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루엔의 수첩에는 네 해 가까이 지우지 않은 줄이 하나 있었다.
「사서님: 가까운 글씨 흐림. 멀면 읽음.」
열한 살 초겨울, 지하 서고에 처음 빛을 끌어온 날 적은 줄이었다. 사서 오드리크는 햇빛 아래서도 작은 글씨를 팔 길이만큼 떼어 보았다. 팔이 모자라면 책을 탁자에 세우고 두 걸음 물러나 읽었다. 그래도 안 되는 글씨는 서기 학생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
그때 루엔은 까닭을 알았다. 눈 속의 유리가 늙어서 가까운 것에 초점을 못 맞추는 것. 볼록한 유리를 눈앞에 대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그때는 볼록한 유리를 눈앞에 대는 법을 몰랐다. 이 세계가.
이제는 루엔이 알았다. 공기로 원시와 근시를 수백 번 굳혀 본 뒤였다. 렌즈가 얼마나 휘면 어디서 빛이 모이는지 손끝이 기억했다.
*
유리 공방 「세 가마」는 강가 골목 끝에 있었다. 지난해 봄에 스무 알 모래시계를 구운 곳이었다.
주인 비브케 크람은 쉰 줄의 여자였다. 두 팔에 오래된 데인 자국이 얼룩처럼 흩어져 있었다. 목소리가 걸걸했다. 루엔이 들어서자 가마 앞에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스무 알 학생이군. 이번엔 몇 알?”
“알이 아닙니다. 볼록한 유리 두 알입니다.”
루엔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림이었다. 손톱보다 조금 큰 동그란 유리. 한쪽 면이 볼록하고 한쪽 면은 평평했다. 옆에 휘는 정도를 적은 숫자.
비브케가 그림을 보고, 처음으로 가마에서 몸을 돌렸다.
“읽는 돌이네.”
“읽는 돌이 무엇입니까.”
“수도원에서 가끔 주문하오. 반쪽 공처럼 볼록한 유리 덩이. 책 위에 올려놓고 굴리면 글씨가 커 보이지. 늙은 수사들이 쓰오.” 비브케가 그림을 톡톡 쳤다. “이건 그것보다 훨씬 얇고 작소. 이걸로 뭘 하오?”
“눈앞에 겁니다. 두 알. 양쪽 눈에 하나씩. 책 위가 아니라.”
비브케가 루엔을 한참 보았다.
“눈앞에.”
“예.”
“유리를.”
“예. 틀에 끼워서 코 위에 얹습니다.”
비브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마 불이 탁탁 튀었다. 그러다 걸걸하게 웃었다.
“읽는 돌을 이십 년 구웠소. 그걸 눈앞에 달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네.” 그녀가 그림을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누구 눈이오?”
*
누구 눈인지부터 재야 했다.
루엔은 오드리크를 도서관 창가에 앉혔다. 작은 글씨로 적힌 책 한 쪽을 한 뼘 반 앞에 세웠다. 오드리크가 가장 좋아하는 옛 연대기였다. 삼십 년 동안 끝까지 못 읽은 책이라고 했다.
루엔은 오드리크의 두 눈 앞에 공기 렌즈를 세웠다. 아주 약하게.
“읽히십니까.”
“아니. 흐려.”
조금 더 휘게.
“아직.”
조금 더.
오드리크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 굵은 글씨는 보이네.”
조금 더.
오드리크가 숨을 멈췄다.
“됐다. 됐어. 그만. 거기.”
루엔은 그 자리의 휘는 길이를 적었다. 두 눈이 조금 달랐다. 왼쪽이 조금 더 휘어야 했다. 그것도 적었다.
공기 렌즈를 거두자 글씨가 다시 흐려졌다. 오드리크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어린아이 같은 소리였다.
“이레만 기다려 주십시오.”
*
이레로는 모자랐다.
첫 두 알은 공방 견습이 손으로 갈았다. 가운데는 볼록했는데 가장자리 휘는 정도가 들쭉날쭉했다. 끼워서 대 보니 글씨 가운데만 맑고 둘레가 일그러졌다. 오드리크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지럽다고.
둘째 두 알은 더 조심해서 갈았다. 이번엔 한쪽 눈 것이 너무 휘었다. 비브케가 제 손으로 다시 갈았다. 이번엔 너무 덜 휘었다.
루엔은 망가진 유리 여섯 알을 탁자에 늘어놓고 오래 보았다.
손으로 갈면 사람 손 모양이 된다. 공의 겉 모양이 되어야 했다. 어디를 만져도 같은 만큼 휜 면.
“틀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틀?”
