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보이지 않는 빛을 찾으려면 먼저 보이게 해야 했다.
루엔은 햇빛을 공기 세모 기둥에 통과시켰다. 둘째 고리 때부터 해 온 분광이었다. 창고 흰 벽에 색 띠가 펼쳐졌다. 빨강, 주황, 노랑, 풀빛, 파랑, 보라.
보라 너머는 벽이었다. 그냥 흰 벽.
루엔은 그 흰 벽을 오래 보았다. 전생에서는 알았다. 보라 너머에도 빛이 있다. 너무 빨리 떨어서 눈이 따라가지 못할 뿐. 알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걸 골라낼 수는 없었다.
*
답은 세 가마 공방에 있었다.
비브케가 가마 옆 자루에서 돌을 한 줌 꺼내 보였다. 보랏빛, 풀빛, 투명한 것이 섞인 반들반들한 돌. 모서리가 네모반듯하게 쪼개져 있었다.
“녹임돌이오. 유리 녹일 때 한 줌 넣으면 불이 덜 들고 잘 녹지. 광산에서 사 오는 거요.”
“이 돌을 해에 대 보신 적 있습니까.”
“해에?” 비브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에 대면 뭐가 되오.”
“어떤 돌은 해 아래서 제 빛이 아닌 빛을 냅니다. 받은 빛을 다른 빛으로 바꿔서.”
비브케는 대답 대신 돌 하나를 공방 문간 햇빛 속에 놓았다. 둘이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햇빛 아래서는 햇빛이 너무 밝았다.
“어두운 데서 해야 합니다.”
그날 오후 루엔은 창고 문을 거의 닫고 틈으로 가는 햇빛 한 줄기만 들였다. 세모 기둥으로 펼쳤다. 흰 벽에 색 띠. 그리고 보라 너머, 아무것도 없는 흰 벽에 녹임돌 가루를 밀랍으로 발라 두었다.
보라 너머가 빛났다.
희미하게. 푸르스름하게. 아무 빛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돌가루가 스스로 빛나는 것 같았다. 그곳에 빛이 닿고 있었다. 눈에 안 보이는 빛이. 돌이 그걸 받아 눈에 보이는 빛으로 바꿔 내고 있었다.
문간에 선 비브케가 숨을 들이켰다.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는데.”
“있습니다. 눈이 못 볼 뿐입니다. 이 돌은 봅니다.”
비브케는 한참 벽을 보다가 제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스무 해 동안 녹임돌을 한 줌씩 가마에 던져 넣었다.
“돌한테 눈이 있을 줄은 몰랐소.”
루엔은 녹임돌 한 자루 값을 치르려 했다. 비브케는 받지 않았다. 루엔은 생활비 장부의 안경 몫 「받을 것」 칸에서 그만큼을 덜어 적었다. 비브케가 그 장부를 넘겨다보고 혀를 찼다. 그래도 고치라고는 하지 않았다.
*
이제 박자를 고를 차례였다.
다섯째 고리의 셈으로, 루엔은 마나를 빛으로 바꾸되 한 박자로만 떨게 하는 식을 짰다. 노래에서 줄 하나만 떨게 하듯이. 식은 길었다. 넷째 고리의 텔레포트 식보다 세 배 길었다. 한 칸이 틀리면 옆 박자가 섞였다.
첫 시도. 창고 안, 녹임돌 벽 앞.
보이는 빛은 없었다. 대신 녹임돌 벽에 푸른 얼룩이 떠올랐다. 넓게. 손바닥만 하게 번져서.
루엔은 식을 거두었다.
“번졌습니다. 박자가 여럿 섞였습니다.”
둘째 시도. 얼룩이 손가락 굵기로 줄었다.
셋째. 실 한 가닥.
넷째 날, 아홉째 시도에 녹임돌 벽에 가는 줄 하나가 섰다. 칼로 그은 듯이. 보라 너머, 그 가운데서도 더 먼 자리. 옆으로 번지지 않았다.
루엔은 그 줄을 모래시계 한 번 동안 세워 두고 보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그다음엔 제 손등에 비췄다. 사흘 동안 날마다. 살갗이 붉어지지 않았다. 따갑지도 않았다. 사흘째 저녁 근시로 손등을 보았다. 살갗 겉은 그대로였다.
“그걸 왜 네 손에 해.” 테오가 물었다.
“남의 손에 하기 전에 해야 합니다.”
“다치면.”
“다치면 줄이 틀린 겁니다. 제 손이 먼저 알아야 합니다.”
테오가 녹임돌 벽의 가는 줄을 보았다. 그 조금 안쪽, 보라에 더 가까운 자리를.
“그럼 옆 줄은. 조금 더 보라 쪽은. 거기도 빛나잖아.”
“거기는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어떻게 알아.”
