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691 - Chapter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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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유호의 품에서 일어난 해인은 식탁으로 다가가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그제야 유호가 문밖을 향해 낮게 말했다.“들어와.”종이 봉투를 들고 들어온 주헌이 알레르기 약을 가지런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주헌은 유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하다고 느꼈다.차마 고개를 들어 유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주헌은 물건을 내려놓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해인은 어느새 음식을 식탁 위에 차려 놓았다.“빨리 와.”유호는 해인 곁에 앉아 팔을 등 뒤로 뻗어 젓가락을 집었다.유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오늘은 그리 바쁘지 않아. 저녁에는 일찍 들어갈게.”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본가로 가자. 한 주 내내 바빴잖아. 주말도 다가오니까 아들이랑 좀 놀아 줘.”유호도 이견은 없었다.아직 아이에게는 부모의 손길이 필요했다. 이번 주에는 둘 다 본가에 들어가지 못해서 바쁜 틈을 쪼개 영상 통화로만 이안을 봤다....밤.샤워를 마치고 나온 유호의 허리에는 수건 하나만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선명하게 굴곡진 가슴 위로 미처 닦이지 않은 물방울 몇 개가 흘러내렸다.머리는 반쯤만 말린 상태였다. 낮에는 흐트러짐 없이 넘겨져 있던 머리카락은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내려와서, 평소보다 한결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고개를 돌려 유호를 바라보던 해인은 감탄이 어린 눈빛이 되었다.‘이 남자는 정말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흠잡을 곳 없는 이목구비 때문에, 해인은 가끔 유호가 영화배우처럼 느껴지곤 했다.침대 위로 올라온 유호가 해인을 짙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낮에 사무실에서 끝내 맛보지 못한 달콤함을 이자까지 붙여 받아 낼 생각이었다.유호는 해인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품 안으로 끌어당긴 뒤, 망설임 없이 입술을 열고 깊숙이 파고들었다.입술을 몇 번 맞댔을 뿐인데, 해인 옆 이불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몸을 멈칫한 유호는 표정이 굳어진 채 해인 뒤쪽의 이불을 바라봤다.봉긋하게 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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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어렵사리 조우를 방해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더니, 이제는 친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조우라면 적당히 내보낼 수 있었지만, 친아들을 상대로는 유호도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이를 악문 유호가 겨우 말했다.“배가 고픈 모양이네. 내가 분유 타 올게.”‘먹자마자 바로 자라.’ 유호는 속으로 몇 번이나 투덜거렸다.이어진 5분 동안 해인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분유를 타는 유호를 지켜봤다.유호는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잔뜩 줬다. 분유 숟가락으로 우유병 바닥까지 뚫어 버릴 기세였다.멀찍이 떨어진 해인에게도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유호의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해인은 우습기도 했고, 이런 유호가 유난히 생생하게 느껴져서 더 마음에 들었다.분유를 다 먹은 이안은 해인의 어깨에 엎드린 채 만족스럽게 트림을 했다.유호는 곧 잠들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한밤중인데도 아이의 눈은 갈수록 더 또렷해졌다. 오히려 기운이 넘치는지 귀여운 옹알이까지 하며 핑크빛 혀를 내밀었다.마치 귀여움을 부리는 것 같았다.모성애가 차오른 해인은 참지 못하고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우리 이안이... 정말 귀엽다.”이안이 다시 잠들기만 기다리던 유호의 표정은 새까맣게 탄 냄비 바닥처럼 어두워졌다.그렇다고 어린 아기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서, 유호는 이안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이안은 아빠가 놀아 주는 줄 알고 더 환하게 웃었다.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두 눈을 보다 못한 유호가 손바닥으로 아이의 눈을 덮었다.몇 초 뒤 손을 치웠지만, 아이의 두 눈은 여전히 말똥말똥했다.‘방법이 틀렸나? 다시.’유호가 같은 짓을 몇 번 반복하자, 신이 난 이안은 입에 보글보글 거품까지 만들었다.‘끝도 없네.’ 유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해인은 몰래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남자를 보면서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부자가 똑같이 사람을 웃기네.’해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기억 깊숙이 묻어 두었던, 오래전 가족에게서 느꼈던 따뜻함이 되살아났다.