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알림은 대성당 문에 붙었다.
「한낮, 대성당 광장. 신성광으로 병을 태운다. 앓는 이는 누구든 오라. 헌금 없음. — 백색탑 율리안 모어.」
오렐이 그걸 베껴 와 루엔에게 내밀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헌금 없음.” 루엔이 그 줄을 읽었다.
“백색탑이 헌금을 받지 않는 건 처음입니다.” 오렐이 말했다. “병실 소문 때문입니다. 빛으로 상처를 씻는다는.”
“율리안 모어는 누구입니까.”
“젊은 마법사입니다. 셋째 고리 사제로 들어와서 올해 다섯째 고리를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착실한 사람입니다. 대성당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는.” 오렐이 잠깐 말을 멈췄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루엔은 알림을 다시 보았다. 병을 태운다.
“빛으로 병을 태우려면 박자를 골라야 합니다.”
“그분도 아시겠지요.”
“모르시면 어떻게 됩니까.”
오렐은 대답하지 못했다.
*
한낮은 수업 시간이었다.
헤일로크의 영창학. 루엔은 창밖 해를 보고 있었다. 해가 가장 높이 올랐다. 게릭의 한낮 종이 울렸다. 이제는 그림자가 금에 닿고 맥박 열 안쪽에서 울렸다.
종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강의실 문이 열렸다. 테오였다. 숨이 차 있었다.
“광장. 사람 엄청 많아.”
루엔은 헤일로크를 보았다. 헤일로크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대성당 쪽 하늘이 이상하게 밝았다.
“가게.”
*
대성당 광장에 이백 명이 넘게 모여 있었다.
앓는 사람, 앓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 구경 온 사람. 광장 한가운데 나무 단 위에 흰 옷의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말랐다. 앳된 얼굴이었다. 소매가 손등까지 덮었다.
율리안 모어가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빛이 쏟아졌다.
신성광이었다. 그런데 루엔이 본 어떤 신성광과도 달랐다. 금빛이 아니었다. 너무 희었다. 흰빛 끝에 푸른 기가 돌았다. 눈이 시렸다. 한낮 해 아래서도 광장 돌바닥에 그림자가 하나 더 생길 만큼 밝았다.
“눈을 드십시오!” 율리안의 목소리가 높고 떨렸다. “빛을 받으십시오! 얼굴에, 눈에, 살갗에! 병이 타서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들었다. 눈을 떴다. 아이들을 번쩍 들어 빛 쪽으로 향했다.
루엔은 허리 주머니에서 녹임돌 조각을 꺼냈다. 두 손으로 감싸 그늘을 만들고 그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돌이 빛나고 있었다. 푸르스름하게. 창고 벽의 가는 줄보다 훨씬 밝게.
보라 너머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 줄이 아니었다. 넓게. 눈밭 장님을 만드는 박자까지.
“눈을 감으십시오!”
루엔이 외쳤다. 목소리가 광장 소음에 묻혔다. 한 번 더. 더 크게.
“눈을 감으십시오! 얼굴을 가리십시오!”
몇 사람이 돌아보았다. 대부분은 돌아보지 않았다.
테오가 루엔 옆에서 두 손을 입에 모았다.
“눈 감아요! 다들 눈 감아! 저 빛 보면 눈 멀어요!”
테오의 목소리는 루엔보다 컸다. 그리고 루엔보다 무서웠다. 사람들이 움찔했다. 앞줄 어머니 하나가 아이 얼굴을 제 가슴에 묻었다. 그 옆도. 그 뒤도.
단 위의 율리안이 그 소리를 들었다. 팔을 벌린 채 광장 끝을 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빛이 모래시계 반 번쯤 더 이어졌다. 그리고 꺼졌다.
광장에 박수가 터졌다. 앞줄에서는 누군가 울었다. 감사해서였다.
율리안이 팔을 내렸다. 이마에 땀이 번들거렸다. 그는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처음 느낀 얼굴이었다. 박수 소리가 그 얼굴을 덮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직은.
*
해 질 녘에 오렐의 병실 문이 처음 두드려졌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였다. 아이가 울고 있었다.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눈에 모래가 들어갔대요. 계속. 씻어도.”
루엔은 아이의 눈을 보았다. 흰자가 붉었다. 눈꺼풀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밭 장님이었다. 한여름에.
두 번째 문 두드림은 모래시계 한 번 뒤였다. 세 번째는 곧바로. 그다음부터는 셀 수 없이. 해가 지자 병실 문 앞에 줄이 섰다. 다들 눈을 감거나 가리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를 잡고.
“몇 명이야.” 테오가 물었다.
