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5월 8일 오전 열 시. 왕실 기사단 훈련장.
한 달에 한 번 기사단 전원 대련이 있었다. 호위 임무 중인 기사도 예외가 없었다. 그레타 원칙이었다. 「칼을 한 달 안 잡으면 칼이 너를 잊는다.」
카일은 아침 기도 시간에 성녀를 교대 기사에게 넘기고 왕성으로 건너왔다. 훈련장은 왕성 서쪽 마당. 흙바닥. 나무 울타리. 기사 마흔 명이 둘씩 짝을 지어 섰다.
카일 짝은 루카스였다.
“대장님! 저 이번엔 안 봐줘요!”
“언제 봐줬는데.”
“저번에요. 대장님이 저 봐주셨잖아요. 세 번째 합에서 일부러 늦게 막으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늦게 막은 적은 없었다. 루카스가 그날 유난히 빨랐다. 그걸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대련은 진검이 아니라 날 무딘 연습검. 그래도 쇠였다. 맞으면 멍이 들고 베이면 피가 났다.
그레타가 울타리 위에 걸터앉아 파이프를 물었다. 의족을 울타리 가로대에 걸고.
“시작.”
루카스가 들어왔다. 덩치에 비해 빨랐다. 첫 합. 카일이 막았다. 둘째 합. 막았다. 셋째 합에서 루카스가 칼을 낮게 틀었다. 카일이 아래로 막으려다—
눈 끝에 하얀 것이 보였다.
훈련장 울타리 너머. 왕성 서문 쪽 길. 하얀 옷. 맨발. 땋은 머리.
아니었다. 왕성 시녀였다. 하얀 앞치마. 신을 신은.
그 잠깐. 숨 반 번. 카일 칼이 늦었다.
루카스 칼이 카일 칼 손잡이 위로 미끄러졌다. 무딘 날이 카일 왼손 손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가죽 장갑이 찢어졌다. 그 아래 살도.
카일은 칼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장갑 안으로 피가 고였다.
루카스가 칼을 떨어뜨렸다.
“대, 대장님! 피! 피 나요!”
“괜찮다.”
“안 괜찮아요! 장갑 다 찢어졌어요! 저 진짜 안 봐준다고 했지 베겠다고는 안 했어요!”
카일은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 한가운데. 엄지 아래에서 새끼손가락 쪽으로. 길게 한 줄. 깊지는 않았다. 피가 많이 났다.
그레타가 울타리에서 내려왔다. 의족 소리. 딱, 딱. 카일 손바닥을 봤다. 그리고 카일 얼굴을 봤다.
“에벤하르트. 방금 어디 봤어.”
“…칼을 봤습니다.”
“거짓말. 서문 쪽 봤지. 시녀 지나갈 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타가 파이프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의무실 가. 그리고 오늘 대련 진 걸로 한다. 루카스, 축하한다. 처음으로 에벤하르트를 이겼군.”
루카스가 울상이 됐다.
“저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지 않았어요…”
†
의무실 군의관은 손바닥을 씻고 실로 세 바늘 꿰맸다. 알코올. 붕대. 「사흘 동안 칼 잡지 마시오. 물 닿지 않게.」
카일은 붕대 감은 손으로 백탑에 돌아왔다. 오후 한 시. 휴식 및 묵상. 성녀는 뒤뜰에 있을 시간이었다.
뒤뜰. 싹이 세 개에서 스무 개가 넘게 늘어 있었다. 이랑을 따라 초록 점들이. 성녀가 이랑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카일이 울타리를 넘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카일 왼손을 봤다. 하얀 붕대.
성녀가 일어났다. 흙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걸어왔다. 빠르게. 맨발이 이랑 사이를 디뎠다. 싹을 하나도 밟지 않고.
“손.”
카일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성녀가 카일 손목을 잡았다. 회랑에서 카일이 성녀 손목을 잡았던 날의 반대였다. 성녀 손가락이 카일 손목을 한 바퀴 다 못 돌았다.
성녀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군의관이 감은 겁니다. 물 닿지 말라고—”
“물 안 닿게 할게요.”
붕대가 풀렸다. 꿰맨 자리. 실 세 땀. 그 둘레가 빨갰다. 알코올에 쓸린.
성녀가 상처를 봤다. 가까이. 코를 대고 냄새도 맡았다. 카일은 손을 빼고 싶었다. 빼지 않았다.
“잘 꿰맸네요. 근데 알코올을 너무 많이 썼어요. 둘레가 다 데었어요. 이러면 새살이 늦게 나요.”
성녀가 카일 손을 놓았다. 이랑 끝으로 갔다. 쪼그려 앉아 무엇을 뜯었다. 초록 잎. 그리고 창고로 가서 작은 질그릇 단지를 들고 나왔다.
