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물이 말했다. "끄겠습니다. 그대의 세상을." 불이 대답했다. "태우겠습니다. 그대의 세상을."
View More“정녕 저를 막을 작정이십니까?”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쥐고 있던 환도(環刀)를 천천히 뽑을 뿐이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바람이, 대지가, 마음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정지한 채로 살피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가.
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
어느 쪽이라도 상관 없었다. 결국 일은 저질러졌다. 결코 섞여서도, 결코 섞일수도 없는 둘이 이렇게 마주했으니 남은 것이라곤 이제 한쪽이 지고, 한쪽이 일어나는 일일 뿐.
스릉-
남자의 칼날이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광채를 뿜었다.
칼끝에 물방울과 서리가 맺혀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듯했다.
“끄겠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대의 세상을.”
남자의 목소리는 슬프나, 또한 담담하였다.
마치 정인(情人)을 떠나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잡고 싶으나 잡을 수 없고, 잡을 수 있다하나 잡아서는 안 되는 그런 정인을.
여자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고운 눈가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망울은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태우겠습니다.”
여자가 소매 밑으로 손을 뻗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담담하나, 또한 슬펐다.
“그대의 세상을.”
여자의 손끝에 붉은 불길이 일렁였다.
산과 들을, 사람을, 심장까지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 법한 불길이었다.
세종 10년.
1428년 7월 7일.
물과 불이, 그렇게 맞붙었다.
‘관청의 문서를 읽는 것은 처음인데.’천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건일지를 펼쳐들었다.고향에서 읽던 저열한 서적과는 달리, 좋은 먹물과 종이가 조합을 이룬 정갈한 자료가 한눈에 들어왔다.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지나칠 사안들마저 기록한 현장의 수기(手記)하며, 예상되는 재산상의 피해와 사후 대책까지 마련되어 있었다.어지간히 꼼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흉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기름이 발화하면서 중등품의 질그릇 4개와 상등품 3개가 박살이 났고, 그 중에서 고쳐서 쓸 수 있을 법한 것은 6할로 추정된다.’‘옆의 유기가게로 옮겨 붙은 불이 천막의 1할을 태웠고, 유기 가게상인이 경상을 입었다.’‘금화도감과 인력 여덟을 동원하여 화재 초기진압을 노렸다. 기름에 의한 화재라 물 대신 흙과 공기차단을 우선으로 두었다.’‘때가 이른 소낙비가 내려 불을 한꺼번에 진압하였다.’‘화재를 일으키고 도주한 범인의 인상착의를 형조에 넘겼다.’‘주요 참고인으로 간주된 1인을 금화도감에서 확보하여 자세한 내막을 조사할 예정.’기록을 살펴보던 천우는 ‘소낙비’라는 표현에 주목했다.때가 이른 소낙비가 내려 화재를 진압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청에 있는 사람들 눈에도 천우가 일으킨 신비는 희한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또한, 범인이라고 지목된 기록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얼른 그 곰보 왈패 놈을 체포해야 도둑맞은 기우사의 목걸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곰보 이 놈…….’한동안 잊고 있었던 곰보의 얼굴이 떠올랐다.워낙 바쁘게 돌아간 지난 이틀 사이에 곰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는데, 이렇게 다시 되뇌게 되니 끔찍하게 반가웠다.‘포청에도 들러야겠군.’흔한 장신구가 아니니 장물이나 암시장 같은 곳에서 발견됐을 수도 있고, 곰보가 이미 추포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어쨌거나 이포교가 얼른 돌아오고 볼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시간이 더디게 흐릴 것만 같았다.‘그나저나, 여기에 참고인이라고 표기된 사람이 직접 이 기록을 읽고 있을 경우가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한양 저자는 사람들과 물건들로 일찍이 북적이고 있었다.토목 공사 떠나는 인부들 먹이려는 가마솥 국밥이 펄펄 끓는가 하면, 또 어느 한쪽에서는 공중에 매달아놓은 아낙네들 장신구 따위가 쨍쨍- 소리를 내고 있었다.행인이 제법 있어 부득불 어깨를 접어야했다.이포교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천우를 한양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다 왔네. 우리 일터.”길이 넓게 퍼져있고, 주변 가옥들이 모두 지붕이 낮아 탁 트인 곳이었다.한성부 앞에 서 있었다.처음 여기 들어올 때는 끌려오다시피 한터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였지만, 다시 보니 널찍하고도 우뚝 솟은 벽이 단단한 요새를 방불케 하는 외관이었다.높게 위치한 누각 위며, 정문에도 장병기로 무장한 군사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이곳에서 한양의 많은 행정업무가 처리된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나랏일하는 곳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들어가세.”이포교가 앞장서며 말했다.정문을 지나 관청 안으로 들어간 그들을 곧장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일찍 등청한 관원들을 여럿 지나쳤고, 그중에 이포교를 알아본 몇몇과 짧게 인사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관옥이 하나 나왔다.금화도감이었다.다른 관옥에 비해 초라하다 할 만큼 작고 초라했으나, 현판에 쓰인 ‘禁火都監’이라는 네 글자 글귀만큼은 힘이 넘쳐보였다.&l
‘전해드릴 말이라도 있나? 오늘 돌아오신다면 내가 대신 말씀드리고.‘아닙니다, 딱히 그런 것은…….’‘그럼 조심히들 가시게.’그렇게 김초시와 수작을 마친 두 포교가 집을 나섰다.옆에 함께 걷던 이포교가 어찌나 풀이 죽어 있던지 천우가 되레 눈치를 보며 보폭을 맞출 정도였다.“저기, 음…….”천우가 어렵사리 말을 붙였다.“이포교. 자네 괜찮나?”“나 말일세.”이포교가 대뜸 대답했다.“어어, 얘기하게.”“나도 자네와 함께 저 집에서 식객으로 있을까보네.”“어?”“좋지 않은가? 포교끼리 한집에서 먹고 자고 하다보면 사이도 돈독해지고, 이래저래 부족한 부분도 채워줄 수 있을 터이고…….”“자네 진짜…….”천우가 기가 막혀 뒷말을 흐렸다.“어리 그 여인에게 홀딱 빠졌군.”“티 났나?”이포교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혹여 어리가 품속에 안아주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당연하지, 이 친구야.&rd
“일어나게, 이 친구야!”꿈결 속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였다.천우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조금씩 눈을 떴다.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찾아들고 있었다.밤새 타오른 군불 때문인지 누워있던 방안 공기가 제법 후끈했다.“언제까지 누워 있을건가? 일어나라니까.”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포교였다.이포교가 옆자리를 치우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구수한 밥 냄새가 방안에 그득하다 싶었는데, 언제 내왔는지 두 사람 몫의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쌀과 콩을 섞은 밥과 간장으로 간을 한 나물 반찬이 정갈하게 놓여있고, 김이 모락모락 솟는 된장국에는 두부까지 들어 있었다.“웬 밥상인가?”천우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포교는 방금 전에 김초시가 들고 온 것이라며, 식기 전에 한술 뜰 것을 권했다.“대감마님께서 특별히 잘 챙겨주라 하셨다는군.”“대감마님이?”“그래. 오랜만에 온 손님인데 절대 배곯게 할 수 없다고 그러셨다네. 지금은 집에 있는 게 없어서 이 정도이지, 밤에는 갈비짝이라도 내온다 하셨다더군. 내가 예전에 여기 머물 때 보다 훨씬 씀씀이가 커지셨어. 자넨 정말 내 덕에 복 받은 줄 알게.”“이 빚은 꼭 갚겠네.”“웃자고 한 얘기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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