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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크레용 소원
전다은은 서희주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합의서 내용도 그녀에게 최대한 유리하도록 작성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서희주가 입을 열었다.

“이 부분 수정해 줘. 그 사람 회사 지분은 안 받을래.”

전다은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너 바보야? 이혼하는 마당에 무슨 자존심을 세워! 설도 테크 지금 완전 잘 나가잖아. 상장만 하면 주식이 수백 배로 뛸 텐데. 네가 평소에 돈 욕심 없는 건 알지만, 여기 네 피땀 눈물 다 들어갔어. 근데 왜 그냥 포기해? 그 개자식 좋은 일만 시키게?”

서희주의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어차피 상장 못해. 주식이 돈이 되기는커녕 곧 빚더미로 변할 거야.”

서희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냉철했다.

“그리고 내가 지분을 요구하면 차도윤이 순순히 주지도 않을 거야. 결국 이혼 소송까지 가야 할 텐데, 난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거든.”

전다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엔 동감이었다.

차도윤이 지분 절반을 내줄 리 없으니, 결국 지루한 진흙탕 싸움이 될 게 뻔했다.

다만 서희주가 나중에라도 후회할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전다은이 서둘러 합의서 내용을 수정했다.

서희주가 합의서를 챙겨 차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차도윤의 전화를 받았다.

잠시 망설인 끝에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되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날 선 비난이 쏟아졌다.

“서희주, 우리 엄마한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너 왜 이렇게 몰상식하게 굴어? 명문가 딸이라는 애가 교양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네.”

서희주도 지지 않고 차갑게 맞받아쳤다.

“그래, 당신 만나기 전엔 나도 곱게 자랐어. 근데 결혼하고 나서 이 지경이 됐네? 대체 누구 문제일까?”

순간 말문이 막힌 차도윤은 더 큰 분노를 터뜨렸다.

“뭘 잘했다고 대드는 거야? 우리 엄마 지금 너 때문에 뒷목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당장 집으로 기어들어 와서 제대로 사과해. 그럼 이번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서희주는 문득 깨달았다. 차도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자신을 깔보듯 대해왔다는 것을.

예전에는 그저 성격이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귀에 박혔다.

묵묵부답하는 서희주를 보자 차도윤은 그녀가 수긍한 줄 알았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한결 누그러졌다.

“나도 알아, 우리 엄마 말이 좀 심하긴 했지. 근데 시골 노인네잖아, 네가 좀 너그럽게 이해해 주면 안 돼? 그래도 어른인데 먼저 싹싹하게 굴면 좋잖아. 지금 가서 장 좀 봤다가 점심에 엄마 좋아하시는 새우구이 해드려. 어깨랑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그러면 금방 기분 풀리실 분이야. 원래 뒤끝도 없으니까, 응?”

“참, 요리할 때 삼계탕도 끓여놔. 설아가 점심으로 먹고 싶다네. 이제 그만 화 풀어. 오늘 밤엔 야근 안 하고 일찍 들어가서 같이 저녁 먹을게. 됐지?”

차도윤의 말투는 제법 다정하기까지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작은 온기에도 서희주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그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든 다 들어주었을 것이다. 불쾌했던 감정들은 스스로 지워버리면서.

하지만 지금은 차도윤의 실체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

역겨울 정도로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그 민낯을.

심지어 차도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윤설아에게 줄 삼계탕을 끓이게 하려는 수작임을 알아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희주는 철저히 정신을 차렸다. 손에 이혼 합의서를 움켜쥔 채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야?”

벌써 11시,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지라 차도윤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갔다.

짧은 정적을 끝으로 대답이 들려왔다.

“라온 산후조리원. 음식 다 되면 이쪽으로 가져와. 아, 넉넉하게 준비해 줘. 나도 아직 밥 먹기 전이니까.”

“알았어, 금방 갈게.”

서희주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전화를 끊은 차도윤은 내심 의아했다.

