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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강혁의 시선이 멈췄다.은유는 이번에는 추측하지 않았다.그냥 물었다.강혁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안 좋아 보이냐.”은유의 입술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평소에는 잘 모르겠습니다.”“지금은.”은유는 강혁의 얼굴을 봤다.“조금 알 것 같습니다.”강혁이 짧게 웃었다.그 순간 은유도 기다리지 않았다.강혁의 어깨를 잡아당겼다.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하지만 강혁은 느꼈다.지금까지는 자신이 시작했고,자신이 정했고,은유가 따라왔다.방금은 아니었다.은유가 자기를 당겼다.강혁은 멈춰 세우지 않았다.오히려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한동안 둘 사이에는 명령이 없었다.강혁이 얼굴을 조금 떼었을 때도 은유의 손은 그의 목 뒤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강혁의 시선이 그 손으로 갔다.은유가 그제야 알아차리고 손을 내리려 했다.“놔둬.”은유의 움직임이 멈췄다.“네…… 주인님.”손은 그대로 남았다.강혁은 그 모습을 잠깐 봤다.그리고 다시 은유에게 가까워졌다.누가 누구의 반응을 보고 다음 행동을 정하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둘 다 원했고.둘 다 움직였다.그뿐이었다.강혁의 손이 은유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올라갔다.손가락이 부드러운 살을 누르자 은유의 다리가 조금 더 벌어졌다.숨이 목 끝에서 걸렸다.강혁은 그 반응을 보지 않았다.확인하지 않았다.그냥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손가락이 더 안쪽으로 미끄러졌다.이미 젖어 있었다.은유가 작게 몸을 떨었다.“하…….”강혁의 입술이 은유의 목 옆으로 내려갔다.이빨이 살짝 스치자 은유의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강혁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을 쓸었다.은유의 허리가 앞으로 밀렸다.더 세게 닿기를 바라는 움직임이었다.강혁은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손가락이 조금 더 깊이 미끄러졌다.은유의 숨이 끊겼다.“주인님…….”목소리가 떨렸다.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 은유의 허리를 돌려렸다. 강혁이 바지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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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강혁이 시계를 확인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은유가 그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강혁은 테이블 위에 놓아둔 차 키를 집었다."나갈 거야.""네."은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준비해.""네, 주인님."그게 전부였다.은유는 어디를 가는지 묻지 않았다.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도, 자신이 따라가서 뭘 해야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거울 앞에서 흐트러진 머리만 한번 정리했다.어제 입었던 옷은 이미 갈아입은 뒤였다.문을 열고 나오자 강혁은 현관에 서 있었다.신발을 신던 그가 은유를 한번 봤다.위에서 아래로.은유도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왜 그러십니까?""뭐가.""보셔서요.""보면 안 돼?""그건 아닙니다."강혁은 더 말하지 않고 신발을 신었다.은유도 옆에 앉아 신발을 신었다.예전 같았으면 한 번쯤 생각했을 것이다.왜 데려가는 걸까.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걸까.어떤 걸 준비해야 할까.그런데 지금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가자고 했으니까 가면 됐다.아니.그것보다는 조금 달랐다.그냥 같이 나가는 게 좋았다.은유가 일어났다.강혁이 먼저 현관문을 열었다.은유가 그 옆을 지나가는 순간이었다.손이 허리 뒤에 닿았다.밀어낸 것도 아니고, 잡은 것도 아니었다.좁은 현관에서 먼저 나가라는 듯 손바닥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은유의 허리가 순간 굳었다.아주 잠깐이었다.강혁의 손도 멈췄다.은유가 그를 돌아봤다.강혁도 은유를 보고 있었다.어제와 같은 손이었다.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던 손.그 생각이 스쳤다가 사라졌다.강혁이 먼저 손을 내렸다."안 가?""갑니다."은유가 현관 밖으로 나갔다.강혁이 뒤따라 문을 닫았다.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에도 그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뒤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됐다.강혁이 시동을 걸었다.은유는 안전벨트를 맸다.차가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오후 햇빛이 앞유리로 들어왔다.