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정루아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배진욱을 바라보았다.“오빠, 난 이만 가볼게.”배진욱이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미안하다, 루아야. 우리 집에서 이런 꼴을 겪게 해서.”정루아가 말했다.“나야 뺨 때려서 화도 다 풀렸어. 다만 오빠가 이제 골치 아파지겠네.”“뭐, 내가 골치 아플 건 없지. 다인이가 먼저 무례하게 굴었으니까.”배진욱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나도 가봐야겠어.”두 사람은 현관 앞에서 각자 발걸음을 돌렸다.집으로 돌아온 정루아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송문애가 손녀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루아야, 무슨 일 있었어?”송문애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정루아는 손을 씻고는 곧장 외할머니의 곁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할머니, 나 오늘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어요. 그때 구태윤을 구해준 사람, 진짜로 정시연이었더라고요.”송문애는 눈에 띄게 놀라더니 곧바로 물었다.“그럼 너는 누구를 구했던 거니?”“구승태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실 안에는 정적만이 내려앉았다.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과연 구승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꽤 자주 마주쳤었다.심지어 결혼식 날엔 신랑 들러리로 서주기까지 했었다.송문애는 손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진실을 알게 됐으면 홀가분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낯빛이 어두워?”정루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그냥... 구태윤이 왜 굳이 이 사실을 숨겼는지 이해가 안 가서요.”송문애가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네가 진실을 알게 되면, 태윤이를 향했던 그 감정마저 흔들릴까 봐 겁이 났던 건 아닐까?”정루아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제가 그 사람을 먼저 좋아했어요. 그래서 구하러 갔던 건데요.”“글쎄, 태윤이 입장에선 그렇게 단순하게만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지.”송문애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물론 내 짐작일 뿐이지만 말이다. 요즘 젊은 애들
정루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그냥 일하다 보면 있는 소소한 골칫거리 같은 거야.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워낙 위험한 상황들이라 얽히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배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힘들면 언제든 기대도 좋아. 나 믿지? 네가 짊어진 짐은 기꺼이 나눠 줄 테니까.”정루아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진욱 씨.”“우리 사이에 언제까지 그렇게 ‘씨’자 붙여가며 선을 그을 거야? 들을 때마다 엄청 서운하네.”배진욱이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이름 부르는 게 아직 어색하면, 차라리 오빠라고 불러.”“오빠...?”정루아가 멋쩍게 입을 뗐다.“훨씬 듣기 좋네. 그럼 나도 편하게 부른다?”배진욱이 싱긋 웃었다.“내 동생도 너 반만 닮아서 속 좀 덜 썩였으면 좋겠어.”정루아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다인 씨도 평상시엔 나름 괜찮은 구석이 있어. 난 집에 가서 생각 정리해 봐야 하니까 이만 가볼게.”배진욱이 따라 웃었다.“그래, 배웅해 줄게.”두 사람이 나란히 현관문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앞에 서서 손을 든 채 막 노크하려던 배다인을 마주쳤다.“오빠? 이 여자가 왜 여기서 나와?”배다인은 정루아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구기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배진욱이 대답했다.“루아는 내 손님이야. 친구 집에 와서 차 한잔하고 간 게 뭐 어때서?”“진짜 그냥 손님 맞아?”배다인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정루아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붙였다.“어디 아프면 병원 가서 진료라도 받지? 마침 잘 아는 정신과 전문의가 있으니까, 필요하면 예약 잡아줄게.”배다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지금 나더러 돌았단 소리야?”정루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지. 넌 비아냥거릴 자격이 있고, 난 팩폭 날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흥!”배다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배진욱이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정루아의 앞쪽으로 밀어주었다.“지진 현장에서 후원 행사 사진을 기록하던 기자를 찾아냈거든. 그 사람한테서 사진 몇 장을 빼내 왔는데, 그중에 정시연이 구태윤을 업고 폐허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찍힌 게 있었어.”다름 아닌 그가 가장 먼저 보여준 사진이었다.정루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이 서려 있었다.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받아 든 그녀가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놀랍게도 예전에 구태윤이 직접 보여주었던 사진과 정확히 일치했다.정말로 사실이었다니.구태윤을 구한 사람은 정시연이었다.그렇다면 그녀는...?자신이 구했던 그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정루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배진욱을 바라보았다.어느덧 목이 꽉 막혔다.“하지만... 분명히 내가 그 사람을 구했는데...”“자자, 일단 진정하고.”새하얗게 질린 채 혼란에 빠진 그녀를 보며 배진욱이 나직하게 다독였다.말을 마치고는 휴대폰 화면을 넘기며 두 번째 사진을 띄웠다.사진 속에는 풋풋하고 앳된 얼굴의 정루아가 한 소년을 등에 업은 채 무너진 가옥 틈새를 헤쳐 나오고 있었다.다만 그 소년의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구태윤과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는 이목구비.하지만 구태윤은 아니었다.정루아의 동공이 수축했다.이내 두 손으로 휴대폰을 감싸 쥔 채 사진을 확대해 가며 구석구석 훑어내렸다.의식을 잃었는지 두 팔이 허공에 축 늘어진 채 덜렁거리는 소년과 그를 등에 업은 채 잔해 속을 빠져나오는 자신의 모습까지.카메라 렌즈는 그 결정적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화면 속 남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이 사람은...”정루아가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설마, 구승태야?”“맞아.”배진욱이 다시 화면을 넘기자, 이번에는 구승태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났다.교복 차림의 소년은 생기가 넘치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한 손에는 트로피를 든 채, 입꼬리를 살짝 올린 모습이
