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리는 절반쯤 비어 있었다.벽을 따라 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책들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옷가지도 접어서 상자에 넣을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지만, 짐을 싸느라 어수선해진 집 안의 고요함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네리사는 거실 한가운데서 상자를 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한때 그녀는 이곳에서 살았다. 제인에게서, 과거에서,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에서 도망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이곳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녀는 다시 이곳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에어리는 한때 그녀를 지켜 준 안식처였지만, 집은 아니었다. 그녀의 집은 밴스가 있는 곳이었다. 마야가 있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집이었다.침실에서 밴스가 상자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나무 바닥을 밟는 그의 발소리는 평소처럼 여유롭고 안정적이었다. 그는 직접 짐을 싸겠다고 고집했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네리사가 직접 짐을 싸겠다고 하자 기꺼이 도와주기로 했다.네리사는 그에게 분명히 말했다.“사람들이 내 일거수일투족까지 챙겨 주는 블랙우드 부인 생활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그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직접 싸. 내가 도와줄게.”그래서 네리사는 직접 짐을 싸고 있었다.사실 그냥 떠나도 상관없었다. 하인들이 알아서 모든 물건을 정리해 블랙우드 저택으로 옮긴 뒤, 그녀와 밴스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을 전부 제자리에 놓아 줄 테니까.하지만 그런 생활은 네리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남에게 맡긴 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이렇게 직접 상자를 채우고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더 자연스러웠고, 무엇보다 자신다웠다.그녀는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오래된 영수증 몇 장, 잊고 있던 펜 하나, 몇 년 전 회의 때 적어 둔 메모가 접힌 채 들어 있었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서랍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사진
Zuletzt aktualisiert : 2026-10-29 Mehr le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