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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1화

연승재가 연유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황축복의 옆자리에 앉았다.“축복아, 속상하지?”황축복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연승재가 웃으며 연유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유준이 원래 저래. 어릴 적부터 다들 오냐오냐해서 제멋대로야. 할아버지랑 아빠 말고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대해.”황축복이 조용히 듣고만 있자 연승재가 이어 말했다.“유준이가 축복이보다 한 살 어리니까 축복이가 누나잖아. 철이 든 축복이가 철이 없는 유준이를 봐주면 안 될까? 이따가 내가 방에 들어가서 잘 얘기할게.”아이가 시선을 늘어뜨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승재는 끝까지 연유준에게 사과시키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듯 황축복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TV 리모컨을 찾아 황축복에게 건넸다.“이제 유준이 없으니까 축복이가 좋아하는 만화 봐.”사실 연승재는 알고 있었다. 황축복과 연유준이 함께 있을 때 계속 연유준이 좋아하는 만화만 봤고 리모컨도 늘 연유준의 손에 있었다는 것을.황축복이 아무 말 없이 리모컨을 받아든 뒤 연승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만화 보고 있어. 삼촌이 가서 유준이 좀 혼내고 올게.”아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그는 곧장 연유준의 방으로 들어갔다.황축복은 그가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고는 몰래 눈물을 흘렸다.연승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연유준이 침대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가가 이불을 걷어내자 연유준이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연승재가 들고 있는 이불을 빼앗으려 했다.“이리 줘요. 여긴 왜 들어왔어요? 날 또 혼내려고요? 가서 축복이나 달래줘요. 난 신경 쓰지 말고.”연승재가 이불을 돌려줬다. 하지만 연유준이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 기회를 주지 않고 아이를 확 잡아당겼다.“됐어. 그만 좀 억지 부려. 널 혼내러 온 게 아니야. 아까 말하기 곤란해서 못한 말 하려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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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2화

연유준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축복이 언제 가요?”연승재가 답했다.“한동안은 우리랑 함께 지낼 거야. 유준이 착하지? 조금만 참자.”“축복이 아빠가 있잖아요. 아빠한테 가면 되지, 왜 우리랑 있어야 하는데요?”“방금 들었잖아. 축복이 아빠한테 일이 생겨서 돌봐주지 못한다고.”연유준이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강조했다.“쟤가 여기에 얼마 동안 있든 고모랑 삼촌은 무조건 날 더 예뻐해야 해요.”아이의 투정에 연승재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연유준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었다.다행히 서현주의 검사 결과가 좋아 입원 이틀 만에 퇴원했다.퇴원할 때 강혜인은 회사에 있었고 안요한이 옆을 지켰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짐이 많지 않아 대충 싸기만 하면 되었다.가기 전 서현주가 옆 병실의 연지훈에게 인사라도 하겠다고 했다. 어쨌거나 생명의 은인이니까.연지훈을 보러 가겠다는 소리에 안요한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짐 가방을 들고 약간 원망스러운 눈으로 서현주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이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서현주가 연지훈의 병실을 가리키며 물었다.“같이 갈래요?”안요한의 안색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건 아니었다. 그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응.”그러고는 짐 가방을 들고 서현주를 지나 연지훈의 병실 문을 두드렸다.누군가 안에서 병실 문을 열었는데 바로 서현주가 구해준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두 분 연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안요한이 점잖게 고개를 끄덕인 그때 서현주가 물었다.“네. 안에 계세요?”간병인이 문을 열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네, 계세요. 연 대표님 지금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계시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서현주가 병실 안쪽의 닫힌 화장실 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병인이 서현주가 평상복 차림인 걸 보고 물었다.“대표님 퇴원하시나 봐요?”“네. 그래서 인사하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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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3화

