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5월 20일 밤 열한 시. 잿골.
그레타가 준 한 달이 오늘 끝났다. 카일은 그걸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단장실 함에 「특이 사항 없음」을 넣었다. 그레타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내일 북쪽 경계로 가라는 명령도, 계속하라는 명령도.
카일은 그 생각을 접었다. 오늘 밤 잿골이 더 급했다.
저녁 일곱 시, 6층 문 앞에서 카일이 성녀에게 그 말을 했다. 한 달. 오늘 끝난다고. 내일 북쪽 경계로 갈 수도 있다고. 감시 대상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했다.
성녀는 문틀에 기대 그 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그럼 오늘 밤엔 장작 많이 패 주세요.”
그게 대답이었다. 카일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따지기 전에 한나 목소리가 담 너머에서 들렸다.
한나가 저녁 기도 시간에 신전 담 너머로 소리쳤다. 늘 하던 「아가씨!」가 아니었다. 「아가씨, 열이야! 셋이야!」
†
우물가 첫째 집. 날품팔이 집 아들, 열두 살. 둘째 집. 무두질 공방 일꾼, 서른쯤. 셋째 집. 페터 영감 옆집 노파.
셋 다 열이 높았다. 셋 다 오한. 이불을 둘러쓰고 덜덜 떨었다. 땀이 안 났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눈이 붉었다. 그리고 목덜미 아래, 가슴 위쪽에 붉은 점들이 돋기 시작했다.
성녀가 첫째 집 아이 셔츠를 걷었다. 붉은 점을 봤다. 손등으로 이마. 목. 손목 맥. 오래 셌다. 입술이 숫자를 셌다.
카일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점을 봤다.
카일 몸이 굳었다. 손이 문틀을 쥐었다. 붕대 감은 왼손. 상처가 당겼다. 아프지 않았다. 아픈 걸 느끼지 못했다.
붉은 점. 가슴 위. 목덜미 아래. 오한. 마른 입술. 붉은 눈.
열네 살 겨울. 잿골 단칸방. 어머니가 셔츠 단추를 풀며 「카일, 등 좀 긁어 줘, 가려워」 했을 때 본 그 점. 어머니 가슴 위에 돋던. 그다음 날 오한. 그다음 날 백탑 앞 줄.
카일은 문가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처마 밑으로. 숨을 쉬었다. 크게. 강 냄새, 무두질 냄새, 숯 냄새. 열네 살의 냄새.
‘같은 열이다.’
그 겨울 잿골에서 마흔 명이 죽었다. 카일은 그 숫자를 기억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던 날 동네 사람이 셌다. 「올겨울 마흔이야. 마흔.」
성녀가 문가로 나왔다. 카일을 봤다. 처마 밑에 선 카일 얼굴을.
성녀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처마 밑으로 와서 카일 옆에 섰다. 비 오던 밤 무두질 공방 처마처럼. 어깨가 닿게.
“이 열 알아요?”
성녀가 물었다. 낮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막혀서.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는 듯이.
“들꽃골 열이랑 같아요. 붉은 점, 오한, 땀 안 나는 거. 처음 사흘이 제일 중요해요. 땀이 나면 살아요. 안 나면.”
성녀가 말을 멈췄다. 카일을 봤다.
“…땀 나게 하면 돼요.”
“어떻게.”
카일 목소리가 갈라졌다.
“버드나무 껍질, 찬물, 발. 그리고 물. 끓인 물 계속. 오한이 오면 덮어 주고, 열이 오르면 벗기고. 밤새. 사흘. 사람 셋이면 한 사람이 못 해요.”
성녀가 카일 얼굴을 봤다.
“그리고 퍼지지 않게. 끓인 물로 손 씻기. 우물물 그냥 먹지 말기. 아픈 사람 그릇 따로. 이불 삶기.”
카일은 그 말을 들었다. 하나하나. 그 겨울 잿골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것들. 아무도 몰랐던 것들. 대신 백탑 앞에 줄을 섰다.
“나도 갑니다.”
카일이 말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감시니까.”
카일이 덧붙였다. 늦게.
성녀가 웃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일 붕대 감은 손을 봤다.
“그 손은 물에 넣으면 안 돼요. 오른손만 쓰세요. 장작 패고, 물 긷고, 불 지키는 거.”
“알겠습니다.”