“쑥이에요. 첫 쑥. 저번에 심은 씨앗에서 난 거 말고, 담 밑에 원래 있던 거. 그리고 이건 꿀.”
성녀가 돌 위에 쑥을 놓고 다른 돌로 찧었다. 콩콩콩. 초록 물이 돌 위에 번졌다. 거기에 꿀을 한 숟가락. 섞었다.
“꿀은 상처에 좋아요. 벌레가 안 꼬여요. 쑥은 피 멈추게 하고.”
“…기사단 의무실은 그런 거 안 씁니다.”
“그러니까 알코올로 다 데우잖아요.”
성녀가 카일 손을 다시 잡았다.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손바닥을 위로. 쑥과 꿀을 손가락으로 떠서 상처 위에 얇게 펴 발랐다. 꿰맨 실 사이사이로. 차가웠다. 쓴 냄새와 단 냄새가 같이 났다.
카일은 그 손가락을 봤다. 초록 손끝. 자기 손바닥 위를 천천히 오가는. 상처 둘레 데인 자리를 피해서. 아프지 않게.
‘이 손으로 고름을 짰다.’
강림식 날 빛을 내던 손. 그날 카일은 그 손을 가짜라고 생각했다. 소매 속 가루. 지금 그 손이 카일 손바닥 위에 있었다. 빛은 안 났다. 쑥 냄새가 났다.
성녀가 새 천으로 감았다. 군의관 붕대보다 얇게. 손가락이 움직일 수 있게. 매듭을 손등 쪽에 묶었다.
“칼 잡으면 안 돼요.”
“사흘입니다. 군의관 말로는.”
“닷새요. 제 말로는.”
“…닷새.”
“칼 대신 삽도 안 돼요.”
카일이 성녀를 봤다. 성녀가 카일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올려다봤다.
“어떻게 다쳤어요?”
“대련입니다. 루카스.”
“그 지렁이 기사님이요?”
“…예.”
“그분 빨라 보였어요. 근데 기사님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데를 보다가 늦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엇을 봤는지는 더더욱.
성녀가 카일 얼굴을 한참 보다가 손을 놓았다.
†
울타리 쪽에서 지팡이 소리가 났다. 달각, 달각.
오렌 사제였다. 뒤뜰 쪽문으로 나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밭을 둘러봤다. 스무 개 넘는 싹. 걸음을 멈췄다. 한참 그 싹들을 내려다봤다.
“…났구먼.”
오렌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손이 떨리는 건 원래였는데 목소리가 떨리는 건 처음 들었다.
“쉰 해 된 씨앗이. 브루노가 쫓겨나던 날 내 손에 쥐여 준 씨앗이.”
“브루노요?”
성녀가 물었다.
“약초 사제. 이 밭 주인. 쫓겨나서 남쪽 어디 마을로 갔다고 들었소. 그 뒤로 소식이 없었지.”
오렌이 지팡이를 짚고 이랑 사이로 들어왔다. 싹 하나 앞에 쪼그려 앉으려다 무릎이 안 굽혀졌다. 카일이 팔을 내밀었다. 오렌이 잡고 겨우 앉았다.
오렌이 싹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떨리는 손가락.
“카밀레군. 이건 박하. 이건… 모르겠다. 브루노는 알았을 텐데.”
오렌이 고개를 들었다. 카일 손을 봤다. 새 천, 손등 매듭. 쑥 냄새.
“아가씨가 감았소?”
“…예.”
“그 손은 기적보다 낫지.”
오렌이 말했다. 성녀 쪽은 보지 않고. 싹을 보며.
“기적은 한 번이오. 손은 매일이고.”
성녀가 앞치마를 꽉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렌이 카일 팔을 잡고 다시 일어났다. 숨을 골랐다. 그리고 카일만 들리게 낮게 말했다. 성녀가 물통을 들고 우물로 간 사이에.
“기사 양반. 보고서 쓰지요.”
“…예.”
“세 줄?”
“세 줄입니다.”
“신전에도 보고서가 있소. 장부라고 부르지. 들어오는 은화, 나가는 은화.”
오렌이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달각.
“나는 쉰 해 동안 그 장부를 옮겨 적는 일을 했소. 눈이 나빠져서 3년 전에 손을 뗐지. 근데 버릇이 남아서, 지금도 밤에 가끔 서고에 내려가 보오. 늙은이가 잠이 없어서.”
카일은 오렌을 봤다. 오렌은 우물 쪽을 보고 있었다. 성녀가 두레박을 당기는.
“장부라는 게 재미있소. 세 줄짜리 보고서보다 훨씬 길지. 근데 거기에도 안 적히는 줄이 있소. 적혔다가 지워진 줄도.”
“…무슨 줄입니까.”