이렇게 마음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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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유호의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피부를 간질이자, 귓바퀴에는 옅은 핑크빛이 번졌다.‘대가라니, 별말을 다 하네.’해인은 한 손으로 유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다른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살살 긁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유호의 턱선에 먼저 입을 맞췄다.“이게 대가야.”부드럽고 향긋한 해인의 입술이 닿자 유호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크게 침을 삼킨 탓에 해인이 입을 맞춘 목젖이 더 심하게 간질거렸다.해인이 먼저 다가오는 일은 드물었다.유호의 길게 뻗은 눈매에 짙은 욕망이 어렸다. 긴 손가락이 해인의 머리카락 사이를 천천히 헤집었다.“내가 받을 대가라면, 당연히 내 손으로 받아 내야지.”해인을 깊게 응시하던 유호가 입술을 덮고 거칠게 눌렀다.해인은 고개를 젖힌 채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키스를 받아 냈다.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목덜미가 길게 드러났다.세심한 키스가 하얀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자, 해인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방 안의 열기가 계속 높아졌다. 창밖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이 창문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내리면서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해인의 뺨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때, 유호의 핸드폰이 집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유호는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해인과 손가락을 맞물리고 둘만의 분위기에 깊이 빠져들었다.숨 쉴 틈마저 빼앗긴 해인이 붉어진 얼굴로 유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전, 전화 오잖아.”말을 꺼낸 뒤에야 해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심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귓가에 바짝 붙은 유호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안 받아. 누구도 우리를 방해 못 해.”해인의 뺨은 더 붉어졌다. 유호의 키스에 견디기 힘든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유호의 시선은 사람을 통째로 삼킬 만큼 짙었다.하지만 계속 진동하는 핸드폰은 급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해인을 재촉했다.해인의 마음은 둘로 갈라진 듯했다. 한쪽에서는 욕망 속으로 끌어당겼고, 다른 쪽에서는 그곳을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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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유서까지 빈틈없이 준비했다...’유호의 예상이 맞다면 곧 미성년 자녀와 연로한 어머니,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내가 언론 앞에 나설 터였다. 냉혹한 대기업이 집안의 유일한 가장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호소할 게 뻔했다.처음부터 끝까지 잘 짜인 수순이었다. 앞길에 덫을 깔아 놓고 KH그룹이 덫 안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린 셈이었다.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해인도 수화기 너머 주헌의 말을 모두 들었다.해인은 손끝으로 유호의 찌푸린 미간을 가볍게 쓸었다.“나가 봐야 해? 내가 옷 가져다줄게.”말을 마친 해인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하지만 유호는 곧바로 해인을 누르면서 다시 침대에 눕혔다.“쉬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상대가 여론을 이용해 KH그룹을 비난의 중심에 세우려 한다면, 유호 측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사건이 더 크게 번지기 전에 선수를 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유호가 떠난 뒤 해인은 깊이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새벽빛이 채 밝아지기 전에 해인은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오늘은 드물게 한씨 집안 식구들이 모두 식탁에 모여 있었다.한원랑도 전날 밤 KH그룹에서 벌어진 일을 들은 눈치였다.투신 사건으로 사옥이 통제되면서 KH그룹 직원 전체가 정상적으로 근무하지 못하게 됐다.권영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유호한테 별일은 없겠지?”한원랑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 정도 일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큰 회사를 어떻게 물려받겠습니까?”한원랑은 자식이 스스로 헤쳐 나가게 두는 편이었다. 최근 KH그룹에서 벌어진 일도 알고 있었지만 따로 자신이 손을 보태지는 않았다.왕단영이 해인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해인이 네가 YD그룹을 다시 가져갔다며? 하필 이런 때에 그러면 유호한테 짐을 더 얹는 거나 다름없잖니.”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괜한 분란을 만들려고 하지?’해인이 대꾸하기도 전에 권영자가 먼저 나섰다.