“쇠로 된 오목한 그릇입니다. 공의 겉을 안에서 본 모양. 그 그릇 안에 유리를 대고 모래를 넣어 돌리면서 갈면, 유리가 그릇 모양대로 됩니다. 어디를 갈아도 같은 만큼 휩니다.”
원을 한 바퀴 돌리면 공의 겉이 된다. 지난해 봄 수첩에 적은 줄이었다. 루엔은 대장간에서 컴퍼스 팔을 길게 늘인 끌개를 만들게 했다. 한쪽 끝을 박고 한 바퀴 돌리면 쇠 그릇 안쪽이 공의 겉 모양으로 파였다. 휘는 길이마다 그릇이 하나씩.
오드리크 두 눈에 맞는 그릇 둘을 먼저 만들었다. 열하루가 걸렸다.
셋째 두 알은 그릇에서 갈았다. 비브케가 모래를 넣고 한나절을 돌렸다.
대 보았다. 가운데도 둘레도 맑았다.
*
틀은 쇠뿔로 만들었다. 둥근 테 두 개를 가는 다리로 잇고, 그 다리가 코에 얹히게 했다. 비브케가 뿔을 휘고 루엔이 코 높이를 쟀다.
도서관 창가. 늦은 오후.
오드리크는 두 손으로 틀을 받았다. 무게를 가늠하듯 한참 들고 있었다. 그리고 루엔이 가르쳐 준 대로 코 위에 얹었다.
옛 연대기를 한 뼘 반 앞에 들었다.
오드리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줄을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둘째 줄. 셋째 줄. 손가락이 글씨 아래를 따라갔다.
그러다 멈췄다.
어깨가 떨렸다.
오드리크는 책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틀을 벗지 않았다.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늙은 사람의, 오래 참은 울음이었다.
루엔은 창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셈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한참 뒤 오드리크가 손을 내렸다. 틀 아래 눈이 젖어 있었다.
“삼십 년.” 오드리크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삼십 년 동안 이 책 마흔한째 쪽에서 멈춰 있었다. 글씨가 작아져서. 필경사가 거기서부터 종이를 아끼느라 작게 썼거든.”
“이제 끝까지 읽으실 수 있습니다.”
“마흔한째 쪽 첫 줄이 뭔지 아나.” 오드리크가 책을 다시 들었다. 틀 너머로 읽었다. 천천히. “‘그해 봄, 눈은 늦게 녹았고 사서는 새 등불을 얻었다.’”
오드리크가 웃었다. 울면서.
“삼십 년 동안 궁금했던 게 그거였다니.”
*
소문은 사흘 만에 강가 골목을 다 돌았다.
나흘째 아침, 세 가마 공방 앞에 줄이 섰다.
맨 앞은 바늘을 놓은 지 여덟 해 된 바느질 할머니였다. 그 뒤에 손이 떨려서가 아니라 눈이 흐려서 일을 접은 금세공 장인. 그 뒤에 교구 필경사 둘. 그 뒤에 제 아버지를 모시고 온 가죽 장인. 줄은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비브케가 공방 문간에 서서 줄을 보다가 루엔을 돌아보았다.
“눈마다 다 다를 거 아니오.”
“다 다릅니다.”
“그럼 저 사람들 하나하나 사서처럼 공기로 재 줄 거요? 학생 혼자?”
루엔은 줄을 세어 보았다. 서른일곱 명. 한 사람에 모래시계 두 번. 그리고 내일은 더 올 것이었다.
“아닙니다.”
루엔은 그날 공방 탁자에서 표를 짰다.
쇠 그릇의 휘는 길이를 다섯 가지로 정했다. 세 뼘 앞에서 빛이 모이는 것부터 한 뼘 앞에서 모이는 것까지, 반 뼘씩 건너뛰며 번호를 매겼다. 세 뼘짜리가 가장 약한 일번, 한 뼘짜리가 가장 센 오번. 빛이 가까이 모일수록 세게 휜 유리였다. 번호마다 쇠 그릇 하나. 번호마다 시험용 유리 한 쌍.
그리고 공방 벽에 널빤지를 세웠다. 한 뼘 반 앞에서 보게. 널빤지에는 굵기가 다른 실을 가로로 여러 줄 붙였다. 글 모르는 사람도 볼 수 있게. 가장 가는 실이 보이면 된 것이었다.
“일번부터 대 보십시오. 가는 실이 보이는 번호에서 멈추십시오. 두 눈이 다르면 따로.”
바느질 할머니가 일번을 댔다. 고개를 저었다. 이번. 고개를 저었다. 삼번.
할머니가 입을 벌렸다. 널빤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가장 가는 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게 실이었어? 난 금 그은 줄 알았는데.”
비브케가 장부에 적었다. 바느질 할머니, 두 눈 삼번.