연지훈이 덤덤하게 받아들였다.“알았어. 그나저나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어.”서현주가 물었다.“그게 뭐죠?”“전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지? 그 약속 아직 유효해?”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서현주가 연지훈에게 경계 어린 시선을 보냈다.“유효해요...”서현주가 안요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안요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덧붙였다.“하지만 전에 말했던 그런 건 안 돼요. 너무 선을 넘는 거니까요.”뜻밖에도 연지훈도 이번에는 순순히 받아들였다.“알아. 널 곤란하게 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유효한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중에 생각나면 그때 말할게.”연지훈이 이렇게 말했음에도 서현주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알았어요.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보세요.”“난 짐을 챙겨야 해서 이따가 갈 거야. 먼저 가.”“이만 가볼게요, 그럼.”병실을 나서자마자 안요한이 서현주의 손을 꽉 쥐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연지훈이 무슨 요구를 하든 무조건 나한테 말해. 절대 숨기지 말고.”서현주가 안요한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알았으니까 화내지 말아요.”안요한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서현주의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가슴속의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듯했다.그러다가 문득 다른 일이 생각났다.“퇴원하면 하루 시간 내서 나랑 같이 절에 가기로 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서현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당연하죠. 요한 씨가 하루에 세 번씩이나 확인하는데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내일 갈까요? 오늘은 집에서 좀 쉬고 싶어요.”내일이 마침 주말이었다. 안요한이 서현주를 차에 태우며 대답했다.“그래. 내일 가자. 널 집에 데려다주고 난 회사에 다시 가봐야 해. 내일 오전 10시에 데리러 올게.”“네.”안요한이 다정하게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푹 쉬어. 황태민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거의 다 마무리됐어. 증거도 충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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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4화

안요한이 한마디 덧붙였다.“괜찮지?”서현주가 멈칫했다가 안요한을 돌아봤다.그녀도 안요한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안정수가 서현주를 마뜩잖게 여기고 있었고 점찍어 둔 손주 며느릿감이 따로 있어 여전히 그쪽과 이어주려 고집을 피우는 중이었다.안요한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핸들을 꽉 잡고 정면만 쳐다볼 뿐 서현주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서현주가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까 걱정하는 동시에 안정수가 또 무슨 움직임을 보일지 걱정했다.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요한 씨 뜻에 따를게요. 난 다 괜찮아요.”안요한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 그럼 내가 시간 잡을게.”서현주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너무 서두를 거 없어요. 할아버님 아직 날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잖아요. 기분이 나아지신 다음에 다시 얘기해도 돼요.”안요한이 다시 긴장하려 하자 서현주가 얼른 말을 이었다.“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할아버님이 요한 씨를 곤란하게 할까 봐 그래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뵈면 오히려 반감만 사서 우리를 더 심하게 반대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천천히 해요. 나중에 때가 된 후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봐요.”안요한의 마음이 이 짧은 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갔다. 정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그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손을 내밀었다. 서현주가 그 위에 손을 얹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난 괜찮아. 네가 서운할까 봐 그러지. 우리 집 일은 신경 쓰지 마.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몫이야. 알아서 잘 처리할게. 네가 마음 편히 할아버지를 뵐 수 있도록 말이야.”서현주가 입술을 깨물며 미소 지었다.“알았어요.”연채린이 돌아와서야 황축복과 연유준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는 걸 전해 들었다. 돌아왔을 때 연유준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황축복만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다.연승재가 두 아이가 다퉜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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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5화

황축복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기다릴 수 있어요.”연채린이 아이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승재가 뒤에서 그녀에게 물었다.“태민이 형 쪽 상황은 좀 어때?”“경찰서에서도 오빠 사정이 워낙 특수하니까 축복이랑 영상 통화 할 기회를 상부에 신청해 보겠대요. 그런데 절차를 밟아야 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신청한다고 해도 매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큰 문제는 조만간 오빠가 교도소로 이송된다는 거예요. 그때부턴 영상 통화를 아예 할 수가 없어요. 축복이가 교도소로 직접 면회를 가야 하는데 오빠 성격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어요.”연승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이영 언니 재판 날짜가 잡혔어요. 한 달 뒤에 2심이에요.”연채린이 외투를 벗으며 투덜거렸다.“할아버지가 대체 뭘 하고 계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 한 번도 오지 않으시고 도와주고 있기는 한 건지...”연승재 역시 아는 게 없었다.요즘 연동욱이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막막하기만 했다. 연승재가 말했다.“일단 나가서 밥부터 먹자. 저녁밥이 왔어.”연채린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절 주소 좀 찾아볼게요. 내일은 운전해서 가요.”그녀가 식탁 앞에 앉아 내일의 계획을 설명했다.“내일 아침 9시에 일어나서 9시 30분에 아침 먹고 10시에 출발할 거야. 거리상 12시면 도착하니까 점심은 절에서 먹고 오후에 절 구경하고 기도도 좀 드리자. 그리고 저녁까지 거기서 먹고 돌아올 생각이야.”신이 난 연유준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좋아요.”황축복이 조용히 저녁을 먹으면서 가끔 연채린을 쳐다봤다. 얘기를 다 들은 뒤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연승재가 고개를 돌리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무슨 절인데 이렇게나 멀어?”연채린이 휴대폰을 보여줬다.“백령사라는 곳인데 100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차로 두 시간은 가야 해요.”조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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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6화

