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661 - 챕터 670

823 챕터

제661화

맹시은과 하연이 돌아왔을 때 장두는 아직 장자에 없었다.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어제 열어두었던 상자에서 장부 하나를 꺼내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곁에서 차를 올리던 시녀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아가씨, 붓과 먹을 준비해 드릴까요?”“필요 없다.”장두가 돌아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뒤를 따르던 소년이 말 두 필을 끌고 들어왔는데 온몸이 대추빛으로 물들어 있고 털은 윤기가 흐르는 것이 얼핏 보아도 준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가씨, 어제 물으셨던 한혈마입니다. 어젯밤엔 어두워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이 두 마리 어린 말이 막 마장에서 돌아왔습니다.”하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단숨에 달려가 말 주위를 두 바퀴나 돌았다. 말등을 쓰다듬고 입을 벌려 이빨까지 살폈다.장두는 입꼬리를 올렸다.“아직 어리긴 하지만 하 아가씨께서 타고 놀기엔 충분합니다.”그러나 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장두, 나를 바보로 보는 거야?”장두의 웃음이 얼어붙었다.“하... 하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하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의 목을 두드렸다.“말은 좋지. 상급 대완마야. 헌데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는 아니지.”그녀는 말의 발굽을 가리켰다.“편자가 새것이야. 닳은 흔적이 거의 없어. 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리고 입 안에는 콩사료 냄새가 남아 있어. 다른 마굿간에서 길러진 게 분명해. 방금 장자의 마구간도 보고 왔는데 거기엔 상등 초료가 쌓여 있던데.”하연이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장두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는 떠들썩해 보이기만 하던 하 아가씨가 말에 이렇게 밝은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때, 맹시은이 천천히 걸어왔다.그녀의 시선이 말과 장두의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얼음덩이처럼 장두의 가슴에 떨어졌다.“장두, 공작부의 한혈마는 어디로 갔느냐?”장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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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2화

“너희가 원래 가져야 할 것을 되찾을 기회를 말이다.”맹시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누구든 장두가 소작인을 억누르고 세곡을 빼돌린 사실을 밝혀내면 내가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삼 년간 지대를 면제하고 세곡 또한 거두지 않겠다.”순간, 타작마장 위가 터져 나간 듯 술렁였다.지대 면제 삼 년? 세곡까지 면제?그 말은 곧, 땅을 공짜로 부치고 수확한 곡식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하늘에서 떡이 떨어진 셈이었다.장두의 얼굴은 삽시간에 잿빛으로 질렸다. 그는 이제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큰 상에는 반드시 용감한 자가 따르는 법. 그가 수년간 탐욕을 부리며 밟아온 터라 속으로 원한을 품은 이들은 이미 적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는 감히 나서지 못했을 뿐.그런데 맹시은이 직접 그들에게 칼을 쥐여준 셈이었다.하연은 아래에서 꿈틀대는 인파를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속삭였다.“시아, 이 수는 정말 독해. 우리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저 늙은이를 산 채로 찢어놓을 수 있겠어.”맹시은은 옅게 웃었다.“마음을 치는 것이 으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칼보다 날카롭지요.”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중은 화약고처럼 터져버렸다.“아가씨 말씀이 진짜입니까?”“고발만 하면 정말로 면제해주시는 겁니까?”“이건… 어느 보살님이 내려오신 게 아닙니까?”속삭임은 곧 웅성거림으로 번졌고 수십 쌍의 눈이 장두와 그 옆의 관사들을 향해 번뜩였다.장두와 측근들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그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감히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이냐!”그러나 삼 년치 지대 앞에서 그의 위협은 허공을 가르는 바람에 불과했다.군중은 더 크게 요동쳤지만 아무도 첫 번째로 나설 용기는 없었다.그때,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퍽 소리를 내며 단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소인이 할 말이 있습니다!”장두의 눈꺼풀이 세차게 떨렸다.그는 장 자의 소작인, 장칠로였다.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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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3화