루엔은 하르트령의 겨울을 떠올렸다.
“영지 북쪽 사냥꾼들은 큰 눈이 온 뒤 맑은 날에 사냥을 나가면, 저녁에 눈이 멉니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따갑고 붓습니다. 하루 이틀 앓다가 낫습니다. 눈밭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루엔은 가는 줄 안쪽을 짚었다. “눈밭이 햇빛을 되비추면 이 자리 빛이 눈으로 곧장 들어갑니다. 보이지 않으니 눈을 감지도 않습니다. 여름 뙤약볕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 살갗이 벗겨지는 것도 이 자리 빛입니다.”
“그럼 사냥꾼들은 어떻게 해.”
“자작나무 껍질에 가는 틈을 내서 눈에 댑니다. 틈으로만 봅니다. 아버지 기사들도 겨울 순찰 때 씁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분들은 까닭은 몰라도 막는 법은 알았습니다.”
테오는 한참 가는 줄과 그 안쪽을 번갈아 보았다. 눈에는 둘 다 흰 벽이었다.
“한 뼘도 안 떨어졌는데.”
“손가락 한 마디입니다. 그래서 한 칸도 틀리면 안 됩니다.”
*
세정의 물막에 그 줄을 얹었다.
첫째 고리의 세정은 물을 얇은 막으로 펴서 살갗을 감싸 씻는 마법이었다. 때와 먼지는 씻겼다. 작은 것들은 물에 섞여 떠날 뿐 죽지 않았다. 이제 그 물막 안에 한 줄의 빛을 비추면, 물막에 든 작은 것들이 죽을 것이었다.
학교 뒤뜰 돌 벤치. 두 해 전 봄에 강물을 들여다보던 자리. 강가 빨래터 아래 강물을 한 동이 떠 왔다.
루엔은 제 두 손에 강물 물막을 씌웠다. 쇠잔으로 잰 물 한 잔. 그 위에 빛의 줄을 스무 박자.
물막을 걷어 창유리 조각에 받았다. 근시.
반쯤 살아 있었다.
막대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동그란 것들이 돌았다. 절반은 멈춰 있었다. 절반은 아니었다.
클라리사가 들여다보고 허리를 폈다.
“반.”
“반입니다.” 루엔은 쇠잔을 보았다. “물이 두껍습니다. 빛이 물막 겉에서 먼저 다 먹힙니다. 속까지 못 갑니다.”
둘째. 쇠잔 반 잔. 물막이 얇아졌다.
근시로 보았다. 열에 하나가 움직였다.
“아홉 할.” 클라리사가 적었다.
“아홉 할은 모자랍니다. 하나가 남으면 하나에서 다시 불어납니다.”
셋째. 반 잔을 두 번에 나눴다. 얇은 물막을 씌우고 빛, 걷고, 다시 얇은 물막을 씌우고 빛. 한 번에 스무 박자씩.
창유리 조각. 근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루엔은 보이는 칸을 네 귀퉁이 다 보았다. 가운데도. 한 번 더 보았다.
“영.”
클라리사는 적기 전에 자기가 한 번 더 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허리를 폈다.
“영.”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정화식. 쇠잔 반 잔을 두 번. 한 번에 스무 박자. 첫 시도 반, 둘째 아홉 할, 셋째 영.」
아버지의 쇠잔이었다. 여섯 살 가을부터 품에 넣고 다닌 작은 잔. 흘리지 않게 들면 된다는 잔. 그 잔으로 물막의 물을 잰 셈이었다.
*
오렐의 병실에서 처음 썼다.
셋째 침상에 대장간 견습 아이가 누워 있었다. 열두 살. 쇠를 나르다 무릎을 크게 찢었다. 상처가 붉게 부어 곪기 시작했다. 오렐은 이레 동안 칠 할 술로 닦았다. 붓기가 줄지 않았다.
루엔은 아이 무릎에 물막을 씌웠다. 반 잔. 빛. 걷고, 다시 반 잔. 빛.
아이가 눈을 떴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안 느껴지는 게 맞습니다.”
사흘 동안 날마다 했다. 사흘째에 붓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닷새째에 아이가 절뚝이며 침상 사이를 걸었다.
오렐이 병실 명부에 적었다. 날짜마다. 「붓기 — 줄어듦.」 그리고 눈금 유리관으로 잰 열. 서른여덟 반, 서른여덟, 서른일곱 반.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오렐이 물었다.
루엔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섯째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식이 한 칸도 틀리면 안 됩니다. 틀리면 옆 박자가 섞입니다. 옆 박자는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하르트 학생만.”
“예. 그래서 이건 제가 있을 때만 됩니다.” 루엔이 병실 문간의 발 대야를 보았다. 스무 알 모래시계, 칠 할 술병, 모래 물통. “제가 없는 날에도 되는 게 먼저입니다. 그건 바꾸지 않겠습니다.”
