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월 28일 오후 한 시. 백탑 뒤뜰.
카밀레가 다 졌다. 하얀 꽃잎이 이랑 위에 떨어져 있었다. 성녀가 그 꽃잎을 주워 모았다. 말리면 차가 된다고 했다. 잠 못 자는 사람한테 좋다고.
박하가 무릎까지 자랐다. 손으로 쓸면 냄새가 확 올라왔다. 이름 모를 풀도 세 포기. 오렌이 「브루노는 알았을 텐데」 한 그것. 보라색 작은 꽃이 피려고 했다.
카일은 창고 그늘에 서 있었다. 세 걸음 뒤가 아니라 열 걸음. 요즘은 뒤뜰에서 그렇게 섰다. 성녀가 밭일하는 걸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손이 필요하면 바로 갈 수 있게.
편지 뒤 여드레. 성녀는 매일 단 위에 섰다. 축복하고, 기도하고, 공연에서 정해진 사람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인광 가루 없이. 손에서 빛이 안 나도 대주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병을 거두었으니까. 그걸로 헌금이 충분했으니까.
모른 척. 성녀는 하고 있었다. 단 위에서. 카일 말대로.
그런데 카일은 그게 오래 못 갈 걸 알았다. 성녀 손이 다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단 위에서 축복하다가. 사람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멈출 때가. 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축복합니다」.
†
성녀가 꽃잎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일어나서 카일 쪽으로 걸어왔다. 열 걸음. 창고 그늘.
“기사님.”
“예.”
“7월 초에 하지 축제 있죠.”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축제. 왕도 1년 중 가장 큰 축제. 왕이 왕성에서 내려와 큰길을 행진하고, 신전이 백탑에서 내려와 큰길을 행진하고, 둘이 강 다리 한가운데에서 만난다. 왕과 대주교가 손을 잡는다. 세렌 사람들이 다 큰길에 나온다.
“올해는 성녀가 신전 행진 맨 앞이래요. 대주교님 앞에. 하얀 말 타고.”
“…들었습니다.”
“다리 한가운데서 폐하를 만난대요. 폐하 앞에서 손을 들어서 빛을 보이래요. 인광 가루 다시 넣으래요. 그날만.”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그날 말할 거예요.”
카일은 성녀를 봤다.
“…무엇을.”
“전부요.”
성녀 목소리가 덤덤했다. 대주교 집무실에서 「기도로는 열이 안 내려요」 할 때의 목소리.
“다리 한가운데서. 폐하 앞에서. 세렌 사람들 앞에서.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손에서 빛 나는 건 가루예요. 들꽃골 약속은 안 지켜졌어요. 잿골 열병은 기도가 아니라 장작이랑 버드나무랑 한나 언니가 고쳤어요.”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성녀가 이어 말했다.
“폐하가 들으시면 들꽃골에 약이 갈 거예요. 신전 말고 왕실에서. 폐하는 대주교님을 안 좋아하신대요. 오렌 사제님이 그랬어요.”
“…그러면.”
카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면 당신이 죽습니다.”
뒤뜰이 조용했다. 박하 냄새. 바람이 이랑을 쓸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놀라지 않았다.
“알아요.”
“모르십니다.”
카일이 한 발 다가갔다. 열 걸음이 아홉 걸음, 여덟 걸음. 성녀 바로 앞.
“신성 모독입니다. 신전 법정. 재판관이 대주교입니다. 대주교는 당신 혼자 했다고 할 겁니다. 산골에서 온 약초꾼 딸이 혼자 인광 가루를 구해서, 혼자 신전을 속이고, 혼자 강림식을 꾸몄다고. 폐하가 대주교를 안 좋아하셔도 신전 법정엔 손을 못 댑니다. 그게 이 나라 법입니다. 4백 년 된.”
카일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이었다. 성녀 앞에서.
“그리고 대주교가 다리 위에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말 세 마디 하기 전에 끌어내립니다. 신전 경비가 서른 명 따라옵니다. 그다음은 백탑 지하입니다. 지하에 방이 있습니다. 창 없는.”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아무 표정 없이.
“괜찮아요.”
“안 괜찮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바로. 성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가 눈을 깜빡였다.
“…안 괜찮습니다.”
카일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낮게.
