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파비오 슈틸은 이레 뒤에 기숙사로 왔다.
혼자였다. 허리에 공책을 차고, 오른손에 열쇠 하나를 쥐고. 사감 이르마 뮐이 황색탑 여섯째 고리 마법사를 복도에 세워 두고 한참 어쩔 줄 몰랐다.
“그 기록 말입니다.” 파비오가 루엔에게 말했다. 인사도 없이. “한 사람이 적은 것.”
“예.”
“제가 적었습니다.”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이레 전 들것이 나간 뒤 원진 곁에서 공책을 쥐고 있던 손을 보았다.
“보여 주시겠습니까.”
파비오는 열쇠를 내밀었다.
“황색탑 사무소 뒤 창고입니다. 열 해 치. 탑 어른들은 난류가 제멋대로가 아니면 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입을 닫았습니다.” 파비오가 잠깐 말을 멈췄다. “적는 건 안 닫았습니다.”
*
황색탑 사무소 뒤 창고는 먼지 냄새가 났다.
벽 쪽에 나무 상자가 셋 쌓여 있었다. 황색탑 서기 둘이 상자를 끌어냈다. 뚜껑에 먼지가 손가락 한 마디 두께로 앉아 있었다. 서기 하나가 입으로 불었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둘이 한참 기침을 했다.
상자 안에 공책이 가득했다. 파비오가 허리에 찬 것과 같은 공책. 가죽 끈으로 묶은. 권마다 등에 해가 적혀 있었다.
루엔은 첫 권을 폈다.
한 줄에 한 번. 날짜. 떠난 곳, 닿은 곳. 탑 측량 기록으로 본 거리. 옮긴 것. 그리고 끝에 두 칸.
「튕긴 쪽.」 「몇 걸음.」
가끔 한 칸이 더 있었다. 「다친 사람.」
글씨가 작고 곧았다. 첫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루엔은 권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어떤 줄은 여백에 짧은 말이 있었다.
「몸이 뜨듯 가벼웠다.」
「발이 땅에 박혔다.」
“이것도 적으셨습니까.”
“몸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파비오가 말했다. “숫자로 적을 수 없어서 말로 적었습니다.”
“숫자로 적을 수 없는 것도 적는 게 맞습니다.”
파비오가 루엔을 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
루엔은 클라리사를 불렀다. 셈이 많았다.
셋이서 창고 바닥에 앉았다. 파비오의 공책은 모두 이백마흔세 줄이었다. 열 해 동안의 먼 텔레포트.
“어떻게 나눌까.” 클라리사가 물었다. 산가지 주머니를 벌써 풀어 놓고 있었다.
“가는 쪽으로 나눕니다. 북, 남, 동, 서. 그 사이는 가까운 쪽에.”
“파비오 님은 어떻게 나눠 두셨어요?”
“닿은 곳으로 나눴습니다.” 파비오가 말했다. “케른바흐에서 아스테른, 아스테른에서 비르케 항. 길마다.”
“그러면 같은 길만 모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길이 다르면 튕긴 쪽이 다르다는 것까지는 보입니다. 왜 다른지는 안 보입니다. 가는 쪽으로 모으면 다른 길끼리 견줄 수 있습니다.”
파비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루엔 곁에 앉아 공책을 펴 들었다. 제 글씨를 제가 읽어 주었다. 루엔이 적고 클라리사가 산가지로 셌다.
해가 기울 때까지 셌다.
클라리사가 마지막 산가지를 놓았다.
“북쪽으로 간 것 쉰여덟. 그중 튕긴 쪽이 적힌 게 쉰다섯. 쉰넷이 해 뜨는 쪽. 하나가 해 지는 쪽.”
루엔은 그 하나를 찾아 달라고 했다. 넷째 해 가을, 케른바흐에서 아스테른. 북쪽으로 온 길이었다. 튕긴 쪽, 해 지는 쪽.
파비오가 공책을 받아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앞 줄과 뒤 줄도 보았다.
“거꾸로 적었습니다.” 파비오가 말했다. “그날은 아스테른에서 케른바흐로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와서 공책을 품에 넣었다가 밤에 몰아 적었습니다.”
그는 품에서 펜을 꺼내 그 줄 옆에 작게 적었다. 「떠난 곳·닿은 곳 바뀜. 열 해 뒤 고침. — 파비오 슈틸.」
“그럼 남쪽으로 간 거네요.” 클라리사가 산가지 하나를 옮겼다. “북쪽 쉰다섯이 쉰넷, 다 해 뜨는 쪽. 남쪽에 하나 더.”
루엔은 파비오가 적은 작은 글씨를 보았다. 스스로 틀린 곳을 적은 글씨였다. 공책의 다른 줄들과 똑같이 곧았다.
“남쪽.”
“마흔아홉에 하나 더해 쉰. 적힌 게 마흔일곱. 마흔일곱 다 해 지는 쪽.”
“동쪽.”
