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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Author: 낙화
그녀는 침대 곁에 서서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그는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 특유의 날카롭고 오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녀를 다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베개를 쥔 정루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정말이지 죽어야 마땅하다.

처음엔 미친 듯이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는 이렇게까지 증오하게 만들다니.

기쁨도, 고통도 전부 그로부터 시작됐다.

분노가 또다시 치밀어 올랐지만 결국 그녀는 베개를 놓아버렸다.

도저히 그런 결단은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혼이지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필경 그는 그녀가 8년 동안이나 사랑했던 남자이니 말이다.

정루아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이 일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새벽 세 시, 살을 짓이기는 고통에 잠에서 깬 구태윤은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곁을 바라봤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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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8화

    구태윤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이내 그윽한 눈빛으로 정루아를 응시했다.“정원 그룹만 투자를 회수한다고?”“응.”정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굳이 돕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정원 그룹 투자는 반드시 철회시켜.”“왜 안 말리는 거지?”구태윤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묘한 긴장감이 주변을 에워쌌다.정루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말리면, 내 말 듣기나 하고?”구태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왜 하필 정원 그룹 투자를 철회하라는 건데?”“양녀 주제에 감히 정씨 가문 돈을 탐내?”정루아가 숨도 안 쉬고 쏘아붙였다.구태윤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자. 다 먹고 네가 한 말 고려해 볼 테니까.”정루아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렇게 간단한 일을 뭘 또 고려까지 해?”“루아야, 그건 그렇고. 네가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되나?”구태윤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난 와이프 말만 듣거든.”정루아는 덤덤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맑고 까만 눈동자에는 역력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우리 아직 이혼 전인 걸로 아는데.”구태윤이 침묵했다.정루아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어차피 이혼 소송은 시간문제였고, 두 사람의 혼인 관계 역시 조만간 끝날 터였다.그러니 잠시 장단을 맞춰준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구태윤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정루아의 표정은 태연했고, 바짝 세우던 가시도 집어넣은 상태였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여전했다.정루아는 그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알 바 아니었다.어느 정도 허기를 채운 다음 문득 고개를 돌렸다.“생각은 끝났어?”“그래, 네 말대로 할게.”구태윤은 순순히 대답했다.여기서 거절했다간 분명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설 테고, 그 과정에서 제 통제를 벗어나는 변수가 터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마치 허도준이 갑작스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7화

    송문애는 차갑게 말했다.“너희 정말 실망이야. 양녀 하나 때문에 우리 루아를 쥐 잡듯이 잡아?”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루아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 가장 여린 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울컥하는 감정이 차오르며 눈시울이 시큰해졌다.송문애의 믿음은 언제나 한결같았다.정루아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외할머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이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 어쨌든 전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임혜숙은 송문애의 편파적인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지만, 지금 당장 대놓고 맞설 수는 없었다.무려 큰 병을 앓고 난 뒤였다.비록 수술은 성공했다고 해도,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게다가 송문애가 쥐고 있는 재산은 엄청났다.그녀의 하나뿐인 딸로서 유산은 결국 전부 자기 차지가 될 터였다.임혜숙은 이를 악물고 꾹 참아냈다.정루아는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내 휴대폰을 꺼내 구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세 번 울리더니 통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낮게 깔린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어디야? 잠깐 보자.”정루아의 어조는 덤덤했다.구태윤이 말했다.“병원으로 갈게.”하지만 정루아는 딱 잘라 거절했다.“아니야, 내가 가면 돼.”“네가 날 찾아온다고?”한껏 격앙된 목소리에 흥분이 묻어났다.정루아는 짜증이 슬슬 치밀어 올랐다.“그래서 어디냐고.”구태윤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회사.”그리고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야근 중이던 구태윤은 이미 꺼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여전히 차갑고 쌀쌀맞긴 하지만,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해왔다.이렇게 마음이 설레던 적이 얼마 만이더라.새삼 그리운 기분이었다.그는 한민혁을 불러 정루아가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하게 한 뒤,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3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6화