“사람을 불러라. 붓과 종이를 가져오고 새 계약을 쓰겠다.”하연이 맹시은의 귓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감탄이 배어 있었다.“시아, 이게 어디 장부 조사야? 이건… 사람 마음을 찌르는 거잖아.”맹시은은 옅게 웃었다.“이 정도로 벌써 찌른다고 하는 겁니까? 잠시 후 아설이 와서 장부를 정리할 텐데 아가씨께서도 같이 보실 겁니까?”하연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발길을 옮겼다.“방금 산 말, 아직 먹이도 못 줬으니 먼저 가볼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맹시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장자 어귀에서 수레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수수한 푸른 덮개 마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물빛 옷차림의 소녀가 가볍게 뛰어내렸다.아설이 재빨리 다가왔다.“언니, 다 준비됐습니다.”그 뒤로 네댓 명의 점원들이 따랐다. 모두 손에 주판과 장부를 들고 있었다.맹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곡창의 곡식부터 전부 점검해서 장부에 올려.”아설이 진국공부의 상점들을 맡은 뒤로 이 점원들은 그곳에서 직접 추려낸 인재들이었다.창고를 열고, 곡식을 살피고, 저울에 달고, 장부에 기록하는 일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어졌다.주판알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마당을 채웠다.맹시은은 높은 곳에 서서 조용히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장두 한 사람의 목이 아니었다. 진국공부 안쪽 깊이 썩어 들어간 뿌리를 한 치씩 도려내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정현에서 아설이 다뤄온 곡식에 비하면 이 장자의 물량은 많다고 할 수 없었다.아설이 차 한 잔을 따라 마시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언니, 가게 하나를 더 인수했습니다. 며칠 안에 문 열 수 있을 거예요. 보석 가게도 이제 자리를 잡았고, 이곳 일이 마무리되면 금주에 가보려고 합니다. 금주는 곡식이 많고 값도 더 싸거든요.”맹시은이 말했다.“금주가 그리 멀진 않지. 가면 곡창 하나 세울 수 있는지도 살펴보거라.”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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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4화

아설은 두 팔을 끼고 서서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 계약서는 무효입니다. 곡식은 팔지 않겠습니다.”유 장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뭐라고!”“곡식, 안 팝니다.”아설은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안 팔 뿐 아니라 우리 쪽에서 직접 양곡상을 열 겁니다. 그쪽 같은 검은 속 장사는 다른 데 가서 하시죠.”유 장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가락으로 아설을 가리키는데 그 끝이 떨리고 있었다.“내쫓아라!”아설은 더는 상대하지 않고 냉정하게 손님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며 돌아섰다. 얼굴엔 통쾌한 기색이 가득했다.“언니, 처리했습니다.”맹시은은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수고했어.”아설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입가를 닦았다.“수고랄 것도 없지요. 저런 사람을 상대하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맑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그래? 뭐가 그렇게 통쾌했지?”아설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고 맹시은은 담담히 시선을 옮겼다. 언제 온 건지, 문가에 서 있는 주종현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경장 차림에 소나무처럼 곧게 선 자태였다.아설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세자를 뵙습니다.”주종현은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나 시선은 줄곧 맹시은에게 머물러 있었다.“오자마자 아설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던데. 이 진국공부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느냐?”맹시은이 그를 흘긋 보았다.“세자께서는 일부러 제 소란을 구경하러 오신 겁니까?”주종현이 낮게 웃었다.“소란이라도 네가 벌인다면 그냥 두지.”그는 품에서 얇은 종이 몇 장을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선명한 주홍 인장이 유난히 도드라졌다.장자의 계약서였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었다.맹시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이건…?”주종현의 말투는 담담했다.마치 하루에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장자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종이를 건네는 듯했다.“네가 곡식 장사를 한다기에 가져온 것이다. 내 명의로 된 장자 몇 곳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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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5화