서희주가 한바탕 더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수그러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침에 이혼 얘기를 꺼냈더니 제대로 겁을 먹었나 보군.’

차도윤의 입가에 묘한 승리감이 감돌았다.

서희주라고 자존심이나 고집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날을 세울 때마다 차도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세를 꺾어 놓았다.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회유로.

아내에게 내연녀의 산후조리 수발을 들게 하는 게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지 스스로 모를 리 없었다.

단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만약 이번 일마저 받아들인다면 차도윤은 완전히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어떤 요구를 하든 그녀는 결코 반항하지 못할 거라고.

서희주는 곧장 차를 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라온 산후조리원 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성시에서 가장 호화롭기로 유명한 조리원으로 한 달 이용료만 몇천만 원에 달했다.

보나 마나 차도윤이 내준 돈일 것이다.

정작 지난 몇 년간 아내인 그녀에게는 그리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순간, 서희주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스치듯 떠올랐다.

차도윤과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에게 돈이 없다는 걸 알고 데이트 비용을 전부 자처하곤 했다.

어느 날, 같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녀가 좋아하는 빵집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서희주는 진열대 안의 먹음직스러운 빵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도윤아, 나 저 치즈번 하나만 사주면 안 돼?”

하지만 돌아온 거라고는 무심한 대꾸였다.

“방금 밥 먹었잖아.”

고작 이 한마디 때문에 그날 이후로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희주는 다시는 먼저 무언가를 사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말하기 전까지 받은 적도 없었다.

서희주는 워낙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온 터라 물욕이 별로 없었다.

돈이야 차고 넘쳤으니, 그깟 인색함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그는 인색한 게 아니라 무관심했던 것이다. 빵 한 조각에 담길 법한 사소한 애정조차 사치였다.

심장이 다시 한번 무언가에 짓눌린 듯 저려 왔다.

곧이어 서희주는 조리원으로 발을 들였다.

복도를 몇 번이나 꺾어 들어간 끝에야 마침내 VIP 룸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문밖에 멈추어 섰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애교 섞인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얏...!”

안을 들여다보니 침대 위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폭포처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가녀리고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품에는 아주 작은 아기가 안겨 있었다.

방금 수유를 마친 것인지, 여자는 옷을 여미지 못한 상태였다.

하얀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때, 창밖 풍경을 보며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차도윤이 여자의 신음에 급히 뒤돌아섰다.

이내 눈 앞에 펼쳐진 은밀한 광경을 그대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기색으로 가슴팍의 옷깃을 여몄다.

차도윤은 짐짓 모르는 척 다시 몸을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자가 먼저 입을 뗐다.

“오빠, 아기가 방금 또 저를 깨물었어요.”

차도윤이 그제야 다시 돌아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가가 침대맡에 자연스럽게 걸터앉더니, 조그만 아기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아기의 엉덩이를 살살 두드리며 속삭였다.

“이 녀석, 아주 말썽꾸러기네. 엄마를 아프게 하면 어떡해.”

아기를 품에 안은 차도윤의 모습은 애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무심코 문 쪽을 힐끔거리던 찰나, 서희주의 차가운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서 다정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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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의 배신 vs 10년의 순애보   제30화

