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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화

그 한마디에 욕망에 휩쓸렸던 성규연의 이성이 순식간에 돌아오며,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화가 너무 치밀어 잠시 잊고 있었다. 강아연은 지금 임신 중이었다.종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자 성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고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디가 아파?”강아연은 입술을 깨문 채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질 듯 약했다.“배가... 아파요...”기분 탓인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설마 아이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성규연의 표정이 더 굳었다. 그는 강아연을 반듯하게 눕히고 움직이지 말라고 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의료진이 바로 들것을 밀고 나와 강아연을 옮겼다.강아연은 배를 감싼 채 내내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곁을 따라오는 성규연을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예전에 성준서를 임신했을 때도 배가 아픈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늘 혼자 병원에 갔고 성규연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구석에 버려둔 사람처럼 강아연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병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검사받을 때까지 줄곧 곁을 지켰다. 의사마저 감탄하듯 말했다.“성 대표님이 사모님을 정말 많이 걱정하시네요.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신가 봐요.”‘사이가 좋다고?’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 가장 우스운 말이었다.강아연은 고개를 돌려 성규연을 보지 않았다.성규연은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 의사에게 물었다.“지금 상태가 어때요?”“안심하셔도 돼요. 사모님께서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반응이 조금 컸던 것뿐이고, 아이는 괜찮아요.”의사가 답했다.하지만 성규연이 듣고 싶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본인은요? 몸에는 문제없나요?”“현재 사모님의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에요. 평소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해 주시고,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관계를 피하시는 게 좋겠어요.”강아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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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바로 다음 순간 성규연이 다가와 손을 들어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강아연은 그 행동에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성규연의 다른 손이 목덜미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든 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여전히 제멋대로야.’강아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성규연은 원망스러운 시선을 무시하고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손끝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잠깐 부드럽게 문질렀다.강아연은 입술을 살짝 떨며 고개를 돌려 피했다.성규연과는 어떤 접촉도 하고 싶지 않았다.“강아연.”성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에는 타고난 위압감이 실려 강아연의 마음을 두드렸다.“나도 한때는 너와 이혼할 생각을 했어.”강아연이 흠칫했다. 성규연은 느긋하게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강아연이 건넸던 이혼 합의서였다. 거기에는 강아연의 이름뿐 아니라 성규연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강아연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렇다면 성규연은 이미 서명한 것인가?’성규연은 강아연의 눈에 번지는 작은 빛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정말 기다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군.”그렇게까지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아연은 성규연의 어두운 눈빛을 받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망설임 없이 손을 이혼 합의서 쪽으로 뻗었다.그것은 오랫동안 바라온 해방과 자유였다.하지만 손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 성규연이 갑자기 웃더니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합의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강아연은 눈을 크게 떴다.잘게 찢긴 종잇조각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안 돼요! 안 돼...”강아연이 붙잡으려 했지만 종잇조각은 잔인하게 손끝 사이로 흘러내렸다. 조금 전 손에 잡힐 듯했던 자유는 결국 닿을 수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성규연은 먼저 서명까지 해놓고, 눈앞까지 온 희망을 강아연이 보는 앞에서 완전히 찢어버렸다.너무도 잔인했다.“강아연, 네가 알아야 할 건 하나야. 내가 먼저 놓아주지 않는 이상 이혼은 꿈도 꾸지 마.”성규연은 강아연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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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화