맹가양행은 길일을 골라 문을 열었다. 요란한 폭죽도 없었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손님도 없었다. 모든 것은 담백하게 치러졌다.그러나 가게는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주작대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주온청은 수수한 평상복 차림으로 축하 예물을 들고 직접 찾아왔다. 그녀는 맹시은의 손을 잡은 채, 창문은 밝고 쌀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게 안을 둘러보며 깊은 감회를 숨기지 못했다.한때 말수 적고 그림자처럼 지내던 강 마님이 이제는 이토록 당당한 모습이라니.“이렇게 빨리 가게를 열 줄은 몰랐어요.”맹시은은 옅게 웃었다. 눈빛에는 여유와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인생은 짧으니 생각이 서면 바로 움직여야지요. 이제 저는 연아에게 안정된 하루만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 훗날에도 숨 돌릴 여유를 주고 싶어요.”주온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더 말을 꺼내려던 찰나, 아설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왔다.“언니!”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속에 끓는 분노는 숨겨지지 않았다.“옆집 풍덕양행이 정말 못됐어요!”맹시은이 눈을 들었다.“무슨 일이지?”“값을 내렸어요!”아설은 발을 동동 굴렀다.“우리 쌀값도 이미 시세보다 낮게 잡았는데 거긴 아예 우리보다 더 낮게 불렀어요! 그래서 원래 우리 가게로 오려던 손님들이 가격을 듣고 다 저쪽으로 가버렸지 뭡니까!”주온청도 미간을 좁혔다.“장사란 게 다 그런 거라지만 저렇게까지 빼앗는 건 좀 심하지 않나요?”그러나 맹시은은 조금도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찻잔을 들어 거품을 살짝 불어냈다.“그냥 두렴.”아설이 더 조급해졌다.“언니, 오늘이 개업 첫날이에요! 시작부터 기세를 빼앗기면 재수도 없잖아요!”맹시은은 찻잔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은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빛이 담겨 있었다.“아설, 기억해. 곡식은 백성의 근본이야. 이익은 종이처럼 얇고 장사는 물 흐르듯 이어가야 해. 그가 한 문 내리면, 한 문 손해를 보는 셈이지. 스스로 팔을 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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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6화

“아설이 철이 없었으니 부디 노여워 하지 말거라. 이렇게 걸음해주었으니 이 쌀은 당연히 팔아야지. 사람을 불러 너에게 가장 좋은 찹쌀로 싸주마.”맹시은은 속으로 훤히 알고 있었다. 송하윤이 자신을 뼛속까지 증오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개업을 축하하러 왔을 리 없다는 것도.이건 그저 황쥐가 닭에게 절하러 온 격일 뿐.하지만 제 발로 굴러들어온 기회를 어찌 놓치랴. 뱀을 굴 밖으로 끌어내려면 한 마리만 나오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아설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결국 말없이 찹쌀을 담으러 갔다.송하윤은 그녀들을 흘끗 내려다보며 승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은자를 치르고는 쌀을 챙겨 의기양양하게 돌아섰다.아설은 분이 삭지 않아 발을 쿵 구르며 말했다.“언니, 송하윤이 언제 저렇게 착한 적이 있었어요?”맹시은은 느긋하게 주판알을 튕겼다.“은자를 들고 와 장사를 보태겠다는데, 왜 안 팔겠니.”그러고는 아직도 볼이 부어오른 아설을 바라보았다.“내일 너는 보석루에 남아 있거라. 여긴 내가 감당한다.”이 아이는 성미가 급하다. 내일 송하윤이 정말로 판을 벌이러 오면 먼저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이튿날 새벽.상점 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고함이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이 양심도 없는 가게! 파는 쌀에 문제가 있어 우리 아가씨가 탈이 났다!”한 하녀가 허리에 손을 얹고 곡물상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엔 노기가 가득했다.그 뒤로는 관사 몇 명이 버티고 서서 위세를 더했다.순식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문 앞을 에워싸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곡물상 손 장객은 본래 보석루에서 발탁되어 온 인물이었고 이런 소동을 다루는 데는 이미 익숙했다.“할 말씀이 있으시면 안으로 들어와 말씀하시지요.”그는 점원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눈짓했다.그러나 하녀는 비웃듯 쏘아붙였다.“안으로요? 왜요, 입 막으려고요?”손 장객은 그 눈빛을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건 협상할 생각이 없는, 애초에 시비를 걸러 온 얼굴이었다.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우리 집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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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7화