    “차도윤 씨, 집은 오늘 오후 4시에 이미 팔렸습니다. 새 집주인은 사흘 뒤에 들어올 예정이니 빨리 새로 살 곳을 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차도윤의 얼굴이 확 굳었다.믿을 수 없다는 듯 그가 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서희주가 멋대로 집을 팔았다고요?”중개사는 서두르지도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서희주 씨 말씀으로는, 이 집은 결혼 전에 어머니가 혼수로 주신 집이라 본인 명의의 혼전 재산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분하든 본인 자유라고요.”순간 주변 사람들도 크게 술렁였다.“뭐야, 차씨 가문의 단독 주택이 팔렸다고?”“원래 이 집 며느리 혼전 재산이었대. 그것도 친정엄마가 혼수로 준 집이라니, 단독 주택을 혼수로 해 줄 정도면 집안이 보통은 아니었겠네.”“무슨 며느리야. 이미 이혼한 거 아니었어?”“그럼 차 대표님이 처가 덕 본 사람이었다는 거네. 젊은 나이에 저렇게 빨리 성공한 것도 분명 장인어른 쪽 힘이 있었겠지.”순식간에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고, 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평소 장혜란과 사이가 좋지 않던 몇몇 할머니들은 이때다 싶어 더 신이 나서 빈정거렸다.“언니, 그 옥팔찌도 설마 전 며느리 혼수품이었던 거 아니야? 그래서 지금 도로 가져간 건가?”“그 팔찌는 보기만 해도 값이 엄청나 보이던데. 혼전 재산이면 당연히 챙겨 가야지.”장혜란은 단번에 아픈 곳을 찔린 듯, 부끄러움과 분노에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몇 걸음에 달려와 소리쳤다.“무슨 혼전 재산이니 뭐니, 나는 그런 건 몰라. 내가 아는 건 딱 하나야. 걔가 우리 집안에 시집왔으면 살아도 우리 집안 사람이고 죽어도 우리 집안 귀신이라는 거지. 사람도 우리 집안 사람인데 집이랑 장신구가 당연히 다 우리 집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해?”장혜란은 일부러 저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속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말은 주변 사람들을 또 한 번 얼어붙게 만들었다.“남의 집은 딸을 시집보내는 거지 파는 게 아닌데, 시어머니가 저러니

  • 3년의 배신 vs 10년의 순애보   제29화

    그때 차씨 가문 집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빼곡하게 몰려 있었다.건물 사람들 거의 전부가 구경하러 나온 탓에, 복도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다.차도윤이 돌아온 걸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길을 비켜 줬다.차도윤은 자기 집 앞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걸 보자, 눈빛에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아들아, 이제야 왔구나. 너 더 늦었으면 우리 집 다 털릴 뻔했어.”차도윤은 울고불고하는 장혜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경비들에게 그 건장한 남자들을 막으라고 했다.“당신들 대체 누구야? 누가 당신들한테 이런 짓을 하라고 했지?”오는 길에 이미 차도윤은 이 일이 서희주와 관련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그래서 경찰에는 신고하지 않았다.집안 망신을 밖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맨 앞에 선 책임자는 바로 부동산 중개사였다.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저희는 서희주 씨의 의뢰를 받고, 서희주 씨 물건을 전부 옮기러 왔습니다.”역시 서희주였다.요즘 그녀가 벌이는 일은 정말 점점 선을 넘고 있었다.“누가 서희주한테 이 물건들을 옮겨 가도 된다고 했지? 당신들 지금 주거침입이야. 내가 경찰에 신고만 하면 당신들 전부 유치장 신세 지게 될 줄 알아. 내가 명령하는데, 10분 안에 모든 물건 제자리로 돌려놔. 안 그러면 그 뒤 일은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거야.”그런데 중개사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차도윤 씨, 저희 의뢰인은 서희주 씨입니다. 무슨 일이든 서희주 씨와 먼저 상의하셔야죠. 물론 경찰을 부르셔도 됩니다.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은 합법적이고 정당하니까요. 경찰이 오면 오히려 잘됐죠. 여기서 괜히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요.”차도윤은 속으로 분노를 꾹 눌러 삼켰다.그는 당연히 경찰이 오는 걸 원하지 않았다.이 집이 서희주의 혼전 재산이라는 걸, 그리고 집 안의 가전과 가구들까지 전부 서희주 소유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법적으로도 서희주는 이 집과 그