“해인이가 빼앗아 간 게 아니잖아. 둘 사이가 좋으니까 유호가 해인이에게 피해가 갈까 봐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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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권영자의 말을 들은 왕단영의 굳었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내가 한씨 집안의 안주인이 된다고?’ 왕단영이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었지만, 한원랑에게 먼저 말을 꺼낼 기회를 잡지 못했다.예전에는 집 안의 세 여자가 팽팽히 맞섰다. 이제 나머지 두 사람이 사라졌으니, 왕단영은 자신이 사실상 안주인이나 다름없고 정식 명분만 부족하다고 여겼다.그런데 권영자가 먼저 혼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왕단영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해인은 입술을 살짝 다문 채 마음속으로 권영자에게 엄지를 세웠다.‘역시 살아온 세월이 다르네.’‘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왕단영을 높이 띄워준 뒤에 떨어뜨릴 생각이야.’왕단영은 이미 한씨 집안 안주인이 된 듯 우쭐해져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한원랑의 표정이 싸늘하게 내려앉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내가 저 여자와 혼인해요? 자격이나 있고요?”한원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눈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왕단영은 머리 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굳은 채 한원랑을 바라봤다.“회, 회장님?”한원랑에게 아내는 서정란 한 사람뿐이었다. 서정란이 세상을 떠난 지 18년이 지나도록 다른 여자 누구에게도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이유였다.천하솜에게 칼로 목을 위협받은 뒤, 한원랑은 집 안의 여자들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한원랑은 그 여자들에게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지만, 뒤에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지 않았던가...“18주기 제사를 지내면 망자가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본 뒤 미련을 놓고 떠난다는 말이 있더라.”한원랑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정란이가 돌아와서 불편하게 여기면 편히 떠나지 못할 테니, 집에 다른 여자가 있어서는 안 돼.”“C시에 남는 집이 한 채 있으니 문승 엄마는 당분간 그곳에서 살아. 그 집은 앞으로 네 명의로 넘겨주지.”한원랑의 말은 왕단영과 관계를 정리하고 더는 왕래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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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한원랑은 왕단영을 지나치게 몰아붙였다가 홧김에 골치 아픈 일을 벌일까 봐 퇴로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한원랑은 왕단영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었다. 문승을 남겨 두고 훗날 더 많은 몫을 챙기려는 생각일 뿐이었다.하지만 문승은 집안 재산에 뜻이 없었고 머릿속에는 오직 자동차 경주뿐이었다.“문승이는 성인이야. 어디서 지낼지는 본인이 정할 일이고, 나는 간섭하지 않아.”문승은 본가에 남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왕단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언젠가 아들이 한씨 집안의 가업을 물려받으면 자신도 이곳으로 돌아올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유호는 단 하루 만에 경비원 투신 사건을 정리했다.KH그룹 위기관리팀이 각 언론사에 연락해서 거액을 제시하며 사건을 보도하지 말라고 요청했다.압박을 받은 대부분의 언론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두 곳은 KH그룹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회 수를 챙기고 싶은 욕심에, 기사 원고를 써서 익명의 온라인 채널에 몰래 올렸다.그러나 글이 게시되자마자 해당 페이지는 차단됐고 아무리 시도해도 열리지 않았다.결국 사건은 널리 퍼지지 못한 채 묻혔다.유호가 예상한 대로 날이 밝기도 전에 KH그룹 사옥 앞에 찾아온 유족들이 울며 소란을 피웠다.원래라면 언론사도 몰려와서 현장을 생중계했을 테지만, 유호가 미리 손을 써 둔 탓에 감히 찾아오는 곳은 없었다.유가족은 직접 인터넷 방송을 켜고 KH그룹의 부당함을 폭로하려고 했다.하지만 방송에는 시청자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노출 자체가 제한된 상태였다.유호는 억지를 부리는 유가족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오직 사실과 충분한 증거를 내세워 KH그룹의 모든 결정이 법과 절차에 맞았음을 밝혔다.숨진 경비원의 아내 이명혜는 검은 상복을 입고 KH그룹 사옥 앞에 앉아 시부모를 바라봤다.“이제 어떻게 할까요? 방송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기자들도 오지 않잖아요. 계속 이러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요.”“KH그룹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 버티기도 어렵고요. 차라리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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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이명혜는 이제야 남편이 오래전부터 죽음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남편이 건넨 통장을 몰래 확인해 보니, 출처를 알 수 없는 돈 수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에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었다.