여나은은 긴장한 얼굴로 이불을 꽉 움켜쥐며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루아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여유롭게 말했다.“천천히 생각해 봐. 꼭 내 밑에서 일할 필요는 없어. 다른 곳도 알아보고 정해도 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여나은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했다.“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안 될까요?”“그래.”정루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병원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 불현듯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그녀는 흠칫 놀라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입구에는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로만 북적일 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방금 건 그저 착각이었을까?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정루아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막 시동을 걸려는 찰나,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자 김철웅이었다.다급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바짝 긴장한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철웅 씨, 무슨 일이에요?”김철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루아 씨, 시동 걸지 말고 당장 차에서 내리세요! 방금 들어온 첩보가 있는데, 누군가 루아 씨 차에 손 댔을 가능성이 큽니다.”정루아의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내라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이내 황급히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때마침 저 멀리서 김철웅이 전력 질주로 달려오고 있었다.“화장실 좀 다녀오느라 부하 직원한테 잠깐 지켜보라고 했는데, 그 녀석 말로는 누군가 루아 씨 차 주변을 꽤 오래 서성였다고 하더라고요.”정루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죠?”김철웅이 단호하게 말했다.“일단 전문 업체 불러서 차부터 견인해 정밀 검수받아야 합니다. 루아 씨는 택시 타고 이동하시죠.”정루아의 머릿속에 지난번에 당했던 습격과 그전의 아찔했던 납치 소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이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물었다.“저번에 있었던 일은 아직도
구태윤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여기 일 끝내려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버티고 있어. 내가 지금 한가하게 장난이나 치는 것으로 보여?”휴대폰을 쥔 정루아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그럼 대체 언제 돌아오는데?”구태윤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글쎄, 한 일주일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당신 진짜...!”정루아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상대의 태도가 워낙 확고해서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정루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추슬렀다.마음을 진정시키고 거실로 돌아오자, 송문애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정루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외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은 그녀가 말을 꺼냈다.“할머니, 저 이제 맡은 작업도 거의 끝나가거든요. 앞으로는 아예 제 이름으로 된 스튜디오를 차려볼까 해요.”“그래, 좋은 생각이다.”송문애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네가 직접 사장 해서 돈 버는 게 낫지.”“네, 앞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시나리오나 소설, 애니메이션 위주로 직접 골라서 작업하려고요. 당분간은 엄청 바빠질 것 같아요.”정루아가 송문애의 팔짱을 꼭 꼈다.“그래서 앞으로는 예전처럼 자주 같이 시간 보내기 어려울지도 몰라요.”“괜찮다,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일 열심히 해. 절대 우리 손녀 발목 잡지는 않을 테니까.”송문애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정루아가 딱 잘라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어디 있어요? 할머니가 뒤에서 묵묵히 지켜준다고 생각해야 내가 뭘 해도 힘이 나죠.”정루아의 살가운 말에 송문애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이 서자, 정루아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이틀 뒤, 여나은에게서 연락이 왔다.“루아 씨... 저 이제 진짜 많이 나았거든요? 그래서 혹시 퇴원해도 괜찮을지 해서요.”여나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장유성은 정루아를 부축해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정루아가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됐어요. 다 왔으니까 이만 가 봐요.”장유성이 손을 떼며 말했다.“알았어요. 갈게요.”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순간, 그는 멈칫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루아 씨, 진짜 태윤이한테 마음 뜬 거예요?”정루아는 현관문을 벌컥 열고는,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문을 쾅 닫아버렸다.머쓱해진 장유성이 터벅터벅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이내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태윤아, 루아 씨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줬어.]물론 답장은 오지 않았다.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씻고 나오자 술기운이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띵했다.정루아는 미지근한 꿀물을 한 잔 타서 마셨다.이때, 휴대폰이 진동했다.배진욱이 보낸 문자였다.[해장국 좀 끓여놨는데, 먹을래? 그래야 내일 아침에 머리 안 아플 텐데.]정루아가 답장을 보냈다.[아니, 괜찮아. 지금은 속이 많이 진정됐어.][그럼 다행이고.]정루아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놓았다.그러고는 턱을 괸 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머릿속에는 술집 창밖에서 봤던 낯익은 뒷모습이 떠올랐다.그때, 김철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루아 씨, 제가 좀 알아봤는데 며칠 전에 구태윤이 자기 엄마를 해외로 보냈더라고요. 원래는 정시연도 출국시키기로 했지만, 공항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지금껏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정루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그럼 술집에서 본 뒷모습이 진짜 정시연이었단 소리예요?”김철웅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그럴 가능성이 충분해요. 다만, 누가 뒤에서 손을 써서 숨겨준 건지 아직 도피처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정루아의 가슴속에 묘한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정시연이 이대로 숨어 지낼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띵해 사고 회로가 매끄럽게 굴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