은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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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직원이 조금 더 밝은 재킷을 가져왔다.강혁이 받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은유는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강혁이 나왔다.은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아까 것보다 훨씬 나았다.어깨선은 비슷하게 단정했지만 색이 조금 부드러워서 얼굴이 덜 차가워 보였다.강혁이 거울 앞에 섰다.단추를 잠갔다.옆모습을 한번 확인했다.그리고 거울 너머로 은유를 봤다."이건."은유는 잠깐 더 봤다."좋습니다.""바로?""네.""아까는 별로라며.""이건 다릅니다."강혁이 몸을 반쯤 돌렸다."뭐가."은유는 다시 한번 봤다."덜 무서워 보입니다."강혁의 움직임이 멈췄다.직원이 시선을 내렸다.은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조금요."강혁이 은유를 봤다."내가 무서워 보여?""처음에는요.""지금은."은유는 잠깐 생각했다."가끔요."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은유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강혁은 거울을 다시 봤다.재킷 앞섶을 한번 정리했다."이걸로 하죠."직원이 바로 대답했다."네. 그러면 이쪽은 최종 수선만 확인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강혁이 재킷을 벗었다.은유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정말 이걸로 하십니까?""네가 좋다며.""제가 좋다고 하면 다 고르십니까?""그럴 리가."대답이 너무 빨라서 은유가 웃었다."그렇군요."강혁이 재킷을 직원에게 넘겼다."내가 봐도 괜찮으니까 사는 거야.""네."은유는 여전히 조금 웃고 있었다.강혁은 한번 보고 말았다.직원이 이번에는 셔츠 원단 몇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흰색.푸른빛이 도는 흰색.회색.아주 옅은 베이지.강혁은 하나씩 봤다.두 장을 바로 옆으로 밀었다.남은 두 장을 비교했다.은유는 옆에서 보다가 한쪽을 가리켰다."이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왜.""아까 재킷이랑 더 잘 어울립니다."강혁이 원단을 한번 들어봤다.옆에 놓인 재킷과 비교했다."이거?""네.""저건."은유가 다른 원단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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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식당이 보이기 시작했다.은유가 걸음을 조금 빨리해 강혁 옆에 붙었다.강혁이 힐끗 봤다.은유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옆에서 걸었다.입가에는 아직 웃음이 남아 있었다.식당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점심시간은 조금 지났는데도 테이블 대부분이 차 있었다.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강혁이 먼저 앉았다.은유는 맞은편 의자를 빼다가 잠깐 멈췄다.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읏……."아주 작은 소리였다.강혁이 메뉴를 들다 말고 봤다."아파?""조금요."은유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고쳤다.그러다 다시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단단한 의자였다.어제 케인의 흔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강혁이 그걸 보다가 말했다."옆으로 앉아.""괜찮습니다.""안 괜찮아 보이는데.""앉을 수 있습니다."강혁의 시선이 내려갔다.은유가 한쪽 엉덩이에 체중을 덜 싣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그게 앉은 거야?"은유가 입을 다물었다.강혁이 자기 옆 의자를 발끝으로 조금 뺐다.벽 쪽에 붙은 긴 벤치 좌석이었다."여기 와."은유가 주변을 한번 봤다."여기서요?""응."은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혁 옆으로 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푹신한 좌석에 엉덩이가 닿았다.이번에는 훨씬 나았다.은유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괜찮아?""네."강혁이 메뉴를 다시 펼쳤다.그걸로 끝이었다.은유도 별생각 없이 자기 메뉴를 들었다.잠시 뒤 직원이 왔다.강혁이 먼저 주문했다.그리고 은유를 봤다."골랐어?""네."은유도 자기가 먹을 것을 말했다.직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돌아갔다.그제야 은유는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테이블에서.은유가 맞은편의 빈 의자를 봤다."가고 싶어?"은유가 잠깐 생각했다."아니요.""그럼 있어.""네."그게 전부였다.은유는 물을 마셨다.강혁도 휴대폰을 한번 확인했다.누가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점심이었다.은유는 그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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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아침.