  • 3년의 배신 vs 10년의 순애보   제28화

    다들 갑자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이 단지에는 돈 많은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김씨 댁 아들처럼 고연봉 월급쟁이일 뿐이었다. 한번 중년에 실직하면 집안 전체가 그대로 무너졌다.그래서 그들은 더더욱 장혜란에게 잘 보여야 했다. 정말 실직이라도 하게 되면, 연줄을 타고 차도윤의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허씨 댁이 장혜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래도 혜란 씨가 복은 많네. 아들이 큰 회사 차렸으니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맞아요. 앞으로 우리도 언니한테 많이 기대야겠어요.”장혜란은 칭찬 소리 속에 흠뻑 젖어 우쭐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윤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엄마, 빨리 와요. 집에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우리 집 물건까지 막 가져가고 있어요.”오늘은 금요일이라 차윤지는 야간 자율학습이 없었다.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덩치 큰 남자 몇 명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차윤지도 그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장혜란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새까매졌다. 대낮에, 그것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집 안에 들어와 강도질을 하다니.게다가 차윤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겁이 났다.그녀는 얼른 주변의 할머니들에게 손짓했다.“아이고,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누가 우리 집에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있다네. 얼른 나랑 같이 좀 가 봐.”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로열 더 팰리스는 고급 단지였고, 보안이 철저하기로도 유명했다.그런 도둑들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장씨 댁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먼저 가 봐요. 나는 경비 부르고, 이웃들도 더 불러서 같이 올라갈게요. 대낮부터 집 안에 들어올 정도면 보통 간 큰 놈들이 아닐 거예요.”장혜란은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우리 윤지,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금방 꼭대기 층에 멈췄다.문이 열리자, 현관 앞에서 차윤지가 소

  • 3년의 배신 vs 10년의 순애보   제27화

    “손님, 160억짜리 집을 정말 120억에 파시려고요?”서희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돈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파는 거예요.”“이건 완전히 손해 보고 급매로 내놓는 거라, 오늘 오후 안으로도 팔 수 있어요.”부동산 중개사가 어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이 집이 손님 소유 맞으세요?”“등기권리증도 여기 있고, 집 살 때 받은 각종 서류랑 영수증도 다 보관하고 있어요.”중개사가 확인해 보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실례지만 왜 이렇게 급하게 집을 파시려는 건가요? 외국으로 나가실 예정이세요?”서희주는 담담하게 말했다.“이 집은 결혼 전에 엄마가 저한테 사 준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전남편이랑 이혼했는데도, 지금 그 집 식구들이 이 집을 차지한 채 안 나가고 있어요. 집이 팔리면 그 사람들 내보낼 방법은 있겠죠?”중개사는 그 말을 듣자 바로 울분이 치밀어 오른 듯했다.눈앞의 여자는 기품이 남달랐고, 말투도 세련됐다. 누가 봐도 잘사는 집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였다. 그런데도 전남편 쪽이 혼수로 받은 집을 눌러앉아 차지하고 있다니 말이다.“서희주 씨,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회사는 법원 경매 매물도 자주 맡고, 기존 거주자가 안 나가 버티는 경우도 많이 겪어요. 저희한테는 전문 정리팀이 있어서 그런 건 어렵지 않아요. 전부 퇴역 군인이나 은퇴한 격투선수들로 꾸려져 있거든요. 그때 가면 나가야 하고, 안 나가면 바로 밖으로 내보내면 됩니다.”서희주는 만족한 듯 그 자리에서 중개사에게 두둑한 봉투 하나를 건넸다.“그럼 잘 부탁드릴게요.”역시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서희주의 로열 더 팰리스 주택은 팔려 버렸다.새 집주인은 얼마 전에 귀국한 교포였다.게다가 가능한 한 빨리 입주하고 싶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그래서 부동산 쪽에서는 그날 오후 바로 사람을 정리할 생각이었다.한편, 저녁 무렵.로열 더 팰리스에서는 장혜란이 저녁을 먹고 단지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마침 같은 단지에 사는 할머니