    정석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건 왜 물어?”“당장 취소하세요.”정루아는 당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말했다.“그리고 투자한 돈 빼내세요.”정석주는 곧바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지금 무슨 미친 소리야? 언니한테 회사 하나 차려주는 게 뭐 어때서? 네가 피해받는 것도 아니잖아.”“난 허락 못 해요.”정루아는 팔짱을 꼈다.“친딸도 아닌 사람한테 왜 우리 집 돈을 써야 하죠?”그리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전에 회사 하마터면 파산할 뻔했던 일, 잊으셨어요?”싸늘한 말투에는 협박이 서려 있었다.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에 정석주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당시 소란 때문에 그는 며칠 밤을 설쳐야 했고, 이사회에서도 능력을 의심받기 시작했다.그런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하지만...정석주는 얼굴을 굳힌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구태윤이 다리 놔줬고, 투자도 같이한 거야. 루아야,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넌 늘 시연이한테 상처만 줬잖아. 우린 그냥 작게나마 보상해주고 싶은 거니까 우기지 좀 마.”정루아는 속으로 비웃었다.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구태윤은 형수 걱정뿐이라니.다른 건 보상해 줄 수 없으니까 아예 회사 하나 차려주고, 일감까지 몰아주며 떠받들겠다는 건가?이혼하지 않으려고 벌인 온갖 짓을 생각해 보면 기가 찰 뿐이었다.정루아는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구태윤한테도 투자 철회하라고 할 거예요. 아무튼 두 사람이 회사 차려주는 거 난 반대예요. 정시연이 무슨 자격으로 그걸 받아요?”“정루아!”임혜숙이 듣다못해 나섰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루아의 앞으로 걸어갔다.“너는 왜 맨날 언니한테 그렇게 앙심을 품고 못살게 구니? 이제 눈앞에 얼씬도 안 하는데 뭐가 불만이야? 마음을 좀 넓게 가지면 어디가 덧나냐고.”정루아는 비웃음을 흘렸다.“나 원래 속 좁고 뒤끝 장난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말대로 안 하면 아주 끝장나는 수도 있어요.”“너...!”말문이 막힌 임혜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진짜 갈수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5화

    임혜숙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타박했다.“루아 너 엄마한테 태도가 그게 뭐니? 내 어머니가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당연히 돌보러 와야 하지 않겠어?”정루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뻔뻔함의 극치였다.송문애에게 상처로 남을 모진 소리를 쏟아내고서 어떻게 낯짝 두껍게 다시 눈앞에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정루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냥 돌아가세요. 굳이 엄마까지 있을 필요 없으니까. 할머니는 내가 알아서 잘 모실게요.”하지만 임혜숙은 고개를 저었다.“싫어, 안 가. 우리 어머니는 내가 간호할 거야.”그러더니 송문애를 돌아보며 물었다.“어머니, 저 여기 같이 있어도 되죠?”“그러렴.”송문애는 의외로 거절하지 않았다.정루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눈썹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외할머니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더 말리지 않았다.바로 그때, 정석주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한마디 거들었다.“루아야, 할머니가 이렇게 크게 아프셨으면 우리한테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어른이 돼서 왜 이렇게 생각이 없니.”정루아가 싸늘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럼 두 사람은 어떻게 아셨는데요?”정석주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시연이가 알려줬지. 전 회사에 아는 친구가 있는데, 감독이 병문안 다녀간 걸 보고 시연이한테 연락한 거야. 그리고 곧장 전해 준 덕분에 우리도 알게 되었지. 시연이 아니었으면 할머니가 입원한 줄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잖아.”정루아는 속에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임혜숙이 송문애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머니, 아직 시연 얼굴은 못 보셨죠? 저희가 입양한 딸인데, 성격이 얼마나 착하고 속이 깊은지 몰라요. 얼굴도 예쁘고 반듯한 데다가 어머니 걱정을 아주 많이 해요. 혹시나 어머니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오늘은 같이 안 온 거랍니다.”송문애는 임혜숙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물었다.“이미 내 손녀 루아가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아이를 입양한 거냐?”임혜숙의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4화

