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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쏠리자 심소연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런 일이 있었어요. 준서가 원래 저를 잘 따르잖아요. 마침 얼마 전에 제가 이사도 해서 같이 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부주의해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바람에 아이가 아팠어요.”“뭐라고?”서영란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강아연은 싫어해도 성준서는 끔찍이 아끼는 그녀였다. 손자가 아팠다는 말을 듣자 곧장 걱정이 밀려와 성규연을 노려봤다.“그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말도 안 했어?”성규연은 태연하게 답했다.“열이 좀 났을 뿐이에요. 의사가 처치해서 지금은 괜찮아요.”“뭐가 괜찮아!”서영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성규연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아버지라는 사람이 대체 왜 이래! 준서 지금 상태가 어때?”이 일로 분위기가 흐트러지자 성희택도 벌을 내리겠다는 건 잠시 잊고 서영란을 붙잡은 채 성규연을 다그쳤다.“쓸데없는 말 말고, 준서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야?”성규연이 무표정하게 답했다.“열은 내렸어요. 다만 밥을 거의 못 먹어요.”사실 성규연도 그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이틀 내내 성준서는 강아연이 끓여준 죽만 먹고 싶다며 강아연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떼를 썼다. 회사에서는 누구도 못 말릴 만큼 단호한 성규연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까지 사업할 때 쓰는 방법을 들이댈 수는 없었다.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하루빨리 강아연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예전에는 강아연이 이 집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자 늘 규칙적이던 그의 생활마저 완전히 흐트러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강아연이 곁에 없는 생활에 점점 익숙하지 않아졌다.그 감각이 더 짙어지기 전에 심소연이 얼른 말했다.“저한테 방법이 있어요! 준서가 밥을 잘 먹게 할 수 있어요!”심소연은 성규연의 앞으로 다가와 자신 있게 말했다.“정말이야. 규연아. 나 믿어봐.”...밤 10시, 연성 중심가의 한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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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도희가 아이를 낳는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박경준은 그녀가 두 사람의 아이를 안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다 순간 넋을 잃었다.정도희는 계속되는 시선이 불편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고, 박경준이 뭔가 눈치챌까 봐 긴장됐다.박경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박경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무심하게 답했다.정도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더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들키지 않을지 자신이 없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박경준의 넓은 손바닥이 그녀의 아랫배 위로 내려앉더니 얇은 옷감 너머로 천천히 쓰다듬었다.“정도희, 넌 대체 언제쯤 임신할까?”머리 위에서 박경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정도희는 순간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의 말투에서 조급함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이해하기 어려웠다.‘박경준은 왜 그렇게까지 아이를 원할까?’정도희는 의문을 품고 박경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묻고 말았다.“왜 그렇게 아이를 갖고 싶어 해?”말이 떨어지자 정도희는 박경준이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방 안에는 여전히 난방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공기는 점점 차가워지는 듯했다. 창밖의 달빛이 바닥에 내려앉아 얇은 서리라도 낀 것처럼 서늘했다.“거래일 뿐이야. 네가 그렇게까지 알 필요는 없어.”박경준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손을 거뒀다. 선을 넘은 그녀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였다.그 순간 정도희의 눈에 희미하게 반짝이던 빛이 서서히 꺼졌다. 입가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그래, 거래일 뿐인데 굳이 뭘 더 물어봐?’게다가 그녀는 진작부터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알았어.”정도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박경준은 얌전히 순응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드물게 다정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시간도 늦었는데, 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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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성준서는 목이 쉴 정도로 울어댔다. 훌쩍거리며 우는 작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었다.“도련님...”장미진과 집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집사는 죽이 담긴 작은 그릇을 들고 부드럽게 달랬다.“조금이라도 먹어요. 배를 비우면 더 힘들어요...”하지만 숟가락이 입가에 닿기도 전에 성준서가 그대로 쳐냈다.“싫어요! 엄마가 끓인 죽 먹을 거예요!”집사와 장미진은 서로를 마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강아연이 떠난 뒤 성준서는 그녀가 남겨둔 간식만 먹으며 버텼다. 그런데 그마저 다 떨어지자 매일 엄마를 찾으며 울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어린 얼굴이 눈에 띄게 홀쭉해져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하지만 두 사람에게도 방법이 없었다. 예전에는 성준서가 아플 때마다 강아연이 직접 하나하나 챙겼다. 지금은 그녀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두 사람이 쩔쩔매고 있을 때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준서가 왜 밥을 안 먹을까?”“사모님?”장미진의 눈이 밝아졌다가, 다가오는 사람이 심소연이라는 걸 확인하자 기대가 조금 식었다. 