짙은 음흉함이 어렸다. 그녀는 비웃으며 말했다.“빚졌다고?”그 말을 진영숙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강씨 집안은 애초에 이유영을 환영한 적 없었고 그녀가 먼저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 강씨 집안도 강이한도 그 누구도 이유영에게 빚진 것은 없었다.모든 일은 이유영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으니 따라서 감당도 그녀의 몫이었다.진영숙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임소미는 이미 아이를 데리고 퀘벡으로 떠났고 정씨 가문은 두 사람의 모든 행적을 지워버렸다. 퀘벡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지금 진영숙은 아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퀘벡에 가더라도 만날 수 없었다.이전까지는 이유영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정씨 가문은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강이한을 봐서 비록 진영숙에게 예의를 갖추진 않았지만 아이 문제에 관해서는 극단적이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진영숙이 스스로 그 모든 것들을 거부했던 것이다.이유영은 변호사를 통해 진영숙 측에 분명한 뜻을 전달했다. 그녀는 더 이상 진영숙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박연준에 대해서도 이미 정리가 끝났다.강이한과 헤어졌을 때와는 달랐다. 박연준과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유대도 없었다.‘잊으면 그만이야.’이유영은 단호했다. 신지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서주에 중요한 일이 있었던 박연준은 이유영과의 일을 끝마치고 미련 없이 서주로 돌아갔다.요즘 작업실은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이유영은 낮이면 늘 작업실에 있어야 했다.진영숙이 집에서 그녀를 찾지 못하면 작업실로 찾아왔다.하지만 이유영은 그녀를 거의 만나주지 않았다.과거 강씨 집안에 있을 땐 나름의 예우를 갖췄던 이유영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진영숙에게서 귀부인의 기품보다는 터무니없는 고집만 부렸다.그리고 이번엔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었다.“날 피한다고 해서 평생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유영, 난 평생 네 악몽이 되어 널 찾아갈 거야.”진실을 알게 된 뒤로 사흘 동안이나 이유영을 만나지
시윤이 저녁에 찾아갔을 때, 배준석은 자리에 없었다.진영숙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그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진영숙은 묵직한 시선으로 배준석을 바라보았다.“말해 줘. 지금 이유영의 눈, 이한이 거야?”진실을 빨리 알고 싶었던 진영숙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배준석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이야?”진영숙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정말 그렇단 말인가?’“어머님.”“쾅!”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영숙은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배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그를 찾은 건 다만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였을 뿐이다.“아닙니다!”진영숙의 반응을 보며 배준석이 대답했다.진실을 알게 된 진영숙이 파리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뻔했다.“유영이를 위해 말하지마.”“사실입니다.”“사실? 흥!”과거에도 사실이라고 말하고 거짓으로 끝난 적이 있었다.이게 사실일 리가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한이가 왜 서주를 떠났는데?”그 말에 배준석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의 온몸이 긴장감에 순간 굳어버렸다.그렇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각막을 이식하지 않았다면 굳이 서주를 떠날 일이 없었다.특히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머물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관계까지 있었던 상황에서 만약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강이한은 떠날 이유가 없었다.자기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진영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청하시에서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도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래서 그녀는 그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난 한 가지만 알고 싶어. 이한이 정말 살아서 떠난 건지.”긴 침묵 끝에 진영숙은 마침내 가슴 깊이 가라앉은 응어리를 누르듯 입을 열었다.그녀의 목소리엔 형언할 수 없는 무게와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배준석은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어머님, 그
원래부터 엔데스 가문의 다섯째와 여섯째 도련님은 정씨 가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유영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는 셋째 도련님까지 가세했다.즉,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이 사건에 깊이 얽혀 있는 셈이었다.하지만 이혼하게 된다면 모든 상황이 뒤바뀔 것이다. 아니, 상황의 본질 자체가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다.바로 그 점이 강이한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정씨 가문은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신시욱이 조용히 말했다.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강이한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상황 계속 지켜봐.”“네.”신시욱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 때마다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파리는 단순한 곳이 아니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위기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그런데도 강이한은 모든 걸 알고 싶어 했다.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 알아야만 했다.각막을 이유영에게 건넨 순간부터 강이한의 속죄는 시작되었다.남은 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과거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갚아나가겠노라 다짐했었다.마치 스스로 감옥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간 죄인처럼 살아가고자 했다.하지만 이유영과 정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감출 수 없었다.결국 그는 물러서서 타협하기로 했다.오직 이유영의 인생에 다시 평화가 깃들기만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그러나 자신이 사라졌음에도 이유영의 인생은 여전히 평온하지 않았다.그 사실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가혹했다.“한 가지 더 있습니다.”신시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뭐지?”“사모님께서... 파리에 계십니다. 이미 두 번이나 이유영 씨를 만나셨습니다.”사실 신시욱은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강이한의 상태를 지켜보며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연준은 알지 못했다. 지금 이유영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이유영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강이한과 박연준이 그녀의 세상에서 다시는 얽히지도 않도록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한밤중이 되어서야 정국진이 돌아왔다.