오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칠 할 술병을 제자리에 도로 세웠다.
그날 밤 병실 산파가 오렐을 찾아왔다. 이튿날 새벽 해산할 집이 있다고 했다. 산파는 정화식 얘기를 들었다며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새벽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산파의 손을 칠 할 술로 닦는 법을 다시 보여 주었다. 손톱 밑까지. 스무 알.
“학생이 오면 더 좋지 않소.”
“제가 못 가는 새벽이 더 많습니다. 산파님 손은 새벽마다 갑니다.”
*
소문은 교구에 금방 돌았다.
그 학생이 빛으로 상처를 씻는다고. 신성광 같은 걸 쓴다고.
사흘 뒤 병실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앓는 사람보다 보러 온 사람이 많았다. 오렐이 허락해 몇이 병실 문간에서 지켜보았다. 루엔은 대장간 아이 무릎에 마지막으로 정화식을 썼다.
물막. 반 잔. 한 줄의 빛.
아무것도 빛나지 않았다.
물이 잠깐 무릎을 덮었다가 걷혔을 뿐이었다. 번쩍임도, 금빛도, 따뜻한 기운도. 대성당 기둥을 적시던 그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간에서 웅성거림이 났다.
“뭐야. 안 빛나잖아.”
“신성광이라며.”
“물만 끼얹었네.”
한 아낙이 실망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 뒤 사람도.
오렐이 문간으로 걸어갔다. 소매를 걷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섰다.
“빛나지 않는 것이,” 오렐이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기도 끝말처럼 급하지도 않았다. “정결의 표시입니다.”
사람들이 멈췄다.
“빛나는 것은 넘치는 것입니다. 넘치는 것은 새는 것입니다. 정결한 것은 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나지 않습니다.”
오렐은 그 말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말하지 않았다. 경전 어느 권 어느 장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참 서 있다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던 아낙이 다시 돌아왔다.
루엔은 병실 안에서 그 말을 들었다.
빛나는 것은 새는 것이다. 여섯 살 때 켜지지 않는 라이트 앞에서 사흘을 끙끙대고 찾은 답이었다. 그걸 오렐은 경전의 말투로 했다. 셈 없이. 그런데 틀리지 않았다.
루엔은 수첩을 폈다.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적었다.
「빛나지 않는 것이 정결의 표시입니다. — 오렐 바스. 열여섯 봄.」
그리고 그 아래 작게.
「내가 한 말보다 낫다.」
그날 저녁 대장간 아이가 병실을 나갔다. 걸어서. 문간에서 발 대야를 발로 기울이고, 스무 알까지 손을 씻었다. 끝까지.
봉화는 한 가지밖에 말하지 못했다.왔다.불이 오르면 적이 왔다는 뜻이었다. 몇이 왔는지, 어디로 왔는지, 기병인지 보병인지는 싣지 못했다. 그걸 알려면 봉화대 옆에서 말 탄 전령이 따로 달려야 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전령은 말을 갈아타며 이틀. 봄 싸움이 시작되면 이틀은 너무 길었다.루엔은 하르트령 망루 둘 사이에서 거울 신호를 처음 해 본 게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형이 보낸 첫 신호가 「대충 잘 지냄」이었다. 그때는 망루 둘, 거리 이십 리, 주고받는 사람도 둘이었다.이번엔 본진에서 왕도까지였다.*루엔은 점과 선 그림을 다시 폈다.이번엔 길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점으로 찍었다. 황색탑 측량 기록에서 높은 곳만 골랐다. 한 점에서 다음 점이 보이는지. 보이면 선을 그었다. 산이 가리면 긋지 않았다.그다음은 셈이었다.탑을 촘촘히 세우면 탑 사이가 가까워 흐린 날에도 잘 보인다. 대신 탑이 많아진다. 신호 하나가 탑마다 한 번씩 받아 적히고 다시 쏘아진다. 탑이 많을수록 그 받아 쏘는 시간이 쌓인다.탑을 드문드문 세우면 빠르다. 대신 흐린 날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멈춘다.루엔은 날씨 기록을 모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본진에 온 날부터 날마다 적은 반년 치, 그리고 하르트령 망루 둘이 몇 해 동안 적어 둔 것. 맑은 날, 흐린 날, 안개 낀 아침. 흐린 날에 거울 빛이 몇 리까지 보였는지 망루 둘로 재어 둔 값이 있었다. 이십오 리까지는 흐린 날에도 대개 보였다. 삼십 리가 넘으면 열흘에 사흘은 안 보였다.“이십 리 안팎으로 세웁니다.” 루엔이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탑 열여섯. 한 탑에서 받아 적고 다시 쏘는 데 작은 모래시계 네 번. 열여섯이면 예순네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습니다.”“한 시간.&rdqu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