“발 주무르는 건 제가 해요.”
“…알겠습니다.”
†
한나가 대장간 화로에 불을 다시 지폈다. 밤 열두 시에. 큰 쇠솥을 올렸다. 대장장이 남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날랐다. 솥 하나 가득.
“끓인 물이 계속 있어야 한대. 아가씨가.”
한나가 화로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팔짱을 끼고. 밤새 불을 지킬 자세.
카일이 장작을 팼다. 오른손으로. 대장간 뒤 장작더미. 저녁에 성녀가 한 말대로 많이. 한나가 화로에 넣는 속도보다 빨리 쌓이게. 대장장이 남편이 물을 길어 오다 장작더미를 보고 멈췄다. 「기사 양반, 그거면 사흘 땐다.」 카일은 도끼를 멈추지 않았다. 「나흘 치 패겠습니다.」 도끼질이 서툴렀다. 한 손이라. 장작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그래도 갈라졌다. 한나가 그걸 보고 아무 말 없이 화로에 넣었다.
성녀는 세 집을 돌았다. 첫째 집 아이. 버드나무 물을 숟가락으로. 찬 천으로 겨드랑이. 발. 둘째 집 일꾼. 그 순서 그대로. 셋째 집 노파. 또 그대로. 다시 첫째 집.
한 바퀴에 한 시간. 성녀 맨발이 골목을 오갔다. 젖은 흙, 우물가 돌, 하수 물웅덩이. 성녀가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지나갔다. 바쁘니까.
카일은 장작을 패다가, 물을 긷다가, 골목을 지나는 성녀 발을 봤다. 발목까지 흙투성이. 엄지발가락 옆 그 긁힌 자리. 또 벌어져 있었다.
새벽 세 시. 첫째 집 아이가 오한으로 이를 딱딱 부딪쳤다. 성녀가 이불을 두 겹 덮었다. 그래도 떨었다. 성녀가 문가를 봤다.
“기사님, 망토요.”
카일이 망토를 벗었다. 회색 망토. 성녀가 받아 이불 위에 덮었다. 아이가 망토 끝을 쥐었다. 떨림이 조금 줄었다.
“기사 망토 덮었다고 나중에 자랑할 거예요.”
성녀가 아이 머리를 쓸며 말했다.
새벽 네 시. 둘째 집 일꾼이 헛소리를 했다. 성녀 이름을 부르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엄마, 엄마」. 서른 먹은 남자가. 성녀가 그 손을 잡았다. 한참. 남자가 조용해졌다.
카일은 문가에서 그걸 봤다. 열네 살 카일은 어머니 손을 잡고 백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누가 이렇게 손을 잡아 줬다면. 어머니 손이 아니라 카일 손을.
카일은 눈을 돌렸다. 장작더미로 갔다. 도끼를 들었다. 내리쳤다. 장작이 반듯하게 갈라졌다. 처음으로.
†
새벽 다섯 시. 동이 텄다.
셋 다 아직 땀이 안 났다. 열이 그대로였다. 성녀가 우물가 돌 위에 잠깐 앉았다. 처음 앉은 거였다. 밤새.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손이 떨렸다. 차가운 물에 천을 적시고 짜기를 수백 번.
카일이 대장간에서 끓인 물을 한 잔 떠 왔다. 식혀서. 성녀에게 내밀었다.
성녀가 받아 마셨다. 다 마셨다. 잔을 내려놓지 않고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잔에 남은 온기라도 손에 담으려는 듯이. 밤새 찬물에 담근 손가락이 하얗게 불어 있었다. 손톱 밑에 버드나무 껍질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카일은 그 손을 보다가 자기 망토를 찾았다. 없었다. 첫째 집 아이 이불 위. 카일은 대신 대장간에서 마른 천 한 장을 가져와 성녀 무릎 위에 덮었다. 성녀가 그걸 내려다봤다. 아무 말 없이 천 끝을 쥐었다. 한나가 대장간 문간에서 그걸 보고 고개를 돌렸다. 화로에 장작을 하나 더 넣었다. 불꽃이 튀었다. 한나는 한참 불만 봤다. 남편이 그 등을 한 번 쓸었다. 크고 검은 손.
“첫날이에요.”
성녀가 말했다. 잔을 쥔 채로.
“아직 첫날이에요. 사흘이에요.”
“…압니다.”