“쉰하나. 적힌 게 마흔일곱. 다 남쪽. 그리고 여백에 ‘가볍다’가 서른여덟 번.”
“서쪽.”
“여든다섯. 적힌 게 예순넷. 다 북쪽. 여백에 ‘무겁다’, ‘박혔다’가 쉰둘.”
창고가 조용했다.
루엔은 지난해 여름의 표를 꺼내 공책들 옆에 놓았다. 학교에서 언덕으로, 북쪽. 해 뜨는 쪽. 언덕에서 학교로, 남쪽. 해 지는 쪽. 방앗간 언덕, 서쪽. 북쪽, 발이 무겁게.
세 리의 반 발짝과 이백 리의 튕김이 같은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류라면,” 루엔이 말했다. “이백 번을 넘게 가면 적어도 몇 번은 다른 쪽으로 튀어야 합니다. 강물 소용돌이는 제멋대로입니다. 이건 가는 쪽이 정해지면 튕기는 쪽도 정해집니다. 한 번도 안 틀렸습니다.”
파비오는 공책을 무릎에 놓았다. 손이 공책 위에서 조금 떨렸다.
“저는 북쪽 길이 동쪽으로 튄다는 건 알았습니다.” 파비오가 천천히 말했다. “케른바흐에서 올 때마다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동쪽으로 가면 남쪽으로, 서쪽으로 가면 북쪽으로. 이렇게 한데 놓고 본 건 처음입니다.”
“다 적어 두셨습니다. 한데 놓은 건 오늘입니다.”
*
둘째 날은 거리로 나눴다.
같은 쪽으로 간 것끼리, 멀리 간 것과 가까이 간 것을 견주었다. 파비오의 「몇 걸음」 칸. 도착한 자리에서 튕겨 멈춘 자리까지.
백 리 남짓 간 것은 세 걸음 안팎.
이백 리 남짓은 열두 걸음 안팎.
삼백 리 남짓은 스물일곱 걸음 안팎.
루엔은 숫자를 밀랍판에 세로로 적었다. 거리가 두 배면 튕긴 걸음은 네 배. 세 배면 아홉 배.
“멀리 갈수록 셉니다.” 클라리사가 말했다.
“예. 그냥 세지는 게 아니라 곱으로 셉니다. 거리를 두 번 곱한 만큼.”
“그게 무슨 뜻이야.”
루엔은 조금 생각했다. 어떻게 말해야 셈을 모르는 사람도 알아들을지.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리면 굴러갑니다. 말이 두 배 빠르면 두 배 멀리 구르는 게 아니라 네 배 멀리 구릅니다. 빠르기를 두 번 곱한 만큼 미끄러집니다.” 루엔은 튕긴 걸음을 짚었다. “여기서도 그렇다면, 도착하는 사람은 도착하는 순간 어떤 빠르기를 들고 있는 겁니다. 그 빠르기는 먼 만큼 큽니다. 두 배 멀리 가면 두 배 빠르게.”
파비오가 고개를 들었다.
“도착하면 멈춰 있어야 합니다. 텔레포트는 떠날 때 선 그대로 닿습니다.”
“예. 떠날 때 선 그대로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런데 닿은 땅이 떠난 땅과 같게 서 있지 않다면요.”
파비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셈해 보는 얼굴이었다. 루엔도 더 말하지 않았다. 더 말할 셈이 없었다.
*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루엔은 오래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한 문장이 고개를 들었다. 칠판 앞에서도, 언덕에서도, 성당 기록 앞에서도 들었다 들어가던 문장. 이번엔 들어가지 않았다.
땅이 움직이고 있다면.
떠난 땅과 닿은 땅이 서로 다른 빠르기로 움직이고 있다면. 떠날 때 몸은 떠난 땅의 빠르기를 들고 간다. 닿으면 닿은 땅과 빠르기가 어긋난다. 그 어긋남만큼 튕긴다. 가까우면 어긋남이 작고, 멀면 크다.
북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면 북쪽으로, 그리고 발이 박히게. 동쪽으로 가면 몸이 뜨게.
루엔은 그 모든 줄을 머릿속에서 한 번 맞춰 보았다. 맞았다. 적어도 방향은.
그러나 루엔은 그 문장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방향이 맞는 것과 숫자가 맞는 것은 달랐다. 방향은 여러 까닭이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숫자는 하나만 그렸다. 땅이 움직인다면 얼마나 빠르게. 그 빠르기로 셈하면 이백칠십 리에서 몇 걸음 튕겨야 하는가. 그 숫자가 파비오의 공책과 맞아야 했다.
그러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했다.
두 곳이 남북으로 얼마나 떨어졌는지. 그건 북극성으로 잴 수 있었다. 청색탑 해도의 남북 칸처럼.
세상이 얼마나 큰지. 그건 열세 살 때 걸어서 잰 값이 있었다. 거칠었다. 그래도 있었다.
두 곳이 동서로 얼마나 떨어졌는지.
루엔은 걸음을 멈췄다.
