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월 20일 저녁 여덟 시. 백탑 6층.
봉쇄가 풀렸다. 6월 17일. 잿골에 새 환자가 닷새 동안 없었다. 시 의회가 봉쇄를 풀었다. 대주교는 그날 앞뜰 단 위에서 말했다. 「성녀님의 기도가 열병을 거두었습니다.」 박수. 헌금함 넷이 다 찼다.
성녀는 단 위에서 그 말을 들었다. 아무 표정 없이.
그날 밤 성녀는 잿골에 내려가 한나에게 그 말을 전했다. 「성녀님 기도가 열병을 거두었대요.」 한나가 크게 웃었다. 대장간이 울릴 만큼. 그리고 장작더미를 가리켰다. 반쯤 남은. 「기도가 장작도 패 줬나 보지.」 페터 영감이 우물가에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같이 웃었다. 바울이 카일 다리에 매달려 「기사 아저씨 기도가 장작 팼대」 하고 깔깔댔다.
성녀도 웃었다. 그런데 카일은 그 웃음이 금방 끝나는 걸 봤다. 성녀가 잿골 사람들 등 뒤로 백탑을 올려다보는 걸. 헌금함 넷이 다 찼다는 걸 성녀도 알았다.
카일은 그날 긴 기록에 숫자를 적었다. 「열병. 5월 20일~6월 12일. 앓은 사람 서른하나. 죽은 사람 둘. 장작 다섯 수레(사비 넷, 오렌 사제 하나). 버드나무 껍질 아홉 다발. 소금 세 자루.」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 「그 겨울: 마흔.」
†
편지는 에마가 가져왔다.
에마 어머니가 왕도 남문 밖 여관에서 일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상인들이 묵는 곳. 거기 들꽃골 쪽에서 온 약초 상인이 하나 있었다. 그 상인이 에마 어머니에게 꾸러미를 맡겼다. 「백탑 신전 성녀님께. 들꽃골 마르타가.」 에마 어머니가 그걸 앞치마에 숨겨 신전 부엌에 넘겼다. 부엌에서 에마에게.
“신전 정문으로 오면 비서 사제님이 다 뜯어봐요. 그래서 부엌으로요.”
에마가 꾸러미를 성녀에게 내밀었다. 6층 문 앞에서. 카일이 옆에 서 있었다.
천으로 싼 작은 꾸러미. 들꽃 한 송이가 끈에 꽂혀 있었다. 말라서 보라색이 바랬다.
성녀가 꾸러미를 받았다. 들꽃을 봤다. 오래.
“엄마 꽃이에요.”
성녀가 꽃잎을 손끝으로 쓸었다. 마른 꽃잎이 바스락거렸다. 하나가 떨어졌다. 성녀가 그걸 주워 손바닥에 다시 올렸다.
성녀가 들꽃을 끈에서 뺐다. 손바닥 위에 놓았다.
“들꽃골에만 피어요. 이름이 없어요. 엄마는 그냥 「우리 꽃」이라고 해요.”
성녀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았다. 열어 둔 채로.
카일은 문 밖에 섰다. 에마가 카일 옆에 섰다. 둘이 문틈으로 방 안을 봤다.
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았다. 꾸러미를 풀었다. 안에 종이 한 장. 접힌. 그리고 마른 풀 한 줌. 말린 약초.
성녀가 종이를 펼쳤다. 읽기 시작했다.
†
카일은 성녀 얼굴을 봤다.
처음엔 웃고 있었다. 아주 조금. 들꽃을 볼 때부터. 종이 첫 줄을 읽을 때도.
그다음 웃음이 멈췄다.
성녀 손가락이 종이 위를 짚었다. 한 줄. 다음 줄.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글을 늦게 배운 사람이 한 글자씩 읽는.
손가락이 멈췄다.
성녀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두 손을 종이 양옆에 놓았다. 그리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에마가 카일 소매를 잡아당겼다. 작게.
“…회색 아저씨.”
카일이 문 안으로 한 발 들어갔다. 문턱을 넘었다. 처음이었다. 열 났던 날 의자를 끌어 앉았던 건 성녀가 망토를 쥐고 있어서였다. 오늘은 아무도 잡지 않았다. 카일이 넘었다.