“기사님은 가셔야 해요. 아침 기도 교대.”
카일은 하늘을 봤다. 동쪽이 밝았다. 백탑 꼭대기에 첫 햇빛. 아침 기도까지 두 시간. 성녀도 돌아가야 했다. 아침 기도에 성녀가 없으면 비서 사제가 대주교에게 알린다.
“같이 갑니다.”
“저는 한 바퀴 더 돌고요.”
“그럼 한 바퀴 더 돌고 같이 갑니다.”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우물가 돌 위에서.
“기사님 손이요. 붕대 젖었어요. 물에 넣지 말랬잖아요.”
카일은 왼손을 봤다. 붕대가 축축했다. 장작 패다가, 물 긷다가. 언제 젖었는지 몰랐다.
“…모르게 젖었습니다.”
성녀가 일어났다. 카일 왼손을 잡았다. 붕대를 풀었다. 꿰맨 자리가 조금 부어 있었다. 성녀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단지를 꺼냈다. 쑥과 꿀. 늘 가지고 다니는.
우물가에서. 동트는 빛 아래서. 성녀가 카일 손바닥에 쑥을 바르고 새 천을 감았다. 손이 떨렸다. 밤새 찬물에 담근 손. 그래도 매듭은 단단했다.
“닷새 중에 하루 지났어요. 나흘 남았어요.”
“예.”
“나흘 동안 장작 패면 안 돼요.”
“…사흘 동안 열 지켜야 합니다.”
성녀가 매듭을 묶다 멈췄다. 카일을 봤다.
카일이 말을 이었다. 성녀 손이 자기 손을 잡은 채로.
“그 겨울에 마흔 명이었습니다. 잿골에서. 이 열로.”
성녀가 카일 손을 꽉 쥐었다.
“이번엔 세 명입니다. 지금은.”
“…네.”
“세 명에서 끝나게 하겠습니다. 장작이든 물이든.”
카일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놀랐다. 기사가 장작과 물로 무엇을 끝내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칼로 끝내는 일만 배웠다. 칼은 열을 못 벤다. 그건 열네 살 때 알았다. 그래서 칼을 잡았다. 벨 수 있는 것만 베려고.
지금은 칼을 닷새 못 잡는다. 대신 도끼와 물동이를 잡는다. 그게 이상하지 않았다.
성녀가 오래 카일을 봤다. 그리고 매듭을 마저 묶었다. 단단히. 손등에.
“그럼 오른손만 쓰세요.”
“예.”
“진짜로요.”
“…예.”
성녀가 매듭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눌렀다. 풀리지 않는지 확인하듯. 그리고 일어나 마지막 한 바퀴를 돌러 첫째 집 쪽으로 걸어갔다. 맨발. 진흙. 카일은 물동이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오른손으로만.
†
아침 여섯 시 반. 백탑 6층.
둘이 212칸을 올라왔다. 성녀가 앞에. 카일이 바로 뒤에. 세 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
성녀 걸음이 느렸다. 한 칸 오르고 쉬고. 밤새 맨발로 골목을 오간 발. 카일은 뒤에서 그 발을 봤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 뻗지 않았다. 성녀가 넘어지면 받으려고 팔을 반쯤 들고 올라갔다.
6층. 에마가 세숫대야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둘을 보고 대야를 떨어뜨릴 뻔했다.
“성녀님! 회색 아저씨! 둘 다 꼴이 왜 그래요? 진흙 범벅이에요! 아침 기도 삼십 분 남았어요!”
“에마, 물.”
“네!”
에마가 성녀를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성녀가 돌아봤다.
“오늘 밤에도요.”
“예.”
문이 닫혔다.
카일은 문 앞 벽에 등을 댔다. 미끄러져 내려가 앉았다. 처음으로 바닥에. 의자 대신.
손을 봤다. 손등의 매듭. 진흙 묻은 장화. 망토는 없었다. 첫째 집 아이 이불 위에 두고 왔다.
그레타의 한 달이 어제 끝났다. 오늘은 새 날이었다. 북쪽 경계 명령은 아직 안 왔다.
‘오지 마라.’
카일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명령이 오지 않기를. 기사가 된 지 9년 만에.
『감시 보고서 — 5월 20일
대상: 저녁 기도 후 거처.
특이 사항: 잿골에 열병 환자 셋. 대상과는 무관.』
(12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