둘이 마주 서 있었다. 창고 그늘 끝. 햇빛과 그늘 경계. 성녀 맨발은 햇빛에, 카일 장화는 그늘에.
“그럼 어떡해요.”
성녀가 물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흔들렸다.
“모른 척하면서 매일 단 위에 서요? 들꽃골은 스무 명이 아파요. 엄마 혼자 산 너머까지 가서 버드나무 껍질 벗겨요. 저는 여기서 손 들고 빛 내고. 헌금함 넷이 차고.”
“…압니다.”
“기사님이 확인한다고 했잖아요. 여드레 지났어요.”
“압니다.”
“그럼 뭐 하고 있어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하고 있었나.’
긴 기록. 열네 장. 대주교 약속 불이행. 밑줄 세 번. 상자 안에. 아무에게도 안 보인.
카일은 그 상자를 생각했다. 그레타에게 가져가면. 그레타가 왕에게. 왕이 대주교를. 그러면 성녀는? 가짜 성녀. 인광 가루. 기사단장 보고서에 다 적혀 있다. 카일이 적었다. 「4월 3일. 강림식. 손의 빛은 인광 가루.」 첫 줄에.
카일이 성녀를 지키려고 적은 기록이 아니었다. 성녀를 잡으려고 적기 시작한 기록이었다.
“시간을 주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하지 축제까지 아흐레입니다. 그 전에. 다른 길을 찾겠습니다. 당신이 다리 위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길.”
“그런 길이 있어요?”
“…모릅니다.”
“모르는데 시간을 달래요?”
“예.”
성녀가 카일을 오래 봤다. 그러다 웃었다. 아주 조금. 지친 웃음.
“기사님은 모르는 건 말 안 한다면서요.”
“예.”
“근데 지금 했어요.”
카일은 그걸 알았다. 9년 동안 확인한 것만 말했다. 지금 처음으로 모르는 걸 약속했다.
“…예.”
성녀가 꽃잎 바구니 쪽을 봤다. 그리고 다시 카일을.
“아흐레요.”
“예.”
“아흐레 동안 모른 척할게요. 그다음엔 말할 거예요.”
“…예.”
†
울타리 쪽에서 소리가 났다. 바스락.
루카스였다. 울타리에 반쯤 걸쳐서. 손에 종이 꾸러미.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다.
카일과 성녀가 동시에 돌아봤다.
루카스가 굳었다. 울타리 위에서. 한쪽 다리는 넘어오고 한쪽 다리는 안 넘어온 채로.
“…저 지금 왔어요.”
“거짓말.”
카일이 말했다.
“…조금 전에 왔어요.”
“얼마나.”
“…안 괜찮습니다, 할 때부터요.”
카일이 이마를 짚었다.
루카스가 울타리를 마저 넘어왔다. 꾸러미를 들고. 조심스럽게. 둘 사이로 걸어왔다. 아무 말 없이. 루카스가 아무 말 없이 걷는 걸 카일은 두 번째로 봤다.
루카스가 꾸러미를 성녀와 카일 사이에 놓았다. 창고 앞 나무 상자 위에. 꿀과자. 반짝반짝한.
그리고 슬그머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세 걸음, 다섯 걸음. 울타리까지.
“루카스.”
카일이 불렀다.
“예.”
“그거 뭐야.”
“꿀과자요. 시장 갔다가요. 잿골 애들 주시라고요. 아니 두 분 드시라고요. 아니 아무나요.”
루카스가 울타리를 넘었다. 넘어가서 울타리 너머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대장님. 저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다리 얘기랑 축제 얘기랑 지하 얘기는요.”
“다 들었구나.”
“…예. 근데 아무한테도 안 해요. 진짜로요.”
루카스 얼굴이 진지했다. 지렁이 얘기할 때와 달랐다.
“그리고 대장님. 다른 길 찾으실 때 저도 불러 주세요. 저 덩치 크잖아요.”
고개가 울타리 너머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뛰지 않고. 걸어서.
성녀가 꿀과자 꾸러미를 봤다. 그리고 카일을 봤다.
“좋은 사람이에요.”
“…눈치가 없습니다.”
“아니에요. 지금은 있었어요.”