오렌이 대답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쪽문으로 걸어갔다. 달각, 달각. 문 앞에서 돌아봤다.
“늙은이가 말이 많았소. 손 조심하시오. 그 아가씨가 감은 매듭은 풀지 마시고.”
쪽문이 닫혔다.
카일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렌 말을 머릿속에 적었다. 장부. 적혔다가 지워진 줄.
†
오후 네 시. 루카스가 백탑 뒤뜰 울타리에 나타났다. 손에 종이 꾸러미. 숨을 헐떡이며.
“대장님! 손 괜찮으세요? 저 진짜 죄송해요. 진짜로요. 그래서 이거 사 왔어요.”
루카스가 꾸러미를 펼쳤다. 꿀과자. 왕도 시장 제일 비싼 가게. 꿀을 바른 밀가루 과자가 열두 개. 반짝반짝했다.
“사과의 꿀과자예요. 대장님 단 거 안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근데 이건 진짜 맛있어요. 저 사러 갔다가 세 개 먹고 왔어요. 아니 네 개요.”
카일이 꿀과자를 봤다. 열두 개. 루카스가 네 개 먹었다면 원래 열여섯.
“…고맙다.”
카일이 받으려는데, 옆에서 손이 먼저 나왔다. 흙 묻은 초록 손끝.
성녀가 꾸러미를 받았다. 꿀과자를 하나 집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꾸러미를 다시 쌌다. 단단히. 매듭.
“이거 잿골 애들 줘도 돼요?”
성녀가 루카스에게 물었다. 루카스가 입을 벌렸다.
“…그거 대장님 사과용인데요.”
“기사님은 단 거 안 좋아하신대요.”
“그건 그런데…”
루카스가 카일을 봤다. 구해 달라는 눈.
카일이 성녀를 봤다. 성녀가 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카일을 봤다. 아무 표정 없이. 그런데 눈이 조금 웃고 있었다.
“…잿골 애들 줘라.”
“대장님!”
“바울하고 마리. 둘이 반씩.”
“열두 개를요?!”
성녀가 꾸러미를 안고 창고 쪽으로 갔다. 어깨가 떨렸다. 웃음을 참는.
루카스가 울타리에 매달려 그 뒷모습을 봤다. 그리고 카일을 봤다. 카일 손등의 매듭을 봤다.
“…대장님. 그거 성녀님이 감아 주신 거예요?”
“감시 대상이 호위 기사 부상을 확인한 거다.”
“그 말 저번에도 비슷하게 하셨어요. 감시 대상 근처에서 하는 건 다 감시라고.”
“그래서.”
“아니에요. 그냥요.”
루카스가 울타리에서 내려갔다. 서너 걸음 가다 돌아봤다.
“근데 대장님, 저 오늘 대장님이 왜 늦게 막으셨는지 알 것 같아요.”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뛰어갔다. 이번엔 카일이 아무것도 겨누기 전에.
†
밤. 기사단 숙소.
카일은 오른손으로 펜을 잡으려다 멈췄다. 오른손은 멀쩡했다. 그런데 왼손으로 종이를 눌러야 했다. 왼손바닥이 종이에 닿으면 아팠다. 매듭이 풀릴까 봐 걱정됐다.
카일은 왼손을 종이에서 떼고, 오른손으로 펜을 잡고, 종이가 밀리지 않게 팔꿈치로 눌렀다. 글씨가 삐뚤어졌다.
긴 기록부터 썼다.
「5월 8일. 대련 중 왼손 부상(루카스). 서문 쪽 시녀를 대상으로 착각함.」
카일은 그 줄을 보고 지울까 하다가 두었다. 긴 기록은 거짓말을 안 쓰기로 했다.
「대상이 쑥과 꿀로 다시 처치. 알코올 과다 지적. 칼 닷새 금지.
오렌 사제. 뒤뜰 씨앗은 약초 사제 브루노가 쫓겨날 때 맡긴 것. 「기적은 한 번, 손은 매일.」
오렌 사제. 신전 장부. 「적혔다가 지워진 줄.」 오렌은 쉰 해 동안 장부를 옮겨 적었음. 3년 전 손 뗌. 지금도 밤에 서고에 감.
확인할 것: 장부. 들꽃골 항목이 있는지.」
마지막 줄에 밑줄. 「들꽃골 약속 확인할 것」 아래에 나란히.
그리고 공식 보고서. 오른손으로 쓰는데 왼손을 못 쓰니 종이가 자꾸 밀렸다. 글씨가 아래로 처졌다.
『감시 보고서 — 5월 8일
대상: 휴식 시간에 뒤뜰. 싹이 스무 개 넘게 남.
특이 사항: 호위 기사 부상(대련). 업무 지장 없음.』
(11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