“천 리 유배.”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하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주변의 백성들도 낮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무고는 중죄였다.맹시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린 체구였지만 내뿜는 기세는 산이 무너지는 듯 묵직했다.“네 주인이야 금지옥엽이겠지. 그럼 네 목숨은 목숨이 아니란 말이냐?”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하녀의 눈을 정면으로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주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네 인생 전부를 걸 셈이냐? 헌데 그게 과연 값어치가 있을까.”송하윤은 영국공부에 몸을 의탁한 처지였고 곁의 하녀들은 모두 주씨 큰 마님이 붙여준 이들이었다. 겉으로는 송하윤의 시녀였지만 실상은 영국공부의 사람들인 셈이었다.이 하녀의 얼굴은 맹시은에게 낯설었다. 그러나 주씨 큰 마님이 고른 아이들이라면 어리석지는 않을 터였다.“응?”짧게 흘러나온 그 한 음절.하녀는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다리가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그래. 아무리 주씨 큰 마님이 송 아가씨를 아낀다 해도 맹시은이 문을 들어서면 가문의 안주인은 맹시은이다.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위로, 또 다른 목소리가 스며들었다.인파 밖에서 들려온, 가냘프고 연약하면서도 묘하게 또렷한 음성.“콜록… 어느 철없는 계집아이가 여기서 맹 가 언니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나요?”사람들이 저절로 길을 터주었다.송하윤이 모습을 드러냈다.수수한 흰 치마를 입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며 가느다란 눈썹은 가볍게 찌푸려져 있었다. 다른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는 모습은 금세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먼저 기선을 제압했다. 소동을 일으킨 하녀를 향해 부드럽게 나무랐다.“순영아, 나는 어젯밤 기름진 음식을 조금 먹어 속이 더부룩했을 뿐이다. 어찌 여기까지 와서 일을 벌이느냐? 어서 맹 가 언니께 사죄하지 못하겠느냐?”순영은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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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8화

“언니, 이런 하찮은 일로 어찌 원판 대인까지 번거롭게 하겠어요? 더구나 영국공부까지 소란스럽게 할 순 없지요.”그러나 맹시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송하윤의 손을 잡고 눈 가득 진심 어린 빛을 담았다.“무슨 말을 그리 하는 것이냐? 종현과 나는 곧 혼례를 올릴 사이다. 두 집안은 곧 한 식구가 되어 앞으로 한 지붕 아래 살게 될 텐데, 네 일은 곧 내 일이 아니겠느냐?”그녀는 ‘종현’과 ‘혼례’라는 말을 또렷이, 의도적으로 힘주어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바늘처럼 송하윤의 가슴을 찔렀다.“게다가 태의를 모셔 사실을 분명히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 집 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니? 그 누명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너 역시 내가 억울하게 뒤집어쓰는 걸 바라진 않겠지.”말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이치도 갖추었고 정 또한 잃지 않았다.막는다면 곧 찔리는 것이고 허락한다면 태의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송하윤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얘졌다 하며 얼굴빛이 수차례 바뀌었다.맹시은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 맑고 투명한 시선이 모든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해, 발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치솟았다.“언니 말씀이 옳아요.”이를 악물고 겨우 짜낸 몇 마디. 몸은 금세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그녀는 당장이라도 혼절할 사람처럼 갑자기 기침을 터뜨렸다.“오늘 일은 전부 오해예요. 제 시녀가 철이 없어 일을 키웠을 뿐입니다. 날을 고쳐 후한 예물을 갖추고 직접 찾아와 사죄하겠습니다.”더는 맹시은을 보지 않았다. 몸을 돌려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거의 달아나듯 자리를 떴다.그러자 주변의 수군거림이 한층 커졌다.“진국공부 가게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나 이 쌀 살래! 맹 아가씨 인품은 믿을 만하지.”구경만 하던 백성들이 오히려 앞다투어 가게 안으로 밀려들었다. 모두 쌀을 사겠다며 손을 뻗었다.손 장객과 점원들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발은 땅에 닿을 새가 없었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맹시은은 문 앞에 서서 그 광경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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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9화