당장이라도 산산조각낼 듯한 성규연의 눈빛을 마주한 강아연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래도 한마디씩 똑똑히 말했다.“후회 안 해요.”이미 성규연에게 실망했고 이 결혼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다. 무엇을 후회하겠는가.“좋아. 아주 좋아!”성규연은 분노 끝에 웃음을 터뜨리며 강아연을 놓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네가 정말 후회하지 않는지 두고 보지.”강아연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성규연은 휴대전화를 켜 그녀의 앞에 던졌다.“직접 봐.”강아연은 화면을 보는 순간 몸이 굳어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화면에는 아버지 강명우가 있었다.한때 기품 있고 활기 넘치던 중년 남자는 이제 병상 위에 누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쇠약해져 있었다.‘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강아연은 휴대전화를 낚아채 강명우의 진단서를 넘겨봤다. 뒤로 갈수록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렸고 눈빛도 점점 어두워졌다.“강명우는 교도소에서 지병이 재발했어.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오래 못 버텨.”성규연은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무심하게 말했다.그에게 강명우는 하루라도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원수였다.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소식을 강아연에게 알려준 것 자체가 성규연에게는 이미 한 번 봐준 셈이었다.하지만 강아연에게는 전혀 달랐다. 강명우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어릴 때부터 늘 사랑해 주고 존경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강명우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하지만 교도소의 의료 환경으로는 강명우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성규연이 뒤에서 막으면 필요한 절차를 모두 밟는 동안 최적의 치료 시기를 놓치고 말 것이다.강아연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병에 시달려 잿빛이 된 강명우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강아연은 아버지가 절대 흉악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언젠가 반드시 누명을 벗겨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아픈데도 아무것 할 수 없었다.자신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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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성규연은 강아연을 바라봤다.“프리스는 아내와 사이가 아주 좋아.”강아연은 순간 멈칫하다 곧 이해했다.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성규연은 프리스와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강아연이 자기 아내라고 공개했고, 인터넷에서는 아내를 애타게 찾는 다정한 남편 이미지까지 만들어낸 것이었다.강아연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역시 성규연 같은 철저한 사업가가 감정에 휘둘려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을 할 리 없었다.그런데 한 가지는 이해되지 않았다.“왜 꼭 저여야 해요?”자신은 이미 떠났다. 성규연이라면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를 골라 연기만 시켜도 됐고, 그러다 진짜 관계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자신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성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사실 그 역시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아마도 익숙해져서일 것이다.결혼 초만 해도 성규연은 강아연이라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이 결혼은 성규연에게 사실상 이름뿐인 관계였고 강아연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굳이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오히려 강아연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거부감이 있었다.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도 점점 강아연의 존재와 향기에 익숙해졌다.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매일 밤 기다렸다가 다음 날 입을 옷을 골라두고 주름 하나 없이 다림질해 놓는 강아연에게 익숙해졌다. 집안의 모든 일은 늘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강아연이 자신을 볼 때마다 맑고 예쁜 눈에 별이라도 가득 박힌 듯 반짝이던 모습에도 익숙해졌다. 그 눈을 보면 종일 쌓인 업무 피로가 조금은 풀리곤 했다.하지만 성규연은 그것이 강아연에게 서서히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강아연이 떠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그런데 정말 강아연이 떠나자 평생 자신 있어 하던 감정 조절이 갑자기 무너졌다.넥타이를 예전처럼 반듯하게 매지도 못했고, 커프스단추는 짝을 맞추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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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입으로는 선택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처음부터 선택권 따위 주지 않았다.명백한 협박이었다.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강아연은 원망에 찬 눈빛으로 성규연을 노려봤다.하지만 성규연은 조금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아연의 눈에 자신을 향한 분노가 선명해지자 기분이 이상하게 나아졌다.적어도 지금은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감정이라도, 계속 자신에게서 도망치려고만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성규연은 스스로 정이 오래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아연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속에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끝장을 볼 때까지 놓지 않으리라는 것.강아연은 성규연의 속내를 몰랐다. 그저 이 남자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성규연과 자신 사이의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마음먹고 보복하면 감당할 수 없었고, 피할 방법도 없었다.억울함뿐 아니라 끝없는 서글픔까지 밀려왔다.강아연은 감정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침대 위를 짚은 손가락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했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자신은 쓰러질 수 없었다.한참 뒤 강아연은 고개를 들어 성규연을 바라보며,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쉰 뒤 천천히 말했다.“알겠어요. 받아들일게요.”대답을 들은 성규연은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 듯, 몸을 숙여 그녀 가까이 다가왔다. 따뜻한 숨결에 서늘한 시더우드 향이 섞여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얼굴에 닿았다.