    구태윤의 미간이 서서히 펴지며 목소리도 한결 누그러졌다.“하준아, 왜?”“작은아빠, 집에 안 와요?”녀석은 앳된 목소리로 뜸을 들이며 말했다.“작은아빠 보고 싶어요.”하지만 구태윤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오늘 밤은 안 돼. 시간이 늦었는데 너도 일찍 자야지. 할머니랑 엄마 말씀 잘 듣고.”“하지만 작은아빠가 보고 싶은걸요...”구하준이 고집을 부렸다.“작은아빠가 와서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안 돼.”구태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거긴 증조할머니랑 할머니, 엄마도 다 계시잖아. 난 지금 작은어머니랑 같이 있어야 해서 안 돼.”구하준이 묵묵부답했다.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장옥경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하준이가 널 엄청 찾는데 어쩌겠어. 집을 며칠째 비웠으니 얼굴 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지.”구태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엄마, 진짜 하준이가 날 찾아서 그러는 거예요? 손주 보기 귀찮아서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 아니고?”“이 자식이 아주 입만 열면!”장옥경이 욱하며 성을 냈다.“내 친손주인데, 뭐가 귀찮아!”“그럼 왜 애한테 엄마 휴대폰까지 쥐여주면서 전화하게 한 거죠?”구태윤이 코웃음을 쳤다.“엄마, 아빠가 보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찾아간다고 하시지 그래요.”“이 망할 자식이!”장옥경이 욕설을 퍼부었다.“제 마누라 하나 단속 못 해서 도망치게 생긴 판국에, 어디서 엄마한테 감 놔라 배 놔라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뚝 끊겼다.구태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내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개를 든 순간, 실망으로 물든 정루아의 눈동자와 마주쳤다.잠시 후, 가라앉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절대 어디 안 가.”...정루아는 간이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그 곁을 지키던 구태윤은 의자에 앉아 의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훑어내렸다.단지 너무 지친 탓에 정루아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3화

    “응. 아주 성공적으로.”정루아가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기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도준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덕분에 큰일을 해결했어.”허도준이 피식 웃었다.“할머니 별일 없으시다니 다행이네.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우리 친구잖아? 친구끼리 이 정도는 당연히 돕고 사는 거지.”정루아가 진심으로 벅차올라 말했다.“너 같은 친구라면 진짜 열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어.”허도준이 어이없다는 듯 맞받아쳤다.“장난해? 땡처리도 아니고.”정루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정말 고마워, 도준아. 이 은혜는 꼭 갚을게.”그녀의 목소리에는 남다른 비장함마저 묻어났다.하지만 허도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정말 별일 아니라니까. 그 빚 갚고 싶으면 내 변호사 수임료나 두 배로 쳐주든가?”“그래.”정루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가장 큰 짐을 덜어낸 데다, 더 이상 구태윤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정루아의 마음은 구름 위를 걷듯 가벼워졌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침대 곁에 앉았다. 입꼬리는 당최 내려올 기미가 안 보였다.한편, 병실 밖.구태윤은 복도 벽에 기댄 채 안에서 새어 나오는 통화 소리를 듣고 있었다.허도준이라니?‘그 자식이 도와줬다고?’허도준한테 그런 능력이? 왜 그는 전혀 몰랐지?구태윤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분명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전화를 받은 그는 긴 다리로 복도 구석으로 걸어갔다.수화기 너머에서 한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윌리엄 박사의 휴대폰이랑 노트북을 해킹해 봤는데 오늘 아침에 수신한 해외 메일이 하나 포착됐어요. 다만 이미 삭제한 상태였습니다. 발신자 주소까지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요.”구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러니까 결국 아무것도 못 건졌다는 소리야?”한민혁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네.”“그래?”구태윤의 시커먼 눈동자에 위험한 살기가 어렸다.“사람 붙여서 윌리엄 감시해.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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