성녀가 꾸러미를 풀었다. 꿀과자 하나를 집었다. 이번엔 잿골 애들 몫으로 싸지 않았다. 반으로 쪼갰다. 반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카일은 단 걸 좋아하지 않았다. 받았다. 먹었다. 달았다. 너무 달았다. 그런데 오늘은 괜찮았다.
둘이 창고 앞 나무 상자에 나란히 앉았다. 처음이었다. 나란히 앉은 건. 성녀 맨발이 흙 위에서 흔들렸다. 카일 장화는 가만히 있었다. 박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왔다. 백탑 꼭대기 종이 두 번 울렸다. 휴식 시간이 반 남았다는 종.
“기사님은 단 거 왜 싫어해요?”
“…어릴 때 못 먹어서입니다. 못 먹던 건 커서도 입에 안 붙습니다.”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묻은 손가락을 한 번 더 핥았다.
“저는 반대예요. 못 먹던 거라서 커서 다 맛있어요.”
카일은 그 말을 듣고 성녀 손을 봤다. 꿀과자 반쪽을 쥐고 있던 손. 지금은 빈. 잿골 몫은 이미 싸서 매듭을 지었다. 다 맛있다면서 반 개만 먹은 사람. 카일은 그 반 개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엔 한 개를 통째로 주리라고. 꿀과자 가게가 어딘지 루카스에게 물어봐야 했다.
성녀도 먹었다. 나머지 반. 꿀이 손가락에 묻었다. 성녀가 손가락을 핥았다. 그리고 남은 꿀과자를 다시 쌌다. 매듭. 잿골 애들 몫.
†
저녁 아홉 시. 기사단 숙소.
카일은 장비 상자를 꺼냈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을 열었다.
긴 기록. 열네 장. 맨 위 장. 「대주교 — 약속 불이행.」 밑줄 세 번.
카일은 그 아래 장들을 한 장씩 넘겼다. 4월 3일부터.
「손의 빛은 인광 가루. 오른쪽 소매.」
「대상이 떨어진 가루를 발로 문질러 감춤.」
「뒷담 개구멍, 하수 돌계단, 잿골.」
「대상이 자기 이름을 말함. 리아.」
「인광 가루는 신전이 줌.」
다 사실이었다. 카일이 본 것. 하나도 지어내지 않은.
이 기록을 그레타에게 주면, 대주교의 거짓말이 드러난다. 그리고 성녀의 거짓말도. 같은 종이에. 같은 날짜로.
카일은 상자를 들었다. 일어났다. 문으로 갔다.
단장실. 본관 3층. 계단 마흔 칸. 백탑 212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카일은 계단을 올라갔다. 3층. 복도. 단장실 문 앞. 문 아래 틈으로 불빛. 그레타가 아직 안 잤다. 파이프 냄새.
카일은 문 앞에 섰다. 상자를 안고.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
멈췄다.
‘4월 3일. 손의 빛은 인광 가루.’
그레타가 이걸 읽으면, 첫 줄부터 읽으면. 그레타는 세 줄 넘으면 안 읽는다고 했지만, 이건 읽을 것이다. 다 읽을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 「대주교 — 약속 불이행」을 읽기 전에, 첫 장 「인광 가루」를 먼저 읽을 것이다.
카일은 손을 내렸다.
문 안에서 의족 소리가 났다. 딱. 딱. 창가에서 책상 쪽으로. 그레타가 걷고 있었다. 문 바로 앞까지 왔다. 멈췄다.
카일은 숨을 멈췄다.
의족 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책상 쪽으로.
카일은 상자를 안고 돌아섰다.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마흔 칸.
숙소 방. 상자를 책상 위에 다시 놓았다. 뚜껑을 닫았다.
창 너머 백탑 6층. 촛불이 켜져 있었다.
‘아흐레.’
카일은 그 숫자를 머릿속에 새겼다. 아흐레 동안 다른 길을 찾는다. 성녀가 다리 위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자 첫 장을 그레타가 먼저 읽지 않아도 되는.
그런 길이 있는지 카일은 몰랐다.
모르는 걸 약속했다.
『감시 보고서 — 6월 28일
대상: 휴식 시간에 뒤뜰. 카밀레 꽃잎을 말림.
특이 사항: 하지 축제 행진 준비 중.』
(17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