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월 2일 밤 열한 시. 잿골.
비가 왔다. 봄비가 아니었다. 굵고 찬 비.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해 밤이 되자 더 굵어졌다.
성녀는 그날 밤도 나갔다. 비가 와도. 바울 동생 마리가 기침을 한다고 한나가 낮에 신전 담 너머로 소리쳐 알렸다. 성녀는 저녁 기도가 끝나자마자 보따리를 쌌다.
카일은 담을 넘었다. 망토가 젖어 무거웠다. 가시에는 안 걸렸다. 지난번에 걸린 자리를 기억했다.
하수 돌계단이 강이 되어 있었다. 빗물이 계단을 타고 콸콸 흘렀다. 성녀가 맨발로 그 물을 밟고 내려갔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카일이 세 걸음 뒤가 아니라 바로 뒤에서 따랐다. 성녀가 미끄러지면 잡을 수 있는 거리.
성녀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한 번도.
한나 집에서 두 시간. 마리는 다섯 살이었다. 기침이 깊었다. 성녀가 아이 등에 귀를 댔다. 오래. 그리고 한나에게 꿀물, 김 쐬기, 베개 높이기를 일렀다. 열은 없었다. 성녀가 그걸 확인하고 숨을 내쉬었다.
“감기예요. 열병 아니에요. 사흘이면 나아요.”
한나가 주저앉았다. 바닥에. 그리고 웃었다.
“아가씨 오면 다 감기야.”
“감기니까 감기라고 하는 거예요.”
마리가 기침을 하다 눈을 떴다. 성녀를 보고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성녀 땋은 머리 끝을 잡았다. 성녀가 머리를 빼지 않고 아이 옆에 누웠다. 짚 요 위에. 젖은 겉옷 그대로. 아이 등을 토닥였다. 박자가 느렸다. 들꽃골 자장가 박자.
카일은 문가에 서서 그걸 봤다. 한나가 카일 옆에 와서 섰다. 팔짱을 끼고.
“기사 양반. 저 아가씨 하루에 몇 시간 자는지 알아요?”
“…모릅니다.”
“나도 몰라. 근데 여기서 자는 거 처음 봐.”
한나가 성녀를 봤다. 아이 옆에서 눈을 감은. 토닥이는 손은 멈추지 않는.
“깨우지 마요. 비 그칠 때까지.”
카일은 깨우지 않았다. 반 시간 뒤 성녀가 스스로 일어났다.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을 하나씩 풀고. 일어나서 카일을 봤다. 잠깐 잔 얼굴로.
“가요.”
†
새벽 한 시. 한나 집을 나섰다.
비가 더 세졌다. 골목이 물바다였다. 하수 돌계단으로 가는 길목에 물이 무릎까지 찼다. 강물이 불어 하수구가 역류하고 있었다.
“못 올라갑니다.”
카일이 말했다. 돌계단 아래에서. 계단 위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성녀가 계단을 올려다봤다. 비에 젖은 얼굴. 두건이 머리에 붙어 있었다.
“기다려요.”
둘은 근처 처마 밑으로 갔다. 무두질 공방 처마. 시큼한 냄새. 처마가 좁았다. 둘이 서니 어깨가 닿을 만큼. 카일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어깨가 처마 밖으로 나갔다. 비가 어깨를 때렸다.
성녀가 카일 소매를 잡아당겼다. 처마 안으로.
“젖어요.”
“이미 젖었습니다.”
“더 젖어요.”
카일은 처마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가 성녀 어깨에 닿았다. 젖은 망토와 젖은 겉옷. 둘 다 차가웠다.
빗소리가 컸다. 처마 끝에서 물이 줄을 지어 떨어졌다. 그 너머로 잿골 지붕들이 보였다. 불은 다 꺼져 있었다. 강물 소리가 빗소리 아래에서 낮게 울렸다.
둘이 한참 말이 없었다.
성녀가 두건을 벗었다. 짰다.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다시 썼다. 맨발을 서로 비볐다. 발가락이 하얗게 쪼글쪼글했다. 물에 오래 있어서.
카일은 망토를 벗었다. 짰다. 물이 쏟아졌다. 펼쳐서 성녀 어깨에 덮었다. 젖은 망토였다. 그래도 겉옷 한 겹보다는 나았다.