  • 3년의 배신 vs 10년의 순애보   제26화

    지금 와서 곱씹어 보면, 차도윤은 ‘사랑해’라는 세 글자조차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았다.그 오랜 시간 동안 늘 그녀만 그의 뒤를 쫓아다닌 것 같았다. 그가 뭘 원하는지 말로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두 손에 가득 받쳐 그의 앞에 갖다 바쳤고,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굴었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자기가 바라는 걸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시큰거렸다.바로 그때, 서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서희주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 표시를 보는 순간, 서희주와 윤승하는 거의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화면에는 ‘남편’이라고 떠 있었다.서희주는 휴대폰을 들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간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서희주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차도윤의 말투는 그보다 더 싸늘했다.“서희주, 너 언제부터 외박까지 하게 됐어?”서희주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정말 웃긴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결국 웃음까지 터지고 말았다.“차도윤, 우리 이미 이혼한 거 알지?”“또 이혼으로 나를 협박하려는 거야? 서희주, 너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유치하게 굴 건데?”서희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차도윤은 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너랑 쓸데없는 말장난할 시간 없어. 본론만 말할게. 엄마 혈당약 떨어졌어. 네가 사서 갖다드려. 그리고 차 키는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놔. 나 내일 은행 가서 얘기할 일이 있는데, 설마 네 모닝 끌고 가라는 건 아니겠지.”“...”“됐고, 나 이제 회의 들어가야 하니까 너 얼른 집에 들어와. 오늘 저녁에는 내가 들어가서 너랑 밥 먹어 줄게.”말을 마치자마자 차도윤은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서희주는 그저 기가 막혔다.그녀도 알 수 있었다.차도윤의 그 전화는 사실상 자기 딴에는 그녀에게 체면치레할 구실 하나 던져 준 거였다.어쩌면 장혜란의 몸 상태 때문에 그녀의 손이 다시 필요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의 롤스로이스를 돌려받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높은

  • 3년의 배신 vs 10년의 순애보   제25화

    윤승하는 눈꼬리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어딘가 사람을 약 올리는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명문가 자제 특유의 여유와 품격이 배어 있었다.“여보, 말해. 잘 듣고 있을게.”서희주는 ‘여보’라는 호칭에 순간 기가 막혔지만 이상하게 듣기 싫지는 않았다.서희주가 입을 열었다.“우리 결혼한 건 일단 공개하지 말자. 나 어제 막 이혼했잖아. 적응할 시간은 좀 필요해.”윤승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좋아.”“둘째, 나는 윤테 그룹 연구개발부에 들어갈 거야. 인턴 신분으로 들어가도 상관없어. 대신 때가 무르익어서 내가 내 연구팀을 꾸리고 싶어질 때는 회사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줘야 해. 급여나 처우는 내가 직접 인사팀이랑 얘기할 거고, 너는 간섭하지 마.”윤승하는 고개를 끄덕였다.“합리적이네.”“셋째, 우리 혼인신고는 했고 나도 너랑 감정을 쌓아 보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 감정이 생기기 전까지는 서로 존중해야 해. 강요하면 안 돼.”윤승하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했다.“뭘 강요하면 안 되는데?”서희주는 뺨이 살짝 붉어졌지, 그래도 당당하게 말했다.“나한테 너랑 자라고 강요하면 안 돼. 우리가 한 번 관계를 가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두 번째도 원한다는 뜻은 아니야.”지금 와서 떠올려 보니, 서희주는 어젯밤 일이 아무래도 조금은 짜인 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면 왜 전다은이 글을 올리자마자 윤승하가 댓글을 달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다은은 급히 불려 나가고, 그 직후 윤승하가 갑자기 나타났겠는가.윤승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나는 네 의견을 충분히 존중할 거고, 절대 조금도 강요하지 않을게.”그러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웃었다.“그래도 하나는 분명히 해 둘게. 네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나한테 강제로 들이대도 돼. 나는 존중 안 받아도 전혀 상관없어.”서희주는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그제야 윤승하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바뀌었다.“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어젯밤 일이 내가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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