남편이 자신에게 숨긴 일이 있다는 의심이 굳어졌다.오래전에 담배까지 끊은 사람이 갑자기 담배를 피우다 KH그룹 문서 보관실에 불을 냈다는 것도 이상했다.분명 석연치 않은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을 물을 수도 없었다.오숙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내 아들이 암에 걸렸을 리 없어. 보상금 받으려고 거짓말하지 마!”오숙진은 아들의 병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명혜가 KH그룹의 보상금을 받으려고 이야기를 꾸며 낸다고 생각했다.이명혜가 답답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정말이에요. 집에 건강검진 결과도 있어요.”그때 KH그룹 홍보팀 직원들이 다시 유가족에게 다가왔다.“결정하셨습니까? 보상금을 받고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서 계속 항의하시겠습니까?”이명혜가 망설이는 사이 오숙진이 외쳤다.“돈 필요 없어요! 우리 아들 살려 내요!”홍보팀은 더 설득하지 않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기만 했다.“알겠습니다. 그럼 며칠 더 현수막을 들고 계셔도 됩니다.”상대가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자, 오숙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소란을 피웠다.그러나 홍보팀 직원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오숙진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멍하니 굳었다.이명혜는 곁에 선 열 살 남짓한 아이를 바라봤다. 어린 아들까지 이런 분쟁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사건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지난 며칠 동안 KH그룹이 입은 막대한 손해는 모두 남편이 피운 담배에서 시작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회사가 경제적 보상을 해 주겠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지나치게 소란을 피우면 약속 받은 보상조차 사라질 수 있었다.자기 욕심만 앞세워 무리하게 굴어서는 안 됐다.홍보팀이 떠나려 하자 이명혜가 곧바로 뒤따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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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사람이 이렇게 양심 없이 살아서는 안 돼.’‘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도리를 해야 해.’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명혜가 말했다.“회사 임원을 만나게 해 주세요. 반드시 전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천씨 집안의 경사에 아는 사람은 빠짐없이 초대했다. B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호텔 최상층에 성대한 피로연장이 마련됐다.희정은 처음으로 신부가 됐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하는 결혼이었지만,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운지는 중요했다.거울 앞에서 이쪽저쪽을 살폈다. 디자이너가 보름 동안 서둘러 완성한 웨딩드레스는 예상보다 몸에 잘 맞았고 희정의 매력을 한껏 살려줬다.서진은 전에 약속한 대로 가장 좋은 것들만 준비해 줬다.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한 이들도 모두 세계적인 실력자였다. 주얼리마저 한정 제작된 최고급 제품이었고, 조명 아래 선 보석은 눈이 부실 만큼 컸다.희정은 면사포를 썼다. 보통 이 마지막 과정은 어머니가 결혼을 앞둔 딸을 위해 해 주는 일이었다.하지만 희정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장섭은 오늘 갑자기 잡힌 중요한 국제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시장이 공무를 이유 없이 미룰 수는 없어서 조금 늦게 도착할 예정이었다.그런데 뒤쪽 문이 열리더니, 간병인이 도수희의 휠체어를 밀면서 들어왔다.“희정아.”도수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에서도 오늘을 위해 일부러 준비했다는 게 보였다.다만 짙은 화장으로도 감추기 어려울 만큼 병색이 완연했다.도수희는 곱게 차려입은 희정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엄마가 면사포 씌워 줄게.”도수희가 차씨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희정은 10살을 갓 넘긴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만큼 도수희는 희정을 거의 친딸처럼 여겼다.특히 해인을 찾아 사방을 헤매던 시절에는 만나지 못한 딸에게 줄 애정을 희정에게 쏟기도 했다.희정은 단 한 번도 도수희에게 다정하게 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중요한 날에는 도수희 자신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혼인은 인생에서 손꼽히게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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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호텔 밖으로 나온 도수희는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오랫동안 도수희를 돌봐서 차씨 집안 사정을 알고 있던 간병인이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충고했다.