성녀가 망토 끝을 쥐었다. 카일을 올려다봤다.
“기사님.”
“예.”
“물어봐도 돼요?”
“…감시 대상이 감시자에게 묻는 건.”
“보고서에 안 쓰면 되잖아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녀는 그걸 허락으로 받았다.
“왜 성녀를 싫어해요?”
빗소리가 계속됐다.
카일은 처마 끝 물줄기를 봤다. 한 줄, 두 줄, 세 줄. 셀 수 없이 많았다.
“…싫어한다고 한 적 없습니다.”
“강림식 날요. 다들 무릎 꿇는데 기사님만 서 있었어요. 부하 기사님 망토도 잡아당겼잖아요. 단 위에서 다 보였어요.”
카일은 그날을 떠올렸다. 수천 명 중에서 왜 경비 줄 맨 끝을 봤는지 몰랐던. 서 있는 사람이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 처음 볼 때 눈이요. 화난 눈이었어요. 저한테 화난 게 아니라. 다른 데 화난 눈.”
카일은 오래 말이 없었다. 성녀가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맨발을 비비며. 망토 끝을 쥐고.
“…열네 살 때.”
카일이 말했다. 처마 끝을 보며.
“잿골에 살았습니다. 여기서 강 쪽으로 세 골목. 지금은 없어진 집.”
성녀가 카일을 봤다. 고개를 돌려서.
“그해 겨울 열병이 돌았습니다. 어머니가 걸렸습니다. 의원은 잿골에 안 왔습니다.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 신전에 다른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매주 한 번 앞뜰 단 위에서 아픈 사람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기적. 다들 그렇게 불렀습니다.”
빗소리.
“어머니를 업고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백탑 앞. 줄이 있었습니다. 사흘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를 업고. 밤에는 담 밑에 앉아서. 어머니가 괜찮다고 했습니다. 버틴다고.”
카일 목소리가 덤덤했다. 성녀가 들꽃골 얘기를 할 때처럼. 너무 덤덤해서.
“사흘째 저녁. 줄 앞에서 열 명쯤 남았을 때. 어머니 이마가 차가워졌습니다. 열이 내린 줄 알았습니다.”
카일은 거기서 멈췄다. 더 말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처마 끝 물줄기가 굵어졌다. 바람이 불어 빗방울이 처마 안으로 들이쳤다. 둘의 발에. 성녀 맨발과 카일 장화에.
성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도, 「힘드셨겠어요」도. 아무것도.
대신 손을 움직였다.
망토 아래에서 성녀 손이 나왔다. 카일 손등 위에 얹혔다. 카일 손은 처마 기둥을 짚고 있었다. 성녀 손이 그 위에. 차가웠다. 젖어서. 풀물 든 손끝.
잠깐이었다. 숨 한 번. 그리고 성녀가 손을 거두었다. 망토 아래로.
카일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처마 기둥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뭇결이 손끝에 느껴졌다. 오래된 기둥. 카일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도 이 공방은 여기 있었다. 그때도 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 옆에도 누가 있었기를 카일은 바랐다. 손등에 남은 차가운 자국. 그런데 차갑지 않았다. 손등이 뜨거웠다.
‘버드나무 껍질, 찬물, 발.’
카일은 그 생각을 했다. 그해 겨울 잿골에 이 사람이 있었다면.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소용없었다.
“…그래서 싫은 겁니다. 성녀가. 기적이.”
카일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기적을 기다리느라 의원을 안 찾았습니다. 의원 찾을 돈으로 헌금을 냈습니다. 어머니가 냈습니다. 마지막 은화를. 줄 서기 전에.”
성녀가 처마 끝을 봤다. 카일이 보던 그 물줄기.
“그래서 감시하러 온 거예요? 가짜 성녀 잡으러?”
“…명령이었습니다.”
“기사님이 하겠다고 한 거죠?”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타가 「너 신전 싫어하잖아」 했을 때 카일은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수 있었다.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무엇을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발끝으로 처마 밑 물웅덩이를 톡 건드렸다. 물결이 퍼졌다. 둥글게, 처마 밖까지. 빗방울이 그 물결을 깨뜨렸다. 성녀가 다시 건드렸다. 또 깨졌다. 세 번째는 건드리지 않았다. 발을 거두고 망토 안으로 넣었다.