은유는 눈을 뜨고 한동안 천장을 봤다.몸을 움직이자 어제보다 훨씬 가벼웠다.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케인의 흔적도 이제는 옷이 스칠 때 조금 따갑게 느껴지는 정도였다.은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하고 물을 마셨다.노트북을 켜기 전에 휴대폰부터 들었다.시간을 확인했다.평소 보고하던 시간이었다.은유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잠깐 생각하다 늘 하던 대로 적었다.[기상했습니다.]조금 뒤 하나를 더 보냈다.[오늘 일정 확인했습니다. 특이사항 없습니다.]전송.은유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잠시 뒤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응.]짧았다.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답이었다.은유는 메시지를 한번 보고 화면을 껐다.오늘은 따로 만나기로 한 일정이 없었다.강혁이 오겠다는 말도 없었고.기다리라는 지시도 없었다.그러니까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었다.메일을 확인했다.채용 사이트도 한번 들어갔다.새로 올라온 공고를 몇 개 봤다.한 곳은 조건이 애매했고.한 곳은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었다.하나는 저장해뒀다.그러다 배가 고파져 냉장고를 열었다.먹을 게 별로 없었다.은유는 문을 닫았다.“나갔다 와야겠네.”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왔다.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생수.간단히 먹을 것.세제도 거의 떨어진 게 생각나 하나 집었다.계산대로 가다가 냉장 진열대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작은 디저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어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은유는 잠깐 그걸 봤다.다른 가게였고.맛도 전혀 다를 것이다.그런데 어제 강혁이 한입 베어 물고 했던 말이 먼저 떠올랐다.별론데.은유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손이 가방으로 갔다.휴대폰을 꺼냈다.카메라를 켰다.진열대 안의 디저트에 화면을 맞췄다.찰칵.찍고 나서 멈췄다.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은유는 잠깐 그걸 봤다.그리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강혁과의 대화가 바로 위에 있었다.[기상했습니다.][오늘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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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은유는 늦은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다.아침에 저장해둔 공고를 열었다.지원 조건을 읽고, 회사 홈페이지도 한번 들어가 봤다.이력서에서 고칠 부분이 몇 군데 보였다.한 줄을 지우고 다시 썼다.경력란을 확인했다.자기소개서도 조금 손봤다.두 시간쯤 지나자 눈이 뻑뻑했다.은유는 노트북을 닫았다.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갔다.냉장고를 열었다.아침에 사온 생수가 보였다.그 옆에는 별것 없었다.은유는 물병을 꺼냈다.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열었다.한번 안을 봤다.“뭐 먹지.”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은유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물을 마셨다.휴대폰이 울렸다.은유의 시선이 바로 테이블로 갔다.손을 뻗었다.화면을 켰다.[지원하신 공고의 마감일이 3일 남았습니다.]채용 사이트 알림이었다.은유는 화면을 잠깐 봤다.알림을 지웠다.휴대폰을 내려놓으려다가 시간이 보였다.오후 네 시가 조금 넘었다.아침 보고 이후 강혁과 나눈 연락은 없었다.당연했다.오늘은 쉬는 날이니까.은유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놓았다.이번에는 화면이 아래로 가게 뒤집었다.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세탁할 옷을 꺼냈다.색깔별로 대충 나눠 세탁기에 넣었다.세제를 따르다가 아침에 새로 사온 통을 봤다.뚜껑을 열었다.양을 맞춰 넣었다.세탁기를 돌렸다.웅.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욕실 안을 채웠다.은유는 바닥에 떨어진 빨래 하나를 집었다.그러다 손이 멈췄다.어제 입었던 것.은유는 잠깐 내려다보다 그대로 세탁기에 넣었다.문을 닫았다.저녁에는 뭘 할지 생각했다.밀린 드라마가 있었다.봐야지.배달도 하나 시키고.일찍 씻고.그러면 됐다.은유는 거실로 나왔다.테이블을 지나가다가 휴대폰을 한번 봤다.뒤집힌 채 그대로였다.은유는 손대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집었다.TV를 켰다.드라마를 틀었다.첫 장면이 시작됐다.은유는 등을 기대었다.십 분쯤 지났다.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은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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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강혁이 서랍을 열었다.