“그 반항적인 화장은 너랑 안 어울려. 다른 거로 바꿔. 우리 와이프.”강아연은 잠시 멈칫하다 그가 기자들 앞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전에 제 사진부터 지워요.”“무슨 사진?”성규연이 물었다.“그게...”강아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 민망했다.“그런 사진...”얼굴이 은근히 달아올랐다. 성규연처럼 이런 사적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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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강아연은 속으로 허탈하게 웃으며 몸을 웅크리고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지금 그녀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은 이 아이뿐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성규연이 들어왔다. 손에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안 자는 거면 일어나서 좀 먹어.”그가 담담하게 말했다.강아연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실제로 금세 배가 고파진 상태였다. 결국 힘겹게 몸을 받쳐 일어났다.그와 동시에 성규연은 도시락을 열어 정갈하고 영양가 있어 보이는 반찬들을 하나씩 꺼냈다.강아연은 잠시 넋을 잃었다. 기억 속에서 성규연이 자신에게 밥을 챙겨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렇게 평소와 다른 행동이 오히려 낯설었다.강아연은 밥그릇을 들고 반찬을 집어 천천히 씹었다. 그러면서 가끔 눈치를 보듯 성규연을 흘끗거렸다.“자기 남편 얼굴도 대놓고 못 보고 몰래 훔쳐봐야 해?”성규연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바로 말했다.강아연은 갑작스러운 자기애 넘치는 말에 사레가 들렸다.“콜록, 콜록콜록...”“강아연, 뭐 하는 거야?”성규연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다가도 목이 막혀?”그러면서도 일어나 그녀의 등을 두드려 숨을 돌리게 해줬다.하지만 손바닥이 등에 닿는 순간 강아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허공에 멈춘 성규연의 손이 잠시 굳더니, 이내 손가락이 천천히 움켜쥐어졌다.‘나를 그렇게까지 피하고 싶은 건가?’성규연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강아연이 겨우 숨을 고르자, 그는 어깨를 잡아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그러고는 반박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경성으로 돌아가.”자신과 닿기 싫어한다면 오히려 더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아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너무 갑작스러웠다. 아직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다.“강명우가 기다릴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난 상관없어.”성규연이 냉정하게 말했다.“알았어요.”강아연은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다시 얌전히 따르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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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결혼 6년 동안 두 사람은 일정하게 부부관계를 해왔지만 그런 방식까지 해본 적은 없었다.첫째로 강아연은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 때문에 그런 일에는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꼈고, 둘째로 성규연은 강아연에게 늘 인내심이 부족했다.성규연과 함께할 때는 대부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무도 길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나마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따내 기분이 좋을 때나 드물게 천천히 맞춰주는 편이었다.예전에 강아연이 생리 중일 때 다른 방법으로 도와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강아연은 방법을 몰랐고 성규연 역시 가르쳐줄 만큼 인내심이 없어서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그런데 지금 다시 그 일을 꺼낸 것이다.강아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성규연을 바라봤다.바로 전에는 자기가 그렇게까지 짐승은 아니라고 해놓고 이러다니,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왜, 하기 싫어?”성규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고양이를 놀리듯 턱을 잡고 느긋하게 물었다.강아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깨가 잔뜩 긴장했다.자신이 거절하면 성규연이 당장 마음을 바꿔 아버지의 치료를 막을까 두려웠다.거대한 갈등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가가 붉어지며 억울함과 수치심이 가득 번졌다.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던 순간, 성규연이 그녀를 놓고 짓궂게 웃었다.“농담이야.”강아연은 멍하니 성규연을 바라봤다.“내일 오후에 진 비서를 보낼 거야. 잔꾀 부릴 생각하지 마. 우리 와이프.”성규연은 그렇게 말하고 외투를 집어 들며 나가려 했다. 그러다 강아연의 얇은 옷차림을 힐끗 보고 팔을 뻗어 외투를 어깨에 걸쳐줬다.성규연에게서만 나는 향기가 순식간에 강아연을 감쌌다.강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성규연은 이미 몸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다.성규연이 성큼성큼 입원 병동을 나서자 진 비서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은빛과 검은빛이 섞인 마이바흐는 황혼 속에 웅크린 검은 표범처럼 우아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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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한 시간만 더 버텼다면 강아연은 무사히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 있었을 텐데.“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데리러 갈걸.”정도희의 목소리에 후회가 묻어났다.하지만 강아연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떠났다면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더라도 아무것도 몰랐을지 모른다.그랬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아연아?”대답이 없자 정도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응, 듣고 있어.”강아연이 대답했다.“너... 괜찮아?”정도희가 물었다.“걱정하지 마. 나 괜찮아.”