그는 박준이 보내온 이미 서명이 되어 있는 이혼계약서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내일 아침에 전해줘.”“네.”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고 정국진은 곧바로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모두에게 해방이었다....한편, 우천시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이한은 침대에 누워 지붕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빗줄기는 그칠 줄을 몰랐고 강이한은 생각에 잠겼다.우천시에 온 이후로 그는 이곳이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설령 해가 떴다 해도 그 햇살은 그저 희미한 온기만 전해질 뿐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그런 희미한 햇빛조차도 매일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그때, 신시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선생님, 깨어나셨습니까?”“응.”낮잠에서 깨어난 강이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신시욱이 재빨리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강이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필요 없어.”“선생님...”“이제 이 어둠에 익숙해졌어.”“...”‘어둠에 익숙해졌다고?’어쩌면 진짜 어둠을 오래도록 견뎌본 자만이 그 말의 무게를 알 수 있을 것이다.사실 우천시에 처음 왔을 때 강이한은 깊은 절망 속에 있었다. 끝없는 어둠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고 이유영만큼 어둠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기에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그 어둠 속에서 홀로 견디며 기다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지금의 강이한도 그랬다.그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많은 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해졌고 적응해 나갔다.“파리가 더 혼란스러워질 겁니다.”신시욱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그 말이 끝나자 강이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었다.그리고 박연준도 이유영의 마음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두 거품처럼 허무하게 산신이 부서져 버렸다.“널 다시 보려고 하지 않을 거야. 돌아가.”여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다시 보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여진우의 말을 듣고 박연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이 강하게 조여 들었다.단지 이유영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만으로 박연준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그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 아팠다.‘정말 이대로 볼 수 없는 건가?’변호사를 고용하여 진영숙과 대립하고, 여진우에게 사람을 시켜 이혼 서류를 보내게 했던 그 모든 행동에서 박연준은 그녀가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비록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박연준의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그는 어떻게 백산 별장을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문기원이 운전대를 잡고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선생님.”“응.”“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문기원의 말은 일종의 위로였다. 지금 이유영에게는 어떤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쉽게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예전에는 단지 더 얽히고 싶지 않은 정도였지만 이제는 아예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그녀의 태도는 그만큼 단호했다.“시간?”박연준은 그 말을 되뇌며 쓰라림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냈다.“이유영 씨가 가장 힘들 때, 선생님은 이유영 씨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받아들이기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맞는 말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가장 믿었던 존재였고 그만큼 큰 배신을 안겼다.그녀의 최근 태도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녀가 꽤 절제된 예의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였다.풍산으로 돌아온 박연준은 여진우가 보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그의 눈엔 깊은 상실감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 그는 조용히 서명을 마치고 문기원에게 건넸다
강이한이 정말 이유영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면 진영숙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견딜 수 없는 격렬한 고통이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증오는 하늘을 덮을 만큼 치솟았고 그녀의 세상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당시 수술과 관련된 모든 기록이 없어졌습니다.”그래서 그 수술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밝혀내는 일은 그들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없어졌다고?’만약 그 수술이 그들이 짐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면 분명히 어딘가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배준석을 만나야겠어.”배준석은 강이한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한때 이유영을 무척이나 증오했었다.하지만 진영숙은 배준석이 이유영을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음을 감지했다.‘혹시 수술과 관련이 있을까?’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진영숙의 가슴속에 쌓여 있던 진실이 마치 무너진 둑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알겠습니다.”“지금 당장 다녀와!”진영숙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시윤은 시간을 확인하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진영숙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이한과 관련된 일이니 침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시윤이 자리를 비우고 방 안에는 진영숙만 남았다.그녀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 눈동자에는 깊고 음산한 살기가 번뜩였다.“이유영.”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이름을 내뱉었다.마치 그 이름만으로도 이유영을 산산조각 내고 싶은 듯했다.강이한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생각에 가슴이 아파졌다.사실 예전부터 그런 가능성에 대해 막연히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시윤이 그 가능성을 눈앞에 들이밀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진영숙은 두려웠다.그녀에서 아들은 늘 고귀하고 자랑스러웠으며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존재였다.그런 강이한이 시력을 잃고 어둠 속에 잠겨 있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이유영, 이유영!”진영숙은 미어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마치 주술처럼 그 이름을 되뇌었다.이유영은 이제 그녀에게 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