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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위험한 거래

작가: 안나
last update 게시일: 2026-08-05 18:01:34

같은 시각.

이민우는 자신의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넓은 유리창 너머로 펼쳐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집무실 소파에는 진경이 앉아 있었다.

“정말 하연수가 혼자 나올까요?”

진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민우는 천천히 와인잔을 흔들었다.

“나옵니다.”

“강태성에게 알릴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알리겠죠.”

이민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하연수는 생각보다 영리한 여자니까.”

진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왜 혼자 나오라고 한 거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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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24화. 위험한 거래

    같은 시각. 이민우는 자신의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넓은 유리창 너머로 펼쳐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집무실 소파에는 진경이 앉아 있었다. “정말 하연수가 혼자 나올까요?” 진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민우는 천천히 와인잔을 흔들었다. “나옵니다.” “강태성에게 알릴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알리겠죠.” 이민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하연수는 생각보다 영리한 여자니까.” 진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왜 혼자 나오라고 한 거죠?” “그 여자가 강태성을 얼마나 믿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이민우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계약서 원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쪽에는 하정우의 서명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 뒷부분은 따로 분리되어 보이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건 아주 작은 의심 하나로도 금이 가는 법이죠.” 그는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연수가 강태성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군요.” 진경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태성과 연수를 갈라놓는 거잖아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까?” 이민우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23화. 혼자 나오라는 조건

    이민우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연수는 지난번 술집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상대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던 태도. 부드러운 말투 속에 감춰진 집요한 소유욕. 자신을 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태성에게서 빼앗아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던 눈빛까지. 연수는 이미 이민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초대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다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 속에 남은 아버지의 서명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았다. 이민우가 계약서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정말 정우 산업의 파산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과연 외면할 수 있을까. 연수는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다 태성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무슨 연락이 오든 반드시 먼저 알리겠다고 했던 약속. 그녀는 곧바로 메시지를 캡처해 태성과 진혁에게 전송했다. 잠시 뒤 태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연수야.”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긴장되어 있었다. “메시지 봤어요?” “지금 확인했다.” “이민우가 보냈어요.” “알아.” 태성은 짧게 숨을 골랐다. “절대 혼자 나가지 마.” “저도 그럴 생각은 없어요.” 연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만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22화. 진실을 판다는 남자

    거실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 진혁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조금 전 도착한 익명의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정우 산업을 무너뜨린 진짜 사람을 알고 싶다면, 강태성을 믿지 마십시오. 문장 아래에는 오래된 계약서 일부를 촬영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희미한 글씨와 낡은 도장이 찍힌 문서였다. 사진의 가장 위쪽에는 분명하게 하정우 산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태성은 진혁의 휴대전화를 받아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발신 번호부터 확인해.” 진혁이 즉시 번호를 조회했지만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없는 번호야.” “없는 번호라고?” “가상 번호를 거쳐 보낸 것 같아. 다시 연락해도 연결되지 않을 거야.” 태성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제보가 아니야.” 그는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을 확대했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교묘하게 잘라낸 화면이었다. 계약 당사자의 이름과 날짜는 보였지만, 계약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 문장은 가려져 있었다. “이건 우리를 시험하는 거야.” “누가 먼저 흔들리는지 보려는 거지.” 태성은 진혁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보안팀에 연락해. 메시지의 발신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알았어.” 진혁이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태성의 시선이 연수에게 향했다. “연수야, 당신은 일단—”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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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는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돌렸다. 금빛 장식이 스탠드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펜의 몸통 한쪽에 멈췄다. 금색 부분에 작은 흠집이 있었다. 대각선으로 길게 이어진 얕은 자국. 처음 선물받았을 때는 세월의 흔적이라 생각하고 넘겼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수는 휴대전화를 들어 평창동 서재에서 찍어온 사진을 열었다. 그날 김미진에게 허락을 받고 촬영해둔 오래된 사진이었다. 연수는 화면을 확대했다. 젊은 강 회장의 손에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사진의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금빛 몸통에 난 대각선 흠집은 분명했다. 연수는 자신이 들고 있는 펜과 사진 속 펜을 번갈아 바라봤다. 같은 만년필이었다. 아버지와 강 회장이 함께 서 있던 바로 그날, 강 회장은 이 펜을 들고 있었다. 연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사진을 더 확대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서류의 제목이 흐릿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글자가 작아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연수는 화면의 밝기를 높이고 사진을 조금씩 움직였다. 희미한 글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정우 산업 기술협력 계약서. 연수의 숨이 멎는 듯했다. 아버지의 회사와 태성그룹은 단순히 같은 행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두 회사는 기술협력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계약은 어떻게 되었을까. 왜 정우 산업은 불과 몇 달 뒤 갑자기 무너졌을까. 그리고 왜 그동안 누구도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20화. 보호라는 이름의 침묵

    태성 역시 과거에는 같은 방식으로 연수를 지키려 했다. 연수를 조사에서 제외하고,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 안전하게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연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버려졌다고 생각했고, 태성의 침묵 속에서 혼자 무너져야 했다. 태성은 그날 조사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연수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외면당했다고 생각한 눈빛. 혼자 남겨졌다는 절망. 그 기억이 태성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니.”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혁의 눈썹이 움직였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 태성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고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틀렸어.” “태성아.” “연수는 이미 사진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우리 집안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 태성은 문서를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자료를 숨기고 연수를 제외한 채 조사한다면, 지난번과 달라지는 게 뭐지?” “그때와는 다르잖아.” “다르지 않아.” 태성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연수를 지킨다는 이유로 그녀의 선택권을 빼앗는 것은 똑같아.”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에 나는 연수가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태성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지킨 것은 연수가 아니었어.” 그의 목소리에 깊은 후회가 묻어났다. “내가 연수의 상처를 보는 것이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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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로 돌아온 진혁은 수장고 안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는 후원 명단과 행사 기록, 윤재호에게 받은 메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문서를 연수에게 보여줘야 할까.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연수의 권리였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더구나 태성그룹이 아버지의 몰락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이 생기는 순간, 연수와 태성의 관계는 이전처럼 평온할 수 없을 것이다. 연수는 이제 막 태성의 어머니에게 인정받았다. 김미진에게 승진 축하를 받았고, 강 회장이 아끼던 만년필까지 선물로 받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직후였다. 그런 연수에게 그 집안이 자신의 가족을 무너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진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연수의 이름이 떠 있었다. 진혁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연수씨.” “진혁씨, 지금 통화 괜찮아요?” “괜찮아. 무슨 일이야?” 전화기 너머로 연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오늘 평창동 저택에서 예전 사진을 하나 봤어요.” 진혁의 표정이 굳었다. “어떤 사진?” “아빠가 있었어요.” 연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빠가 행사장에서 웃고 있었는데, 그 옆에 태성 오빠 아버님도 계셨어요.” 진혁의 손이 전화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연수 역시 이미 과거의 입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사진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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