안쪽에 세워둔 파일 몇 개를 훑다가 가장 두꺼운 것을 꺼냈다.은유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강혁이 집에서 자기 일을 하는 동안 은유가 다른 걸 하고 있는 건 이제 낯설지 않았다.“은유야.”은유가 고개를 들었다.“네, 주인님.”“이것 좀 봐.”강혁이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은유가 휴대폰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뭘 찾으십니까?”“계약서.”“제 계약서 말씀이십니까?”“응.”강혁이 서류 몇 장을 넘겼다.“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은유가 맞은편에 앉았다.강혁이 펼쳐놓은 서류철을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맨 앞에는 처음 보는 서류들이 있었다.모집 공고를 출력한 것.지원 조건을 정리한 표.몇 장을 넘기자 지원자들을 정리해놓은 자료가 나왔다.은유의 손이 잠깐 멈췄다.지원자 638명.익숙한 숫자였다.처음 공고에 지원했을 때도 봤다.그때는 꽤 큰 숫자라고 생각했다.자기 앞에 637명이 더 서 있는 것 같았다.그중에서 자신이 뽑혔다.은유는 다음 장을 넘겼다.몇 명으로 줄어든 후보 자료가 나왔다.또 넘겼다.강혁이 옆에서 말했다.“그 뒤일 거야.”“네.”은유가 다시 장을 넘겼다.그런데 손이 조금 느렸다.아는 숫자였다.달라진 것도 없었다.638명.자기도 그중 하나였다.“찾았어?”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은유가 고개를 들었다.강혁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네.”은유가 마지막 쪽에 끼워져 있던 계약서를 꺼냈다.“여기 있습니다.”강혁이 손을 내밀었다.은유가 계약서를 건넸다.강혁은 바로 필요한 페이지를 펼쳤다.몇 줄을 읽더니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었다.“여기 있었네.”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강혁이 시선을 들었다.“왜.”“네?”“뭐 봐.”은유는 자기가 아직 서류철을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아닙니다.”강혁이 은유를 한번 봤다.평소보다 대답이 조금 늦었다.하지만 더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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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바로 옆이었다.카페는 평일 오후라 한산했다.강혁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은유가 뒤따랐다.주문대 앞에 서자 강혁이 말했다.“아이스 라테 하나.”그리고 자기가 마실 커피를 주문했다.은유가 지갑을 꺼내려는데 강혁이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은유의 손이 멈췄다.“제 건 제가 계산하겠습니다.”“됐어.”“지난번에는 제가 사고 싶은 건 제가 사라고 하셨잖습니까.”강혁이 은유를 봤다.“그거랑 커피랑 같아?”“뭐가 다릅니까?”강혁도 잠깐 생각했다.“내가 마시러 왔잖아.”직원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강혁이 그냥 결제했다.은유는 지갑을 다시 넣었다.둘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진동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강혁이 휴대폰을 꺼냈다.메시지 하나를 확인하더니 화면을 은유 쪽으로 내밀었다.“봐봐.”은유가 휴대폰을 받았다.“뭘 말씀이십니까?”“저녁.”화면에는 몇 군데의 식당이 떠 있었다.“어디가 나아.”은유의 손가락이 멈췄다.어제도 비슷했다.옷을 골랐고.먹을 곳을 골랐다.강혁은 자기가 고른 곳으로 갔다.은유가 화면을 내렸다.“제가 골라도 됩니까?”강혁이 휴대폰을 보다가 은유를 봤다.“싫으면 왜 물어봐.”“그건 그렇습니다.”은유는 다시 화면을 봤다.한 군데를 눌렀다가 돌아왔다.다른 곳도 봤다.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은유가 물었다.“여기는 어떠십니까?”“괜찮네.”“그럼 여기로 하시겠습니까?”“응.”은유가 휴대폰을 돌려주려다가 잠깐 멈췄다.아까 본 서류가 문득 떠올랐다.지원 조건.후보 자료.그리고 638이라는 숫자.강혁은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골랐다.그중 자기가 남았다.계약을 했고.정해진 일을 했다.그런데.은유는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왜.”강혁이 물었다.은유가 고개를 들었다.“이런 것도 제가 하는 일입니까?”강혁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뭐가.”“식당 고르는 거요.”강혁은 잠깐 은유를 봤다.“아니.”대답은 짧았다.은유가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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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은유도 조수석 문을 열었다.앉고 나서 안전벨트를 맸다.강혁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움직였다.은유는 창밖을 봤다.오늘 오전에는 오래된 서류를 봤다.지원자 638명.자기도 그중 하나였다.