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7월 5일 밤 열한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
아흐레 중 이레가 지났다. 하지 축제는 모레.
카일은 이레 동안 길을 찾았다. 찾지 못했다.
왕실 법관에게 물었다. 사복으로, 남의 일인 척. 「신전 법정에 선 사람을 왕실이 데려올 수 있습니까.」 법관이 웃었다. 「4백 년 동안 한 번도 없었소. 신전 법정 피고는 신전 것이오.」
오렌에게 물었다. 「대주교가 들꽃골 약값을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있습니까.」 오렌이 고개를 저었다. 「장부는 대주교 방 금고에 있소. 옮겨 적는 사본은 서고에 있지만, 그 사본엔 들꽃골 줄이 아예 없소. 적혔다가 지워진 줄은 원본에만 있지.」
시 의회 서기에게, 남부 신전 사제에게, 왕실 약재 창고지기에게. 다 막혔다.
이레째 밤. 성녀가 6층 문 앞에서 카일에게 물었다. 「찾았어요?」 카일이 대답하지 않았다.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남았어요.」 그리고 문을 닫았다.
카일은 숙소로 돌아와 상자를 봤다. 오래.
그리고 들고 나왔다.
†
단장실 문 앞. 열흘 전 멈췄던 그 자리.
카일은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두드렸다. 세 번.
“들어와.”
그레타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의족을 책상 위에. 파이프.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서류도, 보고서 봉투도. 깨끗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카일이 상자를 책상 위에 놓았다.
그레타가 상자를 봤다. 카일을 봤다.
“이게 뭐야.”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는 세 줄짜리 봉투로 매일 내잖아.”
“원본입니다.”
그레타가 파이프를 입에서 뗐다. 의족을 책상에서 내렸다. 딱. 상자 뚜껑을 열었다.
종이가 가득했다. 열네 장이 아니었다. 스물두 장. 이레 사이에 여덟 장이 늘었다. 길을 찾느라 만난 사람, 들은 말, 막힌 곳.
그레타가 맨 위 장을 꺼냈다. 「대주교 — 약속 불이행.」 밑줄 세 번.
그레타가 그걸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자 맨 밑으로 손을 넣었다. 맨 아래 장을 꺼냈다. 첫 장. 4월 3일.
카일은 숨을 멈췄다.
그레타가 읽기 시작했다. 첫 장부터.
†
한 시간.
그레타는 한 장도 건너뛰지 않았다. 「4월 3일. 강림식. 손의 빛은 인광 가루.」부터. 「대상이 빵 반 덩이를 내밂.」 「식사를 반 이상 남김.」 「뒷담 개구멍, 하수 돌계단, 잿골.」 「대상이 자기 이름을 말함. 리아.」
카일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차렷. 한 시간 동안. 다리가 저렸다. 백탑 212칸을 사람 업고 오를 때보다 길었다. 창이 열려 있었다. 여름밤 바람이 들어와 종이 끝을 들썩였다. 그레타가 손바닥으로 눌렀다. 카일은 창밖 강 건너 백탑을 봤다. 6층 촛불. 아직 켜져 있었다.
그레타가 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 소리가 났다. 사각. 파이프는 꺼져 있었다. 그레타가 다시 불을 붙이지 않았다.
「5월 2일. 비. 잿골. 처마 밑. 대상이 물음. 「왜 성녀를 싫어해요?」 나는」
그레타가 그 장에서 멈췄다. 오래. 「나는」 다음의 빈칸. 잉크가 번진 까만 점.
그레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5월 8일. 대련 중 왼손 부상(루카스). 서문 쪽 시녀를 대상으로 착각함.」
그레타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넘겼다.
「5월 20일~6월 12일. 잿골 열병. 앓은 사람 서른하나. 죽은 사람 둘. 그 겨울: 마흔.」
그레타가 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겨울」. 오래. 그레타는 그 겨울을 알았다. 카일 입단 서류 「지원 동기」 칸에 쓰인 한 줄을 읽은 사람이었다.
「6월 12일. 대상 과로로 쓰러짐. 업고 212칸. 대상이 노래함. 에마가 셈. 거처 안 의자에서 낮을 새움.」
「6월 20일. 마르타의 편지.」
「6월 28일. 대상 결심. 하지 축제 다리 위에서 전부 말하겠다고. 내가 막음. 시간을 달라고 함. 모르는 걸 약속함.」
그다음 여덟 장. 법관, 오렌, 서기, 남부 사제, 약재 창고지기. 막힘, 막힘, 막힘.
그레타가 마지막 장을 내려놓았다. 상자 옆에. 스물두 장이 책상 위에 펼쳐졌다. 단장실 책상이 다 덮였다.
그레타가 파이프를 집었다. 담배를 채웠다.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세 줄 넘게 쓰는 날을 봤군.”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물두 장. 세 줄짜리로 치면 몇 줄이냐. 육백 줄쯤 되나.”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셌다. 읽으면서.”
그레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의족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렸다. 종이 위에. 「4월 3일」 장 위에.
“에벤하르트.”
“예.”
“이 첫 장. 「손의 빛은 인광 가루」. 이걸 왜 나한테 가져왔어.”
카일은 그레타를 봤다.