게다가 성규연까지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모습을 보니 강아연이 더욱 안쓰러웠다.‘괜히 사모님이 떠나려 한 게 아니었어.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애매한 사이로 지내는 걸 받아들일 여자가 어디 있겠어?’장미진과 달리 집사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심소연이 다른 죽 한 그릇을 들고 다가오자 눈치 빠르게 한 걸음 물러서 자리를 내줬다.심소연의 목소리를 들은 성준서는 울음을 조금씩 그쳤지만 여전히 서러워 보였다. 아이는 울먹이며 성규연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요? 엄마는 왜 안 왔어요? 엄마가 저를 버린 거예요?”성규연의 표정이 잠깐 변하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지금 바빠서 그래. 네가 다 나으면 데리러 갈게.”“정말요?”성준서가 눈을 깜빡이며 조금 안심했다. 아빠는 늘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심소연은 성준서의 눈물을 정성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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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들어와.”성규연은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창을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 그의 훤칠한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심소연은 다가가며 자기 그림자가 성규연의 그림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흘끗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준서가 배불리 먹고 나니까 상태가 훨씬 좋아졌어.”“그래.”성규연은 짧게 대답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말했다.“고마워.”“규연아,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까지 고마워해.”심소연이 부드럽게 말했다.“나 사실 준서 정말 좋아해. 같이 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너무 기뻤어. 그런데 내가 아이를 직접 키워본 적이 없으니까 좋아하는 건 뭐든 사주고 원하는 건 다 들어주면 되는 줄 알았어. 그게 이런 결과를 만들 줄은 몰랐어.”“미안해. 규연아, 다 내 부주의 때문이야. 꼭 어떻게든 만회할게.”심소연은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한 태도라 그저 뜻하지 않은 실수처럼 보였고, 꼬투리를 잡기 어려울 만큼 태도도 성실했다.성규연은 잠시 그녀를 살폈다. 조금 전 성준서가 심소연 덕분에 밥을 잘 먹던 모습을 떠올리자 미간의 냉기가 옅어졌다. 목소리도 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다음 전시에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말해.”심소연의 눈에 기쁜 빛이 번쩍였다.“응!”“늦었으니 진 비서가 데려다줄 거야.”진 비서는 성규연의 최측근이었다. 그런 진 비서에게 자신을 바래다주라고 한 걸 보면 성규연의 경계심이 꽤 누그러진 게 분명했다.심소연은 속으로 안도하며 달빛에 드러난 성규연의 반듯한 옆모습을 바라봤다. 이 기회에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다.하지만 갑자기 성규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으며 미간을 찌푸렸다.“프로젝트 건이라고? 알았어. 지금 가지.”말을 마치고 외투를 집어 든 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심소연은 그 자리에 남아 멀어지는 성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흐름이 끊긴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조급해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해야 성규연과의 틈을 다시 메울 수 있었다.심소연은 자신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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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성규연이 회사 일을 마쳤을 때는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하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강아연이 떠났다는 걸 안 날부터 단 한 번도 푹 잔 적이 없었다.성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강아연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시선을 그녀의 아랫배에 두고 눈을 가늘게 떴다.‘임신한 사실마저 나에게 숨기고, 일부러 피해 다니다니...’성규연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앉다.“대표님, 커피 드세요.”진 비서가 커피를 가져다주다가 대표님이 강아연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진 비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성규연은 요즘 쉬지 않고 일하는 데다 경성과 연성을 계속 오갔다. 지금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제대로 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대표님이 사모님에게 품은 집착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깊어진 것 같았다.“대표님, 밤새워 일하셨으니 잠깐이라도 쉬시는 게 좋겠어요.”진 비서가 권했다.성규연은 대답하지 않고 욱신거리는 눈가를 문질렀다.“조사는 어떻게 됐어? 박경준 쪽에서 새 소식은 있고?”“그게...”진 비서는 망설이다 솔직히 답했다.“박 대표님 쪽에서는 공교롭게도 근처 CCTV에 문제가 생겨 지금 복구 중이고, 최대한 빨리 만족할 만한 결과를 드리겠다고 합니다...”“하...”성규연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핑계야.”어쩐지 그렇게 오래 찾아도 강아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지워버린 것처럼 말이다.역시 박경준의 짓이었다.성규연은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을 줬다.박경준이 겉으로만 협조하는 척할 수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강아연까지 도울 줄은 몰랐다.‘설마 강아연의 그 친구 때문인가?’성규연은 전에 경성 병원에서 박경준이 정도희를 감싸던 모습을 떠올렸다.“박 대표가 연예계 여자한테 마음이 갈 줄은 몰랐군.”성규연은 비웃듯 낮게 웃었다.진 비서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얼마 전 큰사모님과 박씨 가문 사모님이 같이 식사하셨는데, 박씨 가문 사모님께서 박 대표님의 약혼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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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태도가 너무 빨리 바뀌자 진 비서는 의아했다.“그러면... 사모님 행방을 계속 찾을까요?”“그만둬.”성규연은 초대장을 들고 모서리에 적힌 강아연의 이름 위를 손끝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마치 그녀의 고운 얼굴을 쓰다듬는 듯했다.