“그럼 잘 오셨어요.”
카일이 성녀를 돌아봤다.
“저 가짜예요. 잡으셨어요.”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비에 젖은 얼굴. 웃지 않았다. 진지했다.
“근데 아직 보고 안 하셨잖아요.”
“…예.”
“왜요?”
카일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가짜 성녀는 맨발로 하수 계단을 안 내려갑니다.”
성녀가 눈을 깜빡였다.
“가짜 성녀는 남긴 수프를 잿골로 안 가져갑니다. 고름을 안 짭니다. 백작 딸한테 분 얘기를 안 합니다. 비 오는 밤에 다섯 살 애 기침 소리 들으러 안 옵니다.”
카일이 처마 끝을 다시 봤다.
“그래서 아직 판단 중입니다. 뭐가 가짜인지.”
성녀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망토를 끌어당겨 더 깊이 썼다. 얼굴 반이 망토에 가려졌다. 눈만 보였다.
“…비 그쳐요.”
성녀가 말했다. 망토 안에서. 목소리가 조금 막혀 있었다.
정말이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 물줄기가 하나씩 끊겼다. 하수 돌계단 쪽 물소리가 작아졌다.
†
새벽 세 시. 하수 돌계단.
물이 빠졌다. 계단이 미끄러웠다. 진흙과 이끼. 성녀가 앞서 올랐다. 카일이 바로 뒤에서.
중간쯤에서 성녀가 미끄러졌다. 처음이었다. 이 계단에서 성녀가 미끄러지는 걸 카일은 처음 봤다. 발이 이끼 위에서 뒤로 빠졌다. 몸이 뒤로 기울었다.
카일이 받았다. 두 팔로. 성녀 등이 카일 가슴에 부딪혔다. 가벼웠다. 젖은 망토째로도.
둘이 그대로 멈췄다. 계단 중간. 카일이 성녀를 받친 채로. 성녀가 카일 팔을 잡은 채로.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성녀가 발을 다시 디뎠다. 카일 팔을 놓았다. 다시 올라갔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카일은 뒤에서 따라가며 성녀 발을 봤다. 아까 미끄러진 발. 발목이 조금 빨갰다. 접질리진 않았다. 걸음이 똑바랐다.
그런데 성녀가 미끄러진 게 이끼 때문이 아니라는 걸 카일은 알았다. 이 계단을 백 번은 오르내린 발이었다. 오늘 밤은 발이 아니라 다른 데가 흔들렸다.
카일 얘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걸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바로 뒤에서 따라 올랐다. 미끄러지면 또 받을 수 있는 거리에서.
†
새벽 네 시. 기사단 숙소.
카일은 젖은 옷을 벗고 책상 앞에 앉았다. 장비 상자를 열었다. 긴 기록. 이제 여덟 장.
펜을 들었다.
「5월 2일. 비. 잿골. 한나 집 마리(다섯 살) 기침. 감기. 대상 판단.
새벽 한 시~세 시. 무두질 공방 처마 밑. 대상이 물음. 「왜 성녀를 싫어해요?」
나는」
카일은 거기서 펜을 멈췄다. 「나는」. 긴 기록에 「나」를 쓴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호위 기사」라고 썼다. 「대신함」, 「도움」. 주어 없이.
나는 대답했다. 어머니 얘기를 했다. 열네 살. 사흘. 마지막 은화.
그걸 쓸 수가 없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춰 잉크가 번졌다. 「나는」 뒤에 까만 점.
카일은 펜을 놓았다.
창 너머 백탑 6층. 촛불이 켜져 있었다. 새벽 네 시인데. 성녀도 안 자고 있었다.
카일은 그 촛불을 봤다. 오래. 그리고 손등을 봤다. 처마 기둥을 짚고 있던 손. 그 위에 얹혔던 차가운 손. 숨 한 번.
촛불이 꺼졌다.
카일은 긴 기록을 상자에 넣었다. 「나는」 다음은 비워 둔 채로. 그리고 공식 보고서.
『감시 보고서 — 5월 2일
대상: 저녁 기도 후 거처.
특이 사항: 비. 밤새 많이 옴.』
(10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