청색탑 해도의 오른쪽 칸. 금이 하나도 없는 칸. 신의 영역.
“왜 서.” 테오가 뒤에서 부딪칠 뻔했다.
“동서를 모릅니다.”
“뭘?”
“케른바흐가 여기서 동쪽으로 몇 도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바다에서 모르는 걸 땅에서도 모릅니다.”
테오가 한참 루엔을 보았다.
“그거 알아야 돼?”
“그거 하나만 모릅니다.”
루엔은 수첩 맨 뒷장을 폈다. 「모르는 것」 칸. 지난해 여름부터 비어 있던 여덟째 줄. 뭘 모르는지 몰라서 적지 못한 줄.
이제는 뭘 모르는지 알았다.
「여덟. 동서.」
두 글자였다. 루엔은 그 두 글자를 오래 보았다. 모르는 게 두 글자로 줄어든 건 처음이었다.
*
사흘 뒤 황색탑 서기들이 공책 상자를 다시 창고에 넣으러 왔다.
이번엔 먼지를 털었다. 공책을 가지런히 꽂았다. 뚜껑을 닫기 전에 서기 하나가 맨 위 공책을 집어 들고 넘겨 보았다.
“이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옆의 서기가 끄덕였다. “십 년 동안 자리만 차지한다고 다들 치우자 그랬는데.”
창고 문간에 파비오가 서 있었다. 둘은 못 봤다.
“내가 적었다.”
서기 둘이 돌아보았다. 파비오는 문설주에 기대 있었다. 공책을 허리에 찬 채로.
그 얼굴을 루엔은 처음 보았다. 이레 동안 파비오는 늘 조용했다. 도착 마당에서도, 창고 바닥에서도. 무언가를 미안해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턱이 조금 들려 있었다. 입꼬리도.
“열 해 동안.” 파비오가 말했다. “한 줄도 안 빼고.”
서기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상자 뚜껑을 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파비오가 루엔 쪽으로 왔다. 허리의 공책을 풀어 루엔에게 내밀었다. 올해 것이었다. 맨 마지막 줄은 이레 전, 케른바흐에서 아스테른. 튕긴 쪽, 해 뜨는 쪽 조금 북. 스물두 걸음. 다친 사람, 쿠르트, 왼 다리.
그 아래 빈 줄이 하나 있었다.
“다음 줄은,” 파비오가 말했다. “다친 사람 칸을 비워 두고 싶습니다.”
“비워 두려면 동서가 필요합니다.”
“동서.” 파비오가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청색탑도 못 재는 걸.”
“예. 그래서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열 해 적은 사람한테 오래는 무섭지 않습니다.”
파비오는 공책을 도로 허리에 찼다. 그리고 처음으로, 루엔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돌아섰다. 걸음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절었다. 그래도 곧았다.
봉화는 한 가지밖에 말하지 못했다.왔다.불이 오르면 적이 왔다는 뜻이었다. 몇이 왔는지, 어디로 왔는지, 기병인지 보병인지는 싣지 못했다. 그걸 알려면 봉화대 옆에서 말 탄 전령이 따로 달려야 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전령은 말을 갈아타며 이틀. 봄 싸움이 시작되면 이틀은 너무 길었다.루엔은 하르트령 망루 둘 사이에서 거울 신호를 처음 해 본 게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형이 보낸 첫 신호가 「대충 잘 지냄」이었다. 그때는 망루 둘, 거리 이십 리, 주고받는 사람도 둘이었다.이번엔 본진에서 왕도까지였다.*루엔은 점과 선 그림을 다시 폈다.이번엔 길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점으로 찍었다. 황색탑 측량 기록에서 높은 곳만 골랐다. 한 점에서 다음 점이 보이는지. 보이면 선을 그었다. 산이 가리면 긋지 않았다.그다음은 셈이었다.탑을 촘촘히 세우면 탑 사이가 가까워 흐린 날에도 잘 보인다. 대신 탑이 많아진다. 신호 하나가 탑마다 한 번씩 받아 적히고 다시 쏘아진다. 탑이 많을수록 그 받아 쏘는 시간이 쌓인다.탑을 드문드문 세우면 빠르다. 대신 흐린 날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멈춘다.루엔은 날씨 기록을 모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본진에 온 날부터 날마다 적은 반년 치, 그리고 하르트령 망루 둘이 몇 해 동안 적어 둔 것. 맑은 날, 흐린 날, 안개 낀 아침. 흐린 날에 거울 빛이 몇 리까지 보였는지 망루 둘로 재어 둔 값이 있었다. 이십오 리까지는 흐린 날에도 대개 보였다. 삼십 리가 넘으면 열흘에 사흘은 안 보였다.“이십 리 안팎으로 세웁니다.” 루엔이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탑 열여섯. 한 탑에서 받아 적고 다시 쏘는 데 작은 모래시계 네 번. 열여섯이면 예순네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습니다.”“한 시간.&rdqu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