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내가 고개를 돌려 씩 웃으며 툭 내뱉자, 할머니가 주름진 눈매를 휘어 접으며 내 넓은 등짝 위로 가볍게 몸을 기댔다."그려. 우리 똥강아지 등짝이 제일로 넓고 따숩제."목숨을 걸고 심연의 군단과 맞서 싸우는 Z급 파일럿의 등.하지만 지금 내 등 뒤에 업힌 할머니의 무게는 너무나도 가벼워서 오히려 내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듯했다.나는 할머니를 업은 채 건물을 빠져나왔다.내 뒤를 따르는 식구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눈물 자국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간 채, 다시금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같은 날 저녁. 대한민국 부산 남포동, 하숙집 거실]"빰빠바밤-! 생신 축하합니다-!"거실 한가운데 펼쳐진 커다란 교자상 위로 오색찬란한 고깔모자를 쓴 희선이와 히나가 요란하게 폭죽을 터뜨렸다.오후의 그 눈물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하숙집 거실은 잔칫집 특유의 시끌벅적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랩실에서 막 퇴근한 윤철수와 신수지, 그리고 별다방 문을 닫고 달려온 주미혜까지 합류하여 거실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교자상 위에는 최 여사님이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오후 내내 고아낸 참기름 냄새 진동하는 소고기 미역국을 필두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갈비찜과 오색 잡채, 갓 부쳐낸 동태전까지.그야말로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완벽한 밥상이었다."자자, 음악 큐! 어르신 생신에는 역시 뽕짝이 최고지!"세탁소 사장 성배 아저씨가 번쩍거리는 노래방 마이크를 쥐고 거실 한복판으로 나섰다.그 옆에는 양복 마이를 대충 벗어던진 윤철수가 선글라스를 낀 채 탬버린을 미친 듯이 흔들어대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내가 필요할때- 나를 불러죠오- 은제든지 달려갈께-!"성배 아저씨의 끔찍하게 엇박자를 타는 트로트 열창과, 윤철수의 국적 불명 탬버린 댄스가 어우러지자 거실은 그야말로 대환장의 코믹 쇼로 변해버렸다."아빠! 박자 다 틀렸잖아! 뒤로 빠져봐! 지금부터 우리가 찢어줄 테니까!"희선이가 성배 아저씨를 밀어내
10년 전 태평양 심해에서 무수한 괴수들이 쏟아져 나와 한반도를 덮쳤던 인류 최대의 재앙, 대해식.그 참혹했던 재난 속에서 목숨을 잃은 수십만 명의 국민들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영도 바닷가 언덕에 거대하게 지어놓은 위령 시설이 바로 국가재난납골당이었다.그리고 할머니의 친아들이자 최 여사님의 남편 역시 그때 배타고 나가 계셨다가 목숨을 잃고 그곳에 안치되어 있었다.며느리가 끓여내는 고소한 미역국 냄새.죽은 아들이 생전에 그토록 좋아했던 그 냄새를 맡고 불현듯 치매의 안개를 뚫고 올라온 조각난 기억이 오늘을 아들의 기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 어귀에 주차되어 있던 SUV의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그리고 파출소에 다녀오시는 성배 아저씨를 향해 빠르게 부탁드렸다."아저씨. 혹시 모르니까 아저씨는 딴 데 가지 마시고 무조건 대문 열어놓고 집을 봐주세요.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오실 수도 있으니까요.""어, 어어! 알았다, 태수야. 내는 눈에 불을 켜고 집 지키고 있을 테니까 퍼뜩 댕겨와라!"성배 아저씨의 든든한 대답을 뒤로한 채 식구들이 급히 차에 타는 걸 확인 후,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거칠게 밟았다.끼기기기긱-!!!!내 차가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영도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거대한 회색빛 돔 형태의 건축물 주차장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최 여사님과 식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납골당의 정문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국가재난납골당의 내부는 바깥의 끓어오르는 폭염과는 대조적으로 뼛속까지 시릴 만큼 정적인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수만 개의 투명한 유리 단지로 이루어진 끝없는 안치단들이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숙한 공간.그 웅장하고도 슬픈 침묵 속에서 우리는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저기..."하루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안치실의 가장 구석진 코너를 가리켰다.희미한 조명이 내려앉은 그곳.대해식 유공자 안치 구역의 자그마한 유리함