성규연의 눈빛이 깊어졌다.“오래 숨지는 못할 테니까.”...한 달 뒤, 여름 끝자락인데도 비는 자주 내렸다.하지만 밖에 비가 아무리 거세도 행사장 안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모두 숨을 죽인 채 최종 우승자가 누가 될지 기다렸다.“이번 국제 플라워 아트 대회의 금상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지금 바로 발표하겠습니다!”“수상자는 바로... 강아연입니다!”큰 박수 속에서 강아연은 꽃장식이 수 놓인 원숄더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시상대에 올라, 관객들을 향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플로리스트 강아연입니다. 다시 이 무대에 서서 이 상을 받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무대 위 강아연이 수상 소감을 말하는 동안 아래에 있던 동종 업계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쏟아냈다.“저 사람이 국제 플라워 아트 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유일한 국내 플로리스트라는 그분이야? 정말 젊어 보이는데!”“젊어 보인다고 얕보면 안 돼. 벌써 두 번째 금상이래!”“세상에, 너무 대단한데? 데뷔하자마자 정상에 오르고, 5년 사라졌다 돌아와서 또 정상이라니!”사람들이 강아연을 바라보는 눈에는 감탄이 가득했다....“앞으로도 꽃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고 계속 걸어가겠습니다.”강아연의 말이 끝나자 행사장 전체에 힘찬 박수가 울려 퍼졌다.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강여연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이 순간을 느끼며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충만했다.특히 다시 금상 트로피를 손에 들자 익숙하게 묵직한 감촉에 눈물이 날 만큼 벅찼다.“역시 예전에 경성에서 가장 뛰어났던 플로리스트답네. 그렇게 오래 활동을 쉬었는데 내놓은 작품이 이렇게 놀랍다니. 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까지 다시 단번에 거머쥐고!”강아연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임지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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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그 질문이 나오자 주변 사람들도 강아연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러고 보니 얼마 전 미래 그룹 대표가 자기 아내 이름이 강아연이라고 발표했잖아. 이 플로리스트랑 이름이 완전히 똑같네. 이렇게까지 우연일 수가 있나?”“그런데 이분 얼굴이 성 대표가 공개한 사모님 사진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강아연은 속으로 웃었다. 당연히 조금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성규연이 공개한 사진 속 자신은 완전히 민낯이었으니까.반면 이번 대회에는 일부러 진한 풀메이크업을 했다. 평소의 차분한 이미지와 정반대인 화려한 복고풍 메이크업이었다. 눈꼬리를 추어올린 투톤 아이라인에 선명한 붉은 립까지 더해져, 당당하게 피어난 붉은 장미 같은 분위기가 났다. 가까운 친구 정도희조차 한 번 더 자세히 봐야 알아볼 만큼 인상이 달랐다.하물며 자신을 사진으로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기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강아연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못 봤어요. 계속 대회 준비만 하느라 그런 연예 뉴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그럼 경성의 성 대표님을 아시나요?”기자가 다시 물었다.강아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모릅니다.”너무도 거리감 있고 냉담한 태도여서 그녀와 성규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 짐작한 거로 생각하기 시작했다.“제 작품에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강아연은 차분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엄마!”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강아연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 그녀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성준서의 조그만 몸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더니 폴짝거리며 강아연에게 손을 흔들었다.‘엄마’라는 다정한 호칭을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들었다.예전에는 성준서가 이렇게 친근하게 부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따뜻하고 달콤한 감정이 번지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지독하게 비꼬는 말처럼 들렸다. 병원에서 성준서가 했던 말들이 아직도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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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기자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일제히 성규연의 주변에 몰려들었다.“그냥 플라워 아트 대회일 뿐인데 성 대표 같은 사람이 왜 온 거지?”“저 아이도 성씨잖아. 설마 성 대표 아들인가?”“아까 성 대표 아들이 강아연 씨를 엄마라고 불렀잖아. 그럼 성 대표 부인은 설마...”사람들의 추측 어린 시선 속에서 성규연은 강아연을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열었다.“오랜만이군. 와이프.”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는 얼핏 인사처럼 들렸지만, 성규연의 눈은 강아연에게 못 박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이었다.그 압도적인 기세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차츰 입을 다물고 긴장한 채 성규연을 바라봤다.강아연도 심장이 순간 멎는 듯했다.사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두었다. 국제 플라워 아트 대회에 참가하는 이상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얼굴을 드러내면 언젠가는 들킬 것이 뻔했기에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가 잠시 해외로 피할 생각으로 미리 비행기 표까지 사두었다. 그런데 성규연이 이렇게 빨리 들이닥쳐 모든 계획을 망가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아연은 성규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곧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거리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아이야 사람을 잘못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성 대표님이 아내를 잘못 알아보시면 곤란하지 않겠어요?”