“내가 정리할게요.”서현주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자 안요한이 의자에 놓여 있던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서현주의 목 뒤로 손을 뻗어 목도리를 정성스럽게 감아주었다.“바깥바람이 차니까 따뜻하게 입어.”그녀가 안요한이 감아준 목도리를 매만지며 말했다.“알았어요.”안요한이 서현주의 손등을 만져보더니 수납함에서 하얀 장갑을 꺼낸 다음 그녀의 손을 잡고 직접 끼워주었다.놀란 서현주가 멍한 눈빛으로 안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안요한은 장갑을 다 끼워준 뒤 서현주의 옷차림을 꼼꼼히 살피고서야 만족했다.“됐어, 이제. 내리자.”서현주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차 문을 열고 내렸다.백령사가 영험하기로 전국에 소문이 자자해 늘 사람들이 붐볐다. 평일에도 관광객이 많은데 주말인 오늘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서현주와 안요한도 입구에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서현주가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앞쪽의 줄을 보니 들어가려면 아직 몇 분 더 걸릴 듯싶었다.그때 안요한이 코트 주머니에 넣고 있던 서현주의 손을 뺐다. 서현주가 눈을 깜빡이며 왜 그러냐고 묻자 안요한이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노점상들이 상을 펼쳐놓고 부적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백령사에도 있었지만 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노점도 사람들로 붐볐다.안요한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금방 사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서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다녀와요.”안요한이 인파를 헤치고 노점상 쪽으로 향했다. 한 노점상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서현주가 그 모습을 더 지켜보려 했지만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그냥 시선을 거두었다.기다림이 길어지자 서현주는 지루함을 달래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묵, 군고구마, 호빵 등 간식거리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연채린?’서현주의 시선이 한 쌍의 남녀를 스쳤다. 멈칫했다가 다시 자세히 봤는데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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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7화

서현주가 손을 내밀어 안요한의 팔짱을 살며시 꼈다.“그래요.”두 사람이 인파에 휩쓸려 걷다가 마침내 절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로 들어서자 공간이 훨씬 넓어져 아까처럼 사람에게 치일 일이 없었다.서현주가 안요한을 잡고 안내도 쪽으로 걸어가더니 단번에 칠성신을 모시는 칠성각을 찾아내고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먼저 칠성신께 빌러 가요.”안요한이 서현주가 이끄는 대로 고분고분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길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다.이곳 백령사에서 가장 향불이 끊이지 않는 곳이 단연 칠성각이었다.입구에 도착한 서현주와 안요한은 밀려드는 인파에 하마터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 할 뻔했다. 곳곳에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심지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민등록증 위에 복권을 올려둔 채 기도를 올리는 젊은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십여 분 기다린 끝에야 겨우 칠성신 앞에 설 수 있었다. 서현주가 서둘러 두 손을 모으고 합장했다.칠성신에게 비는 일인 만큼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옆에 서 있던 안요한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웃음을 터뜨리자 서현주가 안요한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웃지만 말고 요한 씨도 얼른 빌어요. 그러다 신께서 노하시면 어쩌려고요.”안요한이 천천히 말했다.“알았어. 지금 빌게.”그녀는 그가 정중하게 합장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시주함에 돈을 넣고 스님이 건네주는 향을 받아 들었다.서현주는 앞사람이 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는 세 번 절을 올리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부디 사업도 번창하게 해주시고 돈벼락 맞게 해주세요.’기도를 마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향로에 향을 꽂았다.칠성각을 나온 뒤 서현주는 안요한과 함께 문 앞에 있는 기념품 가게로 향했다.주로 칠성신 모양의 옥 펜던트를 팔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게 무려 60만 원이나 호가했다. 그 외의 플라스틱 제품들은 어쩐지 효험이 없을 것 같아 서현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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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8화