[2026년 7월 하순. 오후 3시경. 대한민국 부산 남포동, 하숙집]매미 떼가 귓가를 찢을 듯이 악을 쓰며 울어대는 7월 하순의 푹푹 찌는 오후.레비아탄의 전면 개조 작업으로 기약 없는 강제 휴가를 얻은 나는, 모처럼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쏟아지는 내 방 침대에 대자로 누워 꿀 같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황좌 프로젝트 때문에 랩실에 감금되다시피 한 윤철수와 신수지는 오늘 저녁 늦게나 하숙집으로 합류할 예정이었고, 다른 식구들 역시 각자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식구들이 모두 모이는 저녁 7시.그때부터 우리 하숙집의 왕고참이신 할머니의 성대한 생신 파티가 열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그렇게 완벽하고 나른한 오후의 평화가 이어지던 그때였다.지이이잉- 지이이잉-!머리맡에 던져두었던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진동을 토해내며 단잠을 무참히 깨워버렸다.발신자는 최 여사님이었다.같은 집 지붕 아래에 있으면서 굳이 전화를 걸어올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의아함을 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예, 이모님. 저 방에서 자고 있는..."[태수야! 큰일 났다! 어매가 안 빈다! 어매가 없어졌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 여사님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다급하고 찢어져 있었다.나는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예? 할머니가 없어지다뇨. 아까 점심 식사 하시고 안방에 누워 계시는 거 제가 똑똑히 봤는데요."[아이고, 내 미친다 진짜! 저녁에 식구들 다 모이믄 생신상 거하게 차릴라꼬 부엌에서 잡채 당면 삶고 소고기 핏물 빼는 그 잠깐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가삤다! 아무리 찾아도 근처에 읎다!]최 여사님의 목소리 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치매 기운이 있어 종종 오락가락하시지만 항상 대문 밖 평상까지가 할머니의 동선이었다.이 가마솥 같은 폭염 속에 길을 잃고 헤매신다면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하루랑 똥강아지들한테는 벌써 전화 돌리가 온 동
[어, 어어? 저 친구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하 준위! 대열로 돌아가게! 지금 사열식이 시작되려 하지 않나!]단상으로 접근하는 나를 발견한 장성들이 당황하며 소리쳤다.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황급히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내 턱짓 한 번에 뿜어져 나온 무형의 압박감에 짓눌려 차마 무기를 꺼내지도 못한 채 슬금슬금 길을 터주고 말았다.나는 단숨에 단상의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에어컨의 시원한 냉기가 훅 끼쳐오는 귀빈석의 중심.대통령을 비롯한 수십 명의 수뇌부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나는 국방부 장관의 입 앞에 놓여 있던 마이크를 냅다 낚아챘다."아아. 마이크 테스트."내 무심한 목소리가 광화문 광장을 덮고 있던 끈적한 더위를 찢고 울려 퍼졌다.수백 대의 기갑 병기들과 수천 명의 병력들이 숨죽인 채 단상을 주목했다."방금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뒤에서 호박씨들을 참 맛깔나게 까시던데."나는 마이크를 쥔 채, 방금 전 나를 기계 부품 취급하며 씹어대던 장성들을 한 명 한 명 뚫어지게 응시했다."기체 빨로 운 좋게 괴수 몇 마리 잡았다. 기체가 없으니 볼 게 없다. 맞습니까?"장성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일개 준위 나부랭이가, 그것도 대통령이 앉아 있는 이 신성한 국경일 행사의 단상에 난입해 대놓고 따져 묻는 상황.참모 차장이 헛기침을 하며 핏대를 세웠다."크흠!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틀린 말 했나! 자네가 그 기동 병기 덕분에 영웅 대접을 받는 건 사실 아닌가! 군의 규율을 무시하고...""영웅 대접은 무슨 얼어 죽을."나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코웃음을 쳤다."내가 타는 그 기체, 레비아탄. 그거 1분 비행할 때마다 들어가는 쿨링 시스템 교체 비용이랑 관절부 초합금 마모 수리비가 얼만지 계산은 해보셨습니까."내 뜬금없는 정비 비용 타령에 장성들의 눈동자가 멍청하게 깜빡였다.당연히 즉석에서 지어낸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지만, 메카닉의 메 자도 모