강아연은 숨을 억누른 채 성규연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한 글자씩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성 대표님의 아내가 아니에요.”성규연에게서 벗어나기로 한 이상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내 아내 이름이 강아연인데, 네가 아니라고?”성규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강아연을 훑었다.“세상에 동명이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름이 같다고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죠.”강아연은 차분히 받아쳤다. 오늘 한 메이크업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게다가 성규연은 예전부터 그녀를 그렇게 싫어했다. 강아연은 성규연이 자신의 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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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누구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고 소문난 성 대표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여자를 번쩍 안다니.“놔요!”강아연은 성규연의 가슴을 세게 두드리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하지만 성규연에게는 솜방망이로 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힘이었다. 그는 진 비서에게 성준서를 데려가라고 지시한 뒤 강아연을 안은 채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뒤에는 충격에 빠진 기자와 구경꾼들만 남았다.“성규연 씨! 지금 안 놓으면 성추행으로 신고할 거예요!”행사장을 나오고도 벗어나지 못하자 강아연은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여기는 경성이 아니에요. 성규연 씨가 마음대로 다할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요!”성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추행?”성규연이 차 문을 열어 내려놓자 강아연은 바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두 손목을 붙잡아 가죽 시트 위로 누르더니 곧바로 차 문을 ‘쾅’ 닫았다.폐쇄된 공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성규연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시더우드 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었다.예전에는 이 향을 주로 침실 침대 위에서 맡았다. 성규연이 강아연을 기진맥진할 정도로 몰아붙인 뒤 잠깐 숨을 고르며 각진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곤 했다. 그때 반듯한 짧은 머리카락이 코끝을 스치며 시더우드 향을 남겼다.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자신이 수치스러워 강아연은 온 힘을 다해 다리를 들어 그를 차려 했다.하지만 성규연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무릎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만든 뒤 비웃듯 말했다.“예전에는 내 밑에서 그렇게 잘만 반응하더니 인제 와서 성추행이라고? 강아연, 너 정말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해.”말투에는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강아연은 가슴 한구석이 찌르듯 아팠지만 애써 눌러 삼키고 물었다.“성규연 씨,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그 말은 내가 해야겠는데?”성규연은 한 손을 빼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강아연, 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 이혼 합의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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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강아연은 아직도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 두려웠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말 엄마를 잃었을지도 몰랐다.그리고 그 모든 일은 성규연이 심소연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줬기 때문에 생겼다.강아연은 가슴이 꽉 막혔다.성규연이 왜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굳이 파고들 생각도 없었다.더는 서로 얼굴만 봐도 싫어지는 결혼생활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우리 이미 이혼 합의서도 썼잖아요. 이혼할 건데 반지를 왜 가지고 있어요?”“감히 이혼 얘기를 또 꺼내?”성규연은 화가 극에 달한 듯 오히려 웃더니 강아연의 턱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강아연, 네가 처음 어떻게 나랑 결혼했는지 잊었어? 인제 와서 마음에 안 든다고 이혼하고 싶다고? 네 마음대로는 안돼. 내가 서명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법적인 부부야.”성규연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울렸다.강아연은 멍하니 굳었다.‘성규연이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분명 그때 합의서를 건넸다. 당연히 성규연이 서명했고 이미 이혼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사실상 껍데기뿐인 혼인 관계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다니.강아연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온 힘을 다해 성규연을 밀어냈다.하지만 성규연은 꿈쩍도 하지 않는 산처럼 강아연을 눌렀다. 강아연의 거부와 혐오를 느낀 순간, 지난 한 달 동안 쌓였던 분노도 폭발했다. 성규연은 거칠게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강아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쇄골을 세게 깨물었다.“아!”강아연은 통증에 몸을 활처럼 휘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성규연은 고개를 들자마자 턱을 붙잡고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입안에 곧바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강아연은 눈을 크게 떴다. 동공 안에 성규연의 날 선 눈빛이 비쳤다.성규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허락도 없이 새장을 빠져나간 새를 보는 것 같았다. 다시 나타난 목적은 자신의 날개를 꺾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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