그리고 지금은,그 사람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강혁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그게 오히려 조금 이상했다.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그대로 강혁의 집을 향해 갔다.차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강혁이 익숙하게 한쪽으로 꺾었다.차가 멈췄다.시동이 꺼졌다.은유는 안전벨트를 풀면서 앞을 봤다.별것 없는 주차장이었다.그런데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조금 이상했다.지금까지 강혁은 늘 자기 쪽으로 왔다.오늘은 반대였다.강혁이 트렁크를 열었다.봉투 하나를 꺼내 은유에게 내밀었다.“이거.”“네.”은유가 받아 들었다.둘은 엘리베이터를 탔다.강혁이 층수를 눌렀다.은유는 올라가는 숫자를 봤다.강혁은 휴대폰을 한번 확인했다.평소와 똑같았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강혁이 먼저 내렸다.은유도 따라갔다.“들어와.”은유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안쪽이 보였다.“왜.”“아닙니다.”은유가 신발을 벗었다.현관 안으로 들어갔다.강혁이 먼저 봉투를 들고 안쪽으로 걸어갔다.은유는 한 박자 늦게 따라갔다.집은 생각보다 조용했다.물건이 많지 않았다.거실에는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있었고, 한쪽 벽에는 큰 책장이 있었다.정돈돼 있었다.그런데 은유가 상상했던 것만큼 차갑지는 않았다.테이블 위에 반쯤 읽은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소파 한쪽에는 벗어둔 얇은 카디건이 걸쳐져 있었다.은유의 시선이 거기서 잠깐 멈췄다.주인님도 집에서는 옷을 저렇게 벗어놓는구나.“뭐 해.”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은유가 고개를 들었다.강혁이 봉투를 든 채 보고 있었다.“네.”“그거 이리 줘.”은유가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강혁이 받아 들고 주방 쪽으로 갔다.은유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랐다.강혁의 집에 처음 와서 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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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강혁이 시계를 확인했다.은유는 소파 한쪽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다.평소처럼 왔고.정해진 걸 했고.강혁은 자기 할 일을 했고, 은유도 그 옆에서 시간을 보냈다.어제 봤던 숫자를 다시 떠올리지는 않았다.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강혁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오늘은 여기까지.”은유가 고개를 들었다.“네.”대답은 바로 나왔다.그런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강혁이 한번 봤다.은유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몇 초.강혁이 물었다.“안 가?”은유가 그제야 자기 가방을 봤다.바닥에 내려놓은 채였다.“갑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이 바로 가지 않았다.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그냥 보고 있었다.은유가 입술을 한번 다물었다.“주인님.”“왜.”“이후에 일정 있으십니까?”강혁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없는데.”“아.”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잠깐 조용했다.강혁은 여전히 기다렸다.은유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굳이 남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오늘 할 일은 끝났다.더 받을 지시도 없었다.플레이를 더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지금 일어나서 현관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은유가 시선을 들었다.“그럼.”말이 잠깐 끊겼다.강혁이 봤다.은유가 다시 말했다.“조금 더 있어도 됩니까?”강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은유의 얼굴을 한번 봤다.“뭐 하려고.”은유도 잠깐 생각했다.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모르겠습니다.”강혁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근데 있고 싶어?”은유는 이번에는 생각하지 않았다.“네.”짧은 대답이었다.강혁은 더 묻지 않았다.소파 등받이에 다시 몸을 기대며 말했다.“그럼 있어.”은유의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감사합니다. 주인님.”강혁은 이미 휴대폰을 다시 들고 있었다.은유도 가방에서 손을 뗐다.그대로 소파에 다시 등을 기대었다.몇 분 전까지는 끝난 시간이었다.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은유는 그 사실만으로 조금 만족스러웠다.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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