해 질 때까지 서른일곱 명이 번호를 받았다. 삼번이 가장 많았다. 오번은 둘뿐이었다. 둘 다 일흔이 넘었다.
*
값은 비브케가 정했다. 한 벌에 은화 여섯 닢. 쇠뿔 틀까지. 싸지 않았다. 그래도 줄은 줄지 않았다. 여덟 해 동안 못 한 바느질 삯이 여섯 닢보다 많았다.
“학생 몫은.”
루엔은 그 물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몫이 없어도 됩니다.”
“안 되오.” 비브케가 장부를 탁 덮었다. “쇠 그릇은 학생이 셈했고, 번호도 학생이 정했소. 그릇이 없으면 우리는 여섯 알을 버리고 한 알 건지오. 공방이 셈 값을 안 내면 공방이 도둑이오.”
비브케는 장부 귀퉁이에 적었다. 한 벌마다 동화 여섯 닢. 은화 여섯 닢의 열두 몫 가운데 하나.
루엔은 그 숫자를 보았다. 동화 여섯 닢.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만 썼다. 한 해 금화 두 닢. 그 장부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칸이 생겼다.
그날 밤 루엔은 생활비 장부에 새 줄을 그었다. 들어온 것. 세 가마 공방, 안경 서른일곱 벌 주문, 벌마다 동화 여섯, 합 동화 이백스물둘. 아직 받지 않았으니 「받을 것」 칸에.
안경. 루엔이 그렇게 불렀다. 비브케는 처음에 「눈 유리」라고 불렀다가 사흘 만에 루엔 말을 따랐다. 짧아서 좋다고 했다.
클라리사가 그 장부를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검산했다. 맞았다. 그래서 더 말이 없었다.
*
이튿날 아침, 도서관 문을 연 서기 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루엔이 달려갔다.
도서관 앞 탁자 위에 연체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오드리크가 서기 학생들에게 읽어 달라고 하던 장부. 이름이 흐려 반쯤 방치된 장부.
전부 정리돼 있었다.
책마다 빌려 간 사람, 날짜, 연체한 날 수. 오드리크의 글씨로. 작고 반듯하게. 서른 해 치.
오드리크는 탁자 끝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틀을 코에 얹은 채. 촛대 셋이 밑동까지 타 있었다.
서기 학생이 루엔에게 속삭였다.
“밤새 읽으셨나 봐요.”
루엔은 장부 맨 마지막 줄을 보았다. 연체한 사람 이름 가운데 아는 이름이 있었다.
헤일로크. 스물두 해 연체.
루엔은 그걸 셈해 보다가, 교수에게 알리는 일은 오드리크에게 맡기기로 했다.
봉화는 한 가지밖에 말하지 못했다.왔다.불이 오르면 적이 왔다는 뜻이었다. 몇이 왔는지, 어디로 왔는지, 기병인지 보병인지는 싣지 못했다. 그걸 알려면 봉화대 옆에서 말 탄 전령이 따로 달려야 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전령은 말을 갈아타며 이틀. 봄 싸움이 시작되면 이틀은 너무 길었다.루엔은 하르트령 망루 둘 사이에서 거울 신호를 처음 해 본 게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형이 보낸 첫 신호가 「대충 잘 지냄」이었다. 그때는 망루 둘, 거리 이십 리, 주고받는 사람도 둘이었다.이번엔 본진에서 왕도까지였다.*루엔은 점과 선 그림을 다시 폈다.이번엔 길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점으로 찍었다. 황색탑 측량 기록에서 높은 곳만 골랐다. 한 점에서 다음 점이 보이는지. 보이면 선을 그었다. 산이 가리면 긋지 않았다.그다음은 셈이었다.탑을 촘촘히 세우면 탑 사이가 가까워 흐린 날에도 잘 보인다. 대신 탑이 많아진다. 신호 하나가 탑마다 한 번씩 받아 적히고 다시 쏘아진다. 탑이 많을수록 그 받아 쏘는 시간이 쌓인다.탑을 드문드문 세우면 빠르다. 대신 흐린 날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멈춘다.루엔은 날씨 기록을 모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본진에 온 날부터 날마다 적은 반년 치, 그리고 하르트령 망루 둘이 몇 해 동안 적어 둔 것. 맑은 날, 흐린 날, 안개 낀 아침. 흐린 날에 거울 빛이 몇 리까지 보였는지 망루 둘로 재어 둔 값이 있었다. 이십오 리까지는 흐린 날에도 대개 보였다. 삼십 리가 넘으면 열흘에 사흘은 안 보였다.“이십 리 안팎으로 세웁니다.” 루엔이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탑 열여섯. 한 탑에서 받아 적고 다시 쏘는 데 작은 모래시계 네 번. 열여섯이면 예순네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습니다.”“한 시간.&rdqu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