“사모님, 마음을 억지로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희정 아가씨가 따님에게 그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사모님은 지난 일을 덮고 결혼식까지 와 주셨잖아요.”“그런데 감사하기는커녕 저렇게 대하는 사람과는 앞으로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도수희가 씁쓸히 웃었다.“희정이는 어릴 때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저렇게 된 거야. 결혼은 평생에 한 번뿐인 큰일이니까 엄마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랄 거라고 생각했어...”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지도 몰랐다. 삶의 끝이 가까워지면 주변 모두가 평온하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게 마련이었다.하지만 어떤 인연은 끝내 가까워지지 못하는 법이다.도수희는 이내 마음을 내려놓고 나지막하게 말했다.“됐어. 희정이 원하지 않으니 병원으로 돌아가자.”차는 곧 호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도수희가 떠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호텔 안에 화재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예식장은 모든 준비를 거의 마치고 본 예식을 앞둔 상태였다. 진행 책임자와 희정은 마지막 순서를 확인했고, 희정도 문밖에서 언제든 입장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갑자기 울린 화재 경보음은 예식장을 공포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서진은 무대 위에 서서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아름다운 신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호텔 총지배인은 무대로 뛰어 올라가 외쳤다.“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모두 비상계단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엘리베이터는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세요!”이곳은 B시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호텔로 건물이 무려 100층에 달했다.결혼식 피로연장은 공교롭게도 건물 최상층의 옥상 정원에 마련돼 있었다.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 겁에 질린 하객들은 예식 따위는 깡그리 잊고 모두 출구를 향해 몰려갔다.뒤엉킨 인파가 아름답게 꾸민 예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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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희정의 눈은 붉게 충혈됐고 꼬리뼈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팠다.서진은 이번 결혼식을 위해 따로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여러 언론사의 취재진도 결혼식 현장에서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갑작스러운 화재 때문에 방송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이제 이 결혼식은 B시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서진은 희정의 발에서 10센티미터나 되는 킬 힐을 벗기고, 자신이 신던 구두를 벗어 희정에게 신겼다.“걸을 수 있어? 힘들면 내가 업을게.”희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서진이 넓은 등을 내밀었다.희정은 눈물을 쏟으며 서진의 목을 뒤에서 감쌀 수밖에 없었다.“내 결혼식이 다 망했어.”희정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결혼식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그런 사람들이 이토록 볼품없는 모습으로 호텔에서 도망쳤으니, 앞으로 이 일을 꺼낼 때마다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이번 일 때문에 B시의 유력 인사들을 전부 불쾌하게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결혼식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던 계획도 전부 사라졌다.그래도 서진은 비교적 침착했다. 희정을 업고 비상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결혼식이 있든 없든 남은 평생 너한테 잘하고 아껴 줄게.”서진에게 결혼식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었다. 다른 여자들이 누리는 결혼식을 희정에게도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서진은 다정한 눈빛으로 앞을 보며 말했다.“희정아, 아쉬우면 나중에 적당한 날을 정해서 다시 결혼식을 올리자. 우리 둘만을 위한 결혼식으로.”서진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의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희정이 원한다면 결혼식을 한 번 더 열어 주면 됐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하지만 희정은 그 말을 듣고도 기쁘지 않았다.‘이미 모두의 웃음거리가 됐는데 다시 식을 올린들 누가 참석하려 하겠어?’하필 가장 중요한 예식 도중에 화재로 결혼식이 중단된 신부는 B시에서도 희정이 처음일 터였다.‘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면 둘만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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