[2026년 7월 17일. 오전.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 특설 행사장]아스팔트 바닥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일 정도로 숨 막히는 폭염.7월 중순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서울 광화문 광장은 그야말로 펄펄 끓는 거대한 한증막이나 다름없었다.나는 목을 꽉 조이고 있는 정복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끌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단전에 똬리를 튼 EX급 빙정 코어가 미세한 한기를 뿜어내며 체온을 조절해주고 있었지만, 이 뻣뻣하고 두꺼운 제복이 주는 물리적인 불쾌감까지 완벽하게 막아주지는 못했다."아, 진짜 사람 쪄 죽겠네. 내가 무슨 마네킹도 아니고 이런 뙤약볕에 왜 서 있어야 합니까."내 투덜거림에 바로 옆에 서 있던 아크 부대 사령관이 진땀을 빼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어허, 하 준위. 조금만 참게나. 명색이 제헌절을 기념하는 국가적인 대규모 열병식 아닌가. 자네는 우리 아크 부대, 아니 대한민국 국방부 전체를 상징하는 영웅이야. 자네가 빠지면 행사의 폼이 안 산다네."친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령관의 달래기에도 내 미간의 좁혀진 주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영웅 대접해 줄 거면 저기 VIP석 그늘막 아래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모시든가요. 왜 파일럿을 기갑 부대 도열하는 아스팔트 한복판에 세워놓고 사람을 굽고 있답니까.""아유, 그건 내 권한이 아니지 않은가. 서울 최고 사령부의 장성 영감님들이 기어코 자네를 사열대 정중앙에 세워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말이야. 이번 행사만 얌전히 넘겨주면, 내가 내일 자네 통장으로 두둑한 특별 수당을 일시불로 꽂아주겠네. 약속함세."사령관의 눈물겨운 비위 맞추기에 나는 혀를 차며 넥타이를 대충 고쳐 맸다.어차피 자본주의 용병에게 수당만큼 확실한 동기부여는 없다.하지만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다.왕복 10차선 도로를 빈틈없이 채우며 도열해 있는 수백 대의 기동 병기들.보급형 저거노트 편대와 블랙맘바 편대, 그리고 프로토타입의 각종 신형 기갑들이 여름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었다.그 웅
놀이기구에서 내린 세 여자는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면서도 끝까지 내 곁을 사수하기 위해 기싸움을 멈추지 않았다."어우, 속 쓰려... 태수야, 우리 저기 벤치에서 좀 쉬자."미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벤치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그때 하루가 테마파크의 안내 지도를 펼쳐 들며 눈을 반짝였다."오빠, 저기 귀신의 집 있어요! 요즘 저게 이 놀이공원에서 제일 인기 많대요. 시원하게 땀 식히러 저기 들어가요."귀신의 집.여자들이 무서워하며 남자 품에 안기기 딱 좋은, 로맨스 텐션의 고전 중의 고전 코스.미혜의 눈동자에도 순간적으로 불이 번쩍 튀었다."그래, 귀신의 집 좋네! 우리 태수가 이 누나 든든하게 지켜주겠지?""저도 오빠만 믿고 따라갈게요."나는 귀찮은 듯 뒷목을 긁적이며 두 여자의 등쌀에 떠밀려 시커먼 박쥐 문양이 그려진 흉가 컨셉의 어트랙션 입구로 들어섰다.그리고 이 선택이 오늘 하루 중 가장 기막힌 대환장 촌극의 도화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끼이이익- 쿵!귀신의 집 내부는 냉방이 과하게 틀어져 있어 으스스한 한기가 감돌았다.핏빛 조명과 기괴한 신음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며 공포 분위기를 꽤나 그럴싸하게 조성하고 있었다."꺄아아악!"코너를 돌자마자 천장에서 피투성이 마네킹이 뚝 떨어지자 미혜와 하루가 비명을 지르며 내 허리를 양쪽에서 꽉 끌어안았다.나는 두 여자의 무게를 고스란히 버텨내며 무표정하게 앞으로 전진했다."놀라지 마세요. 저거 다 플라스틱 쪼가리에 빨간 물감 칠해놓은 겁니다."그렇게 어두운 복도를 절반쯤 통과했을 무렵.갑자기 벽면의 비밀문이 덜컹 열리며 좀비 분장을 리얼하게 한 아르바이트생 두 명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크롸롸롸롸-!!!!""꺄아아아아-!!!!"미혜와 하루가 내 등 뒤로 완전히 숨어버린 순간.지금까지 묵묵히 우리 뒤를 따라오던 소피아 아르젠토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이런 불경한 악귀 놈들! 감히 구원자님의 성스러운 행차를 가로막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