성녀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카일이 탁자 옆에 섰다. 종이를 내려다봤다. 읽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보였다.
글씨가 크고 삐뚤었다. 성녀 글씨보다 더. 마을 이장이 대신 쓴 글씨. 마르타는 글을 모른다고 했다.
「리아에게.
엄마는 잘 있다. 걱정 마라.
너 간 지 석 달이다. 왕도 신전에서 약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다. 의원도 안 왔다. 이장님이 남부 신전에 두 번 물으러 갔다. 모른다고 한다. 왕도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고.
열병은 봄에 조금 줄었다가 오월에 다시 돌았다. 마을에 아픈 사람이 스물이다. 엄마가 다닌다. 버드나무 껍질이 모자라 산 너머까지 가서 벗긴다.
네가 거기서 잘 먹고 잘 자기를 바란다. 엄마는 괜찮다. 약은 안 와도 된다. 엄마가 하면 된다. 너는 거기서 무리하지 마라.
들꽃이 피었다. 한 송이 보낸다.
엄마.」
카일은 종이에서 눈을 뗐다.
석 달. 약도 의원도 안 왔다. 「모른다고 한다.」
‘들꽃골 약속. 확인할 것.’
긴 기록 맨 위에 밑줄 두 번 그은 줄. 확인됐다. 이렇게.
†
성녀가 움직이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카일은 그걸 봤다. 성녀 얼굴. 눈이 마른 채로. 입술을 꽉 다문 채로.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일은 그 얼굴이 무서웠다. 이 사람이 열흘 밤을 새우고 계단에서 쓰러질 때보다. 페터 영감 고름을 짤 때보다. 대주교가 어깨에 손을 얹을 때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얼굴. 손이 움직이지 않는 얼굴. 이 사람 손은 늘 움직였다. 천을 찢고, 쑥을 찧고, 맥을 세고, 발을 주무르고. 지금 손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냥.
에마가 문간에서 숨을 죽였다.
카일은 탁자 옆에 쪼그려 앉았다. 성녀 눈높이로.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창가 탁자 위에 마른 풀 다발이 매달려 있었다. 쑥, 버드나무, 박하. 성녀가 뒤뜰에서 키워 말린 것들. 바람이 들어와 풀 다발이 흔들렸다. 바스락.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괜찮습니까」는 바보 같았다. 「유감입니다」는 남의 말이었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었다. 옆에.
창밖이 어두워졌다. 저녁 여덟 시 반. 왕성에 불이 켜졌다. 강 건너 기사단 본관 3층. 그레타 방.
성녀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 처음엔 숨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됐다. 어깨가, 그다음 손이. 탁자 위에 놓인 손가락이. 종이 위에.
성녀가 고개를 숙였다. 더 깊이. 땋은 머리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탁자 위로 떨어졌다.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한 방울. 「약은 안 와도 된다」 위에. 글씨가 번졌다.
소리가 없었다. 숨소리도 없었다. 어깨만 떨렸다. 성녀가 우는 걸 카일은 처음 봤다. 소리 없이 우는 사람을.
‘이 사람은 소리를 내면 안 되는 데서 울어 왔다.’
카일은 그걸 알았다. 들꽃골 엄마 앞에서도, 잿골 한나 앞에서도, 신전 사제들 앞에서도. 소리를 내면 누가 「괜찮니」 하고 물으니까. 그럼 「괜찮아요」라고 대답해야 하니까.
카일은 손을 뻗었다. 성녀 어깨에. 대주교 손이 얹혔던 그 어깨.
손이 어깨 바로 위에서 멈췄다. 닿지 않고.
카일은 손을 거두었다. 대신 탁자 위에 놓았다. 성녀 손 옆에. 닿지 않게. 손가락 한 마디 떨어진 데에.
성녀 손가락이 움직였다.
한 마디를 건너왔다. 카일 새끼손가락 옆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 멈췄다. 차가운 손가락.
둘이 그렇게 있었다. 오래.
에마가 문을 닫았다. 조용히. 반만이 아니라 다.
카일은 닫힌 문 너머로 에마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는 걸 들었다. 천천히. 숫자를 세지 않고. 그리고 계단 중간쯤에서 멈췄다. 에마가 계단에 앉은 모양이었다. 누가 올라오면 막으려고.