이번에는 동전이 항아리 가장자리에 스치지도 못했다.서현주는 다시 동전 하나를 집어 들고 항아리 입구에 정조준해 떨어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또 넣지 못했다. 동전을 연속 열 개나 던졌지만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서현주가 마지막 남은 동전을 꼭 쥐고 입을 가린 채 낄낄거리는 안요한을 올려다봤다.“이제 진짜 진지하게 할 거예요.”안요한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진지하게 해봐. 그런데 사실 아까도 꽤 진지해 보였어.”조금 전 서현주의 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작은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비장했고 점점 많은 동전이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을수록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엄숙해져 갔다.서현주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정색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웃지 말아요.”그 말에 안요한이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고 헛기침했다.“알았어. 웃지 않을게.”그러고는 들고 있던 동전들을 그녀에게 건넸다.“부족하면 내 거 던져.”서현주가 턱을 당당히 치켜세웠다.“됐어요. 이거면 충분해요. 그건 요한 씨나 써요. 이거 생각보다 어렵거든요.”안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 후회하지 마.”서현주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안 해요, 후회.” 이번에는 훨씬 더 신중해졌다.우선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동전을 항아리 안에 골인한 사람들의 손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던 서현주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잠시 후 서현주가 마지막 남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젠 안요한도 옆에서 대놓고 웃었다.서현주가 속으로 생각했다.‘대체 왜 안 들어가지? 재물신이 내가 부자 되는 걸 싫어하시나? 벌써 스무 번 넘게 던졌는데 한 번도 안 들어갔어.’이젠 부정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재물신이 그녀를 보살펴주지 않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무래도 이따가 다시 가서 더 정성껏 기도를 올려야 할 듯싶다.그때 서현주의 뒤에서 한 관광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속삭였다.“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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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9화

안요한이 동전 하나를 집어 손을 항아리 입구 위로 가져갔다. 아주 무심하게 손을 툭 놓자 동전이 수면 위로 떨어지며 작은 물보라를 일으켰다.동전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매끄럽게 항아리 안에 떨어졌다.서현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안요한이 다시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억울해진 서현주가 불평을 늘어놓았다.“이거 다 내 돈 주고 바꾼 동전들인데 어쩜 이럴 수가 있어요?”그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이제 항복?”“잘나셨네요, 아주. 계속 던져봐요. 아직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그녀가 뾰로통하게 대꾸하자 안요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됐어. 화 풀어. 남은 동전 다 줄 테니까 네가 던져.”서현주의 눈이 다 반짝 빛났다.“정말요?”안요한이 망설임 없이 남은 동전들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당연하지. 자, 받아.”그제야 서현주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피었다. 득의양양한 표정이 도도한 여우 같았다.“그럼 사양 안 할게요.”“그래.”그녀를 바라보는 안요한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했다.그래도 이번에는 훨씬 운이 좋았다. 스무 개 남짓한 동전 중 열다섯 개나 골인시켰으니 꽤 괜찮은 성적이었다.조금 전의 서운함을 털어버린 듯 서현주가 만족스럽게 손을 툭툭 털었다.“됐어요. 이제 다음 장소로 가요.”안요한이 서현주의 손을 꼭 잡고 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서현주는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백령사는 아주 큰 사찰이었다. 칠성각에서 나온 뒤 잠시 길을 헤매던 서현주가 안내 표지판을 보면서 안요한에게 물었다.“다음은 어디로 갈까요?”안요한의 눈에 오직 한 곳만 들어왔다.“인연전.”서현주의 시선이 안요한에게로 향했다. 안요한이 고개를 숙이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설렘과 함께 기쁨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묘한 눈빛으로 안요한을 쳐다봤다.그녀가 가볍게 헛기침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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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0화

인연전의 줄이 칠성각보다 훨씬 빠르게 줄어들었다. 인파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안요한이 서현주의 손을 아주 꽉 잡았다.사실 서현주는 인연전의 소문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었다. 줄을 서 있는 내내 주변에 늘어선 작은 노점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하지만 노점마다 커플들이 가득 에워싸고 있어 무엇을 파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넋을 놓고 구경하던 차에 안요한이 서현주의 손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안요한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집중해. 곧 우리 차례야.”서현주가 낮게 대답했다.“알았어요.”이번에 안요한은 그녀가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리는지 아주 엄격하게 감시했다. 털끝만큼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서현주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웃음을 짓자마자 안요한이 금세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경고 섞인 눈빛을 보냈다.“웃지 말고 진지하게.”서현주는 즉시 웃음기를 지우고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앞사람이 하던 대로 절을 올린 뒤 몸을 일으켜 안요한을 바라보았다.안요한이 향을 든 채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밖에서 스며든 은은한 빛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따뜻함 덕분인지 날카롭던 그의 얼굴선이 한결 유연해 보였다.쏟아지는 빛줄기 속에 서 있는 안요한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미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탄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서현주가 입술을 깨물고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안요한을 따라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눈을 떴을 때 안요한이 어느새 웃는 얼굴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웬일로 이렇게 진지해?”서현주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구체적인 상황은 얘기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안요한이 좋아할 만한 대답을 건넸다.“그러게요.”안요한의 눈가에 깊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서현주와 함께 향로에 향을 정성스레 꽂았다.그 후로도 안요한은 무척이나 정성을 쏟았다. 인연전 주변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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