루엔은 셌다. 셀 수 있었다. 세야 했다.
“지금 스물아홉. 더 옵니다.”
*
병실 침상은 열둘이었다. 모자랐다. 오렐이 성당 회랑을 열었다. 돌바닥에 짚을 깔았다.
루엔은 세 가지를 정했다.
“어둡게. 창을 다 가리십시오. 빛이 눈을 더 아프게 합니다.”
테오와 교구 사람들이 담요로 창을 막았다. 회랑이 캄캄해졌다. 촛불 하나만 멀리.
“차갑게. 끓여 식힌 물에 천을 적셔 눈 위에 얹으십시오. 미지근해지면 바꾸십시오.”
부엌 아낙들이 물을 끓여 우물에 식혔다. 천이 모자라 오렐이 제 여벌 사제복을 찢었다.
“비비지 않게. 아이들 손을 잡아 주십시오. 비비면 더 다칩니다.”
어머니들이 아이 손을 잡았다. 아이들이 울었다. 비비고 싶어서.
클라리사가 달려왔다. 장부 대신 끓인 물 동이를 들고. 누가 불렀는지 묻지 않았다.
루엔은 줄 선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사는 골목, 문 번호. 두 해 전 봄에 분필로 붙인 번호를, 분필이 지워진 뒤에도 숯으로 덧그어 둔 집이 많았다. 몇 살. 광장 어디쯤 서 있었는지. 빛을 얼마나 오래 보았는지.
앞줄에 서서 오래 본 사람이 가장 심했다. 테오가 외친 뒤 눈을 감은 사람은 덜했다. 아이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아이는 멀쩡했다. 어머니의 목덜미가 붉었다.
한밤중에 셈이 끝났다.
“예순셋.” 루엔이 말했다.
“다 낫는 거야?” 테오가 물었다. 목소리가 쉬었다.
“눈은 하루 이틀이면 가라앉습니다. 사냥꾼들도 그랬습니다. 살갗은 며칠 뒤에 벗겨지고, 그다음에 낫습니다.”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테오가 회랑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캄캄한 데서 아이 하나가 울었다. 어머니가 달랬다. 눈 뜨지 마, 뜨지 마.
“그 사람도 병 고치려고 한 거잖아.” 테오가 작게 말했다. “헌금도 안 받고.”
“예.”
“근데 왜.”
루엔은 캄캄한 회랑을 보았다. 예순셋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쥐고.
“넓었습니다. 박자를 하나로 고르지 않았습니다. 병을 태우는 박자 옆에 눈을 태우는 박자가 붙어 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 차이입니다.” 루엔은 종이를 접었다. “그래서 정확해야 합니다.”
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나 물 동이를 들고 다시 회랑 안쪽으로 갔다.
*
새벽녘에 회랑 문이 열렸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말랐다.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한 손으로 문설주를 짚고,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율리안 모어였다.
오렐이 먼저 알아보았다. 한 걸음 나섰다가 멈췄다. 회랑에 누운 사람 몇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가린 채로도 목소리는 알아들었다. 광장에서 「눈을 드십시오」라고 외친 목소리.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율리안이 가린 손을 내렸다. 그의 눈도 붉었다. 부어 있었다. 단 위에서 가장 가까이 빛을 받은 사람이었다.
“제가 한 겁니까.”
누구에게 묻는지 몰랐다. 캄캄한 회랑에 대고 물었다.
루엔이 대답했다.
“예.”
율리안은 한참 서 있었다. 달아날 것 같았다. 문은 등 뒤에 있었다. 그런데 달아나지 않았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루엔은 물 동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회랑 맨 안쪽,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 자리를. 늦게 온 할머니 하나가 혼자 누워 있었다. 눈 위의 천이 말라 있었다.
율리안은 그쪽으로 갔다. 부은 눈으로 더듬으며.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의 마른 천을 걷고, 물에 적셔 다시 얹었다. 할머니가 신음했다. 율리안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비비지 못하게.
루엔은 멀리서 보았다.
율리안은 해가 뜰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천이 미지근해지면 바꾸었다. 끓여 식힌 물로 할머니의 눈가를 씻었다. 제 눈이 따가워 눈물이 흐르면 소매로 닦고 다시 씻었다. 소매가 젖어 손등에 붙었다.
해가 담요 틈으로 들어왔을 때, 할머니가 처음으로 잠이 들었다.
율리안은 그제야 벽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기도인지 셈인지 루엔은 알 수 없었다.
*
이튿날 저녁, 예순셋 가운데 쉰여덟이 눈을 떴다. 붓기가 빠졌다. 사흘째엔 모두.