†
밤 열 시.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코끝이 빨갰다. 성녀가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종이를 다시 접었다. 반듯하게. 들꽃과 함께 꾸러미에 다시 쌌다.
“…세 달이에요.”
성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여기 온 지 석 달. 강림식 전에 한 달 준비했으니까 넉 달. 대주교님이 첫 달부터 보낸다고 했어요. 매달.”
“예.”
“한 번도 안 갔어요.”
“…예.”
성녀가 카일을 봤다. 부은 눈으로.
“기사님 알았어요?”
“의심했습니다. 확인 못 했습니다.”
“언제부터요?”
“뒤뜰. 밭 처음 갈던 날. 편지 왕래가 없다고 하셨을 때.”
성녀가 오래 카일을 봤다.
“그때 말해 주지.”
“확인 못 한 걸 말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님은 확인한 것만 말하죠.”
“예.”
“그래서 확인했습니다라고만 하고.”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녀가 웃었다. 부은 눈으로. 조금.
“그럼 이제 확인했어요?”
카일은 꾸러미를 봤다. 들꽃. 번진 글씨.
“…확인했습니다.”
†
밤 열한 시. 성녀가 일어났다.
창가로 갔다. 창을 열었다. 6월 밤바람이 들어왔다. 강 냄새. 그리고 아래에서 약초밭 냄새. 카밀레가 다 피어 있었다. 하얀 꽃이 달빛 아래.
성녀가 창틀에 손을 짚었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뒤뜰. 담. 그 너머 잿골.
“오늘은 안 갈래요.”
성녀가 말했다. 창밖을 보며.
“잿골이요. 오늘은 안 가도 돼요. 다 나았어요. 한나 언니가 해요.”
“예.”
“…처음이에요. 안 가는 거.”
성녀가 돌아섰다. 창틀에 등을 기댔다. 카일을 봤다.
“기사님도 오늘은 가서 주무세요. 문 밖에 서 있지 말고.”
“교대는 새벽 다섯 시입니다.”
“그럼 의자에 앉아 계세요. 문 밖 의자.”
“…예.”
카일이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았다.
“기사님.”
“예.”
“들꽃골 약이요. 제가 대주교님한테 물어봐도 돼요?”
카일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돌아봤다.
“…아직 묻지 마십시오.”
“왜요?”
“물으면 대주교께서 대답을 준비합니다. 장부를 고치고, 남부 신전에 사람을 보내고. 아직 모른 척하십시오.”
성녀가 카일을 봤다.
“모른 척은 못 해요.”
“단 위에서 하십니다. 매일.”
성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며칠이요?”
성녀가 꾸러미를 가슴에 안았다. 들꽃이 눌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리고 창가 탁자 서랍을 열어 꾸러미를 넣었다. 서랍 안에 다른 것들이 있었다. 카일이 처음 본 날 의자 위에 놓았던 빵 반 덩이는 아니었다. 그건 카일이 망토에 넣었다. 서랍 안엔 회색 실 한 타래. 카일이 물통 고칠 때 쓰고 남은. 언제 가져갔는지 카일은 몰랐다. 묻지 않았다.
“제가 확인할 때까지.”
“그게 며칠인데요.”
카일은 대답을 고르다가, 고르지 않았다.
“모릅니다. 근데 확인하겠습니다.”
문을 닫았다.
†
새벽. 기사단 숙소.
카일은 장비 상자를 열었다. 긴 기록. 이제 열네 장. 맨 위 장을 꺼냈다. 「들꽃골 약속. 확인할 것.」 밑줄 두 번.
카일은 그 장 맨 위에 새로 썼다. 다른 줄보다 크게. 진하게.
「대주교 — 약속 불이행.
증거: 마르타의 편지(6월 20일 도착). 석 달 동안 약·의원 0. 남부 신전도 모름. 대상은 넉 달째 매일 단 위에 섬.」
밑줄을 세 번 그었다.
카일은 그 장을 상자 맨 위에 놓았다.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오래.
새끼손가락 옆에 아직 차가운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성녀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
『감시 보고서 — 6월 20일
대상: 저녁 기도 후 거처. 고향에서 편지 받음.
특이 사항: 대상이 울었음.』
(16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