강아연이 부드럽게 안심시켰다.“그런데 당분간 경성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동안 돌봐 줘서 고마웠어.”“성규연이 억지로 돌아오라고 한 거야?”정도희가 화를 냈다.“아니.”강아연은 숨을 내쉬고 적당히 둘러댔다.“이혼 절차에 문제가 좀 생겨서 같이 돌아가 해결하려는 것뿐이야.”아버지 얘기는 정도희에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요즘 가뜩이나 신경 쓸 일이 많은 친구에게 걱정을 더 얹고 싶지 않았다.“그렇구나.”정도희는 조금 의외였다.‘아연이와 성규연 사이의 갈등이 풀린 걸까? 이렇게 차분하게 이혼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만큼?’그래도 앞으로 강아연이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다만 걱정은 남아 있었다.“그런데... 성규연이 네가 임신한 거 알아?”“알게 됐어.”강아연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내가 잘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알았어.”정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녀와. 이모는 나한테 맡겨. 제일 좋은 간병인을 구해서 돌봐 드릴게.”“고마워. 도희야.”강아연이 진심으로 인사했다.“별것도 아닌데, 뭐.”정도희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등 뒤에서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그 친구랑 통화했어?”“응.”정도희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박경준이 다가와 단단한 배를 등에 밀착하더니 양팔로 허리를 감싸고 턱을 어깨에 얹었다.막 샤워를 마친 박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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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박경준은 순간 굳으며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정도희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했다.그러나 정도희의 눈에는, 자신의 비열한 속셈을 어떻게 알아챘느냐고 놀라는 것으로만 보였다.‘역시 그럴 생각이었구나. 나에게 아이를 낳게 한 뒤 박씨 집안으로 데려가 미래의 아내와 함께 키울 작정이었던 거야!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어!’박씨 집안과 협업하는 브랜드 행사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놀아났을 것이다. 그때 알게 된 게 천만다행이었다.다행히 정도희는 다른 여자들처럼 박경준이 자신을 잊지 못해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고 어리석게 믿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을까.정도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다만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결혼하실 분이 아이는 예비 아내랑 안 낳으시고.”정도희의 붉은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혹시 잠자리에서 자신 없다는 걸 예비 사모님한테 들킬까 봐 그래?”“정도희!”박경준이 호통치며 턱을 움켜쥐고 바짝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내가 자신 있는지 아닌지는 네가 잘 알잖아!”‘감히 이토록 겁도 없이 나를 도발하다니!’“그렇게 자신 있으면 예비 사모님이랑 낳아!”정도희는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침착하게 눌렀다. 박경준이 어디까지 참아 줄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정도희가 함부로 굴어도 박경준이 참아 준 건 어디까지나 쓸모가 있을 때뿐이었다.이제 그의 목적을 들춰내고 자기 뜻까지 확실하게 밝힌 이상, 정도희에게는 더는 이용할 가치가 없을 터였다.그래서 정도희는 공손하게 박경준을 바라보았다.“박 대표, 내가 주제넘게 무리한 걸 요구했던 건 용서해 줘. 이제 정신 차렸어. 연성 시내에 있는 집도 필요 없으니, 부디 이쯤에서 좋게 끝내주었으면 해.”필요 없다고 하자마자 미련 없이 손을 떼는 모습이,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상대를 버리는 나쁜 여자 같았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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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결국, 목석처럼 꿈쩍 않는 정도희의 태도에 박경준은 완전히 흥미를 잃고 서둘러 끝냈다.“정도희, 다음에 와서 나한테 매달리지나 마!”박경준은 이를 갈며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갔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정도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어깨끈 아래로 붉은 자국이 드러났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매니저에게 전화해 리아를 당분간 경성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그럼 언니는요? 도희 언니?”“나는 당분간 큰 작품은 못 맡을 것 같아서 연성에 남아 상황을 좀 보려고.”정도희는 손으로 입술을 훔쳐 박경준의 흔적을 지웠다.박경준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분명 방해가 들어올 것이다. 앞으로 한동안 일거리를 얻기 어려울지도 몰랐다.그래도 일보다 더 중요한 건 딸이었다.박경준과 계속 얽혀 있다가는 언젠가 리아의 존재까지 들키고 말 것이다.그의 약혼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도희는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수없이 찍었다. 그중에는 본처가 자리를 지키려고 다른 여자의 자식까지 해치는 이야기도 많았다.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한다지만, 실제 세상은 대중에게 보여 주는 이야기보다 훨씬 잔혹할 수도 있었다.딸만큼은 잃을 수 없었다.그러니 박경준과 더는 얽혀선 안 됐다.정도희의 눈빛은 단호했고, 그만큼 매정했다.애초에 정도희에게 남은 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절반은 강아연에게, 나머지 절반은 딸에게 주었으니까....강아연은 주정애에게 적당히 사정을 설명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몸 잘 챙기고.”주정애가 당부했다.강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회복 중인 주정애에게 충격을 줄 수 없어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성규연에게 협조하며 성씨 가문 사모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인맥과 자원을 빌려 최고의 의사를 찾고 아버지를 치료해, 주정애가 걱정하지 않게 해야 했다.그밖에도 경성에 돌아가기로 한 데는 강아연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요양원을 나오자 입구에 마이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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