한낮이 되어서야 마차는 연아를 혼자 데려다주었다.문을 들어서는 아이의 품에는 새 종이연이 안겨 있었지만 얼굴에는 새 장난감을 얻은 기쁨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은 가을날이었다. 분명 들뜬 얼굴로 나갔던 아이가 어째서 이토록 억울함을 가득 안은 채 돌아온 것일까?“연아, 무슨 일이니? 아버지는?”주종현은 딸과 하루를 함께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반나절 만에 돌아와 버렸다.맹시은이 딸을 끌어안자 연아의 몸이 품 안에서 가늘게 떨렸다.억울함.연아가 이렇게까지 억울해한 적이 있었던가? 정현에 있을 때, 언제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가?맹시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손 장객이 얼굴을 붉힌 채 다가왔다. 목소리에는 억누르지 못한 흥분이 실려 있었다.“아가씨! 오늘 쌀이 반나절 만에 전부 팔렸습니다!”맹시은은 연아를 놓으며 겨우 미소를 지었다.“수고 많았다.”그러나 시선은 줄곧 딸의 애써 괜찮은 척하는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낮춰 연아의 흐트러진 옆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연아, 어머니랑 집에 갈까?”연아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이 맹시은의 소매를 꼭 움켜쥐었다. 놓치면 사라질까 두려운 듯 했다.진국공부로 돌아오자 아이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에 단낭이 나오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아침엔 괜찮았는데.”복동이는 단낭의 손을 잡은 채 연아의 방을 가리켰다.“누님!”어린 아이조차 연아의 기분을 알아챘다.맹시은은 바닥에 내버려진 종이연을 내려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단낭을 향해 말했다.“복동이는 춘행에게 맡겨두고 연아가 좋아하는 과자를 좀 만들어주거라.”입가에 힘겹게 미소를 걸며 덧붙였다.“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들이니까.”단낭은 한숨을 삼키고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경성은 복잡했고 무게가 있었다. 어찌보면 작은 정현에서의 나날이 훨씬 더 환하고 가벼웠다.맹시은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연아는 말없이 작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그녀는 다가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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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0화

한때 천한 첩이었던 여인이 하루아침에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오갔을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주종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일로 그녀가 화난 줄로만 알았다.“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헌데 연아가 다 들었더구나.”맹시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에요. 눈빛도, 말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여섯 살이에요. 우리 날개 아래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비바람을 맞게 될 거예요. 새끼 새도 결국은 자라나니까요.”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헌데 혼자 돌아오게 해선 안 됐어요. 비를 맞을 수는 있어도 우산 없이 서게 해서는 안 됐습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말끝마다 칼날이 서려 있었다.세상의 소문 따위는 그녀 혼자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상처는 그의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로 인해 생긴 상처였다.그토록 예민한 아이가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주종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연아는 아직 어렸지만 그녀는 맹시은과 함께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왔던가?또래의 어느 아이보다도 일찍 세상의 온기와 냉기를 알아버린 아이였다.“내가 소홀했다.”그는 솔직히 잘못을 인정했다.“그때 위심이 급히 입궐하라는 전갈을 전했다. 변방에서 팔백 리 급보가 올라왔다 하여 서둘러 자리를 떠난 것이다.”맹시은의 미간이 가늘게 모였다.“변방이라니요?”이유 모를 불안이 가슴 깊은 곳에서 가라앉았다.“적융국이 십오 년 휴전 맹약을 파기하고 이십만 대군을 일으켜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하필 그때 맹 장군께서 병환으로 쓰러지셨어.”그 한 문장이 방 안의 공기를 얼려놓았다.맹시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그녀를 아꼈다. 그녀가 다치면 노쇠한 몸을 이끌고도 밤새 말을 달려 경성으로 돌아오던 사람이었다.“할아버지는 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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