나흘째부터 살갗이 벗겨졌다. 얼굴, 목, 팔뚝. 햇볕에 그을린 뒤처럼 얇게 일어나 떨어졌다. 아이들이 서로의 뺨에서 껍질을 떼며 웃었다. 어머니들이 손을 쳐냈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나흘째 오후에 교구장이 회랑에 왔다.
담요로 가린 창, 짚을 깐 돌바닥, 찢어진 여벌 사제복으로 만든 천 뭉치. 교구장은 그것들을 하나씩 보았다. 두 해 전 봄에 지도를 볼 때처럼 끝까지.
오렐이 곁에 섰다. 소매를 걷은 채였다. 이번엔 내리지 않았다.
“백색탑에서 말이 왔다.” 교구장이 말했다. “광장의 일은 이단의 빛을 흉내 내다 받은 벌이라고. 흉내 낸 쪽이 아니라 흉내 내게 만든 쪽을 살피겠다고.”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구 심사 첫 질의를 이달 그믐으로 잡았다. 성하께서 직접 오신다.” 교구장이 루엔을 보았다. “그 명부를 가져오너라. 예순셋.”
“예.”
“그리고 오렐.” 교구장이 오렐의 걷은 소매를 보았다. “네 여벌 옷은 교구가 새로 해 주마. 찢은 것은 적어 두어라. 어디에 썼는지.”
오렐이 고개를 숙였다. 교구장은 회랑을 나가다가 문간 발 대야 앞에서 멈췄다.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물통을 발로 기울였다.
스무 알. 교구장은 제 입술로 셌다.
루엔은 병실 명부 맨 끝에 표를 붙였다. 예순셋. 광장 앞줄, 가운데, 뒷줄. 눈을 감은 때. 가라앉은 날. 벗겨진 날.
그리고 맨 아래 한 줄.
「광장 둘레 이백 넘음. 앓은 이 예순셋. 죽은 이 영. — 테오 마일스가 외친 뒤 눈 감은 사람은 덜함.」
테오가 그 줄을 어깨너머로 읽었다.
“내 이름은 왜 적어.”
“테오가 외치지 않았으면 예순셋이 아니었습니다.”
테오는 한참 그 숫자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루엔의 어깨를 한 번 쳤다. 세게.
율리안 모어는 사흘째 아침에 회랑을 나갔다. 나가기 전에 문간 발 대야에서 손을 씻었다. 스무 알. 끝까지. 누가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대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부은 눈으로. 곧게.
봉화는 한 가지밖에 말하지 못했다.왔다.불이 오르면 적이 왔다는 뜻이었다. 몇이 왔는지, 어디로 왔는지, 기병인지 보병인지는 싣지 못했다. 그걸 알려면 봉화대 옆에서 말 탄 전령이 따로 달려야 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전령은 말을 갈아타며 이틀. 봄 싸움이 시작되면 이틀은 너무 길었다.루엔은 하르트령 망루 둘 사이에서 거울 신호를 처음 해 본 게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형이 보낸 첫 신호가 「대충 잘 지냄」이었다. 그때는 망루 둘, 거리 이십 리, 주고받는 사람도 둘이었다.이번엔 본진에서 왕도까지였다.*루엔은 점과 선 그림을 다시 폈다.이번엔 길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점으로 찍었다. 황색탑 측량 기록에서 높은 곳만 골랐다. 한 점에서 다음 점이 보이는지. 보이면 선을 그었다. 산이 가리면 긋지 않았다.그다음은 셈이었다.탑을 촘촘히 세우면 탑 사이가 가까워 흐린 날에도 잘 보인다. 대신 탑이 많아진다. 신호 하나가 탑마다 한 번씩 받아 적히고 다시 쏘아진다. 탑이 많을수록 그 받아 쏘는 시간이 쌓인다.탑을 드문드문 세우면 빠르다. 대신 흐린 날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멈춘다.루엔은 날씨 기록을 모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본진에 온 날부터 날마다 적은 반년 치, 그리고 하르트령 망루 둘이 몇 해 동안 적어 둔 것. 맑은 날, 흐린 날, 안개 낀 아침. 흐린 날에 거울 빛이 몇 리까지 보였는지 망루 둘로 재어 둔 값이 있었다. 이십오 리까지는 흐린 날에도 대개 보였다. 삼십 리가 넘으면 열흘에 사흘은 안 보였다.“이십 리 안팎으로 세웁니다.” 루엔이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탑 열여섯. 한 탑에서 받아 적고 다시 쏘는 데 작은 모래시계 네 번. 열여섯이면 예순네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습니다.”“한 시간.&rdqu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