“이걸 나한테 주면 성녀가 가짜인 증거가 내 손에 들어온다. 네가 석 달 동안 「특이 사항 없음」으로 숨겨 온 게. 내가 이걸 폐하께 올리면 성녀는 끝이야. 신전 법정. 대주교가 혼자 뒤집어씌우겠지. 넌 그걸 알면서 가져왔어.”
“…예.”
“왜.”
카일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타가 기다렸다. 파이프 연기가 책상 위 종이들 위로 흘렀다.
“모레가 하지 축제입니다.”
카일이 말했다.
“그날 대상이 다리 위에서 말합니다. 전부. 제가 막지 못하면. 저는 이레 동안 막을 길을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단장님이 찾아 주십시오.”
그레타가 파이프를 입에서 뗐다.
“저 혼자서는 못 찾습니다. 9년 동안 혼자 했습니다. 이번엔 못 합니다.”
카일 목소리가 낮았다.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레타도 처음 듣는 얼굴을 했다.
“첫 장을 빼고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인광 가루 줄만. 그러면 대주교 약속 불이행만 남습니다.”
“그렇지.”
“그건 거짓말입니다. 긴 기록에는 거짓말을 안 쓰기로 했습니다. 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단장님이 그러셨습니다. 첫날은 한 줄을 뺀다.”
그레타가 카일을 봤다. 오래.
그리고 웃었다. 이번엔 소리를 내서. 짧게. 단장실이 울렸다.
“이 녀석.”
†
그레타가 일어났다. 의족. 딱. 창가로 갔다. 창 너머 백탑. 6층 촛불.
“증거가 약하다.”
그레타가 말했다. 창을 보며.
“마르타 편지는 마을 이장이 대신 쓴 거고, 글 모르는 약초꾼 엄마 말이다. 대주교는 「약은 보냈는데 도중에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끝이야. 남부 길에 도적 많지. 그리고 네 기록. 기사 한 명의 기록이다. 감시 대상에게 정이 든 기사. 대주교 쪽 변호사가 「정이 든」 이 세 글자로 다 뒤집는다.”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이 든.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레타가 돌아섰다.
“대주교는 폐하의 사촌 형이다.”
카일은 그걸 알았다. 왕도 사람이면 다 알았다. 선왕의 조카.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 신전으로 간. 그래서 폐하가 대놓고 손을 못 대는.
“폐하께서는 대주교를 안 좋아하신다. 근데 안 좋아하는 사촌 형을 증거 없이 치면, 귀족들이 폐하를 의심한다. 왕이 신전을 먹으려 한다고. 4백 년 동안 왕실이 신전 법정에 손 안 댄 이유가 그거야.”
“…그럼 모레는.”
“모레 다리 위에서 그 아가씨가 말하면.”
그레타가 책상으로 돌아왔다. 첫 장 위에 올린 의족을 내렸다. 종이를 집었다. 「4월 3일」.
“이 종이가 그 아가씨를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데 쓰인다. 대주교 쪽에서 먼저 「왕실 기사가 석 달 전부터 가짜인 걸 알고 있었다」고 하면, 그 아가씨는 사기꾼이고 넌 공범이야.”
카일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레타 말이 맞았다. 카일이 석 달 반 동안 쓴 종이가 성녀를 묶는 밧줄이 될 수 있었다. 한 장 한 장 사실만 적었는데. 사실이 사람을 지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카일은 그걸 오늘 배웠다.
그레타가 종이 스물두 장을 모았다. 반듯하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순서대로. 상자에 넣었다.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상자를 들고 단장실 벽 쪽으로 갔다. 왕의 문장이 새겨진 쇠문. 금고. 목에 건 열쇠를 꺼냈다. 열었다.
금고 안에 종이가 조금 있었다. 열 장도 안 되는. 그중 두 장이 카일 눈에 들어왔다. 순찰 일지. 「4월 5~6일 밤. 회색 망토 하나가 신전 뒷담을 넘어감.」 「4월 10일 밤. 갈색 외투 입은 키 큰 남자가 페터 영감 집을 방문.」
카일이 그레타를 봤다.
그레타가 상자를 그 두 장 위에 넣었다.
“네 상자는 여기 둔다. 이 금고는 폐하와 나만 열 수 있어. 대주교 쪽에서 이걸 먼저 손에 넣을 일은 없다.”
금고 문이 닫혔다. 철컥.
“모레는.”
그레타가 열쇠를 다시 목에 걸었다.
“그 아가씨한테 전해. 다리 위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빛도 내고, 손도 흔들고, 폐하랑 대주교가 손잡는 거 보고 박수 치라고.”
“…그 사람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레 전에 그랬습니다. 아흐레 동안만 모른 척한다고.”
“그럼 네가 설득해.”
그레타가 의자에 앉았다.
“나한테 시간을 줘. 아흐레가 아니라. 더. 증거를 모을 시간. 대주교 원본 장부. 잿골 사람들 말. 남부 신전 기록. 하나로는 약해도 열이 모이면 무겁다. 그때 내가 폐하께 간다. 이 상자 들고. 첫 장까지 다.”
카일이 그레타를 봤다.
“그때 그 아가씨가 말할 자리를 만들어 주지. 다리 위가 아니라. 폐하 앞에서. 끌려가지 않을 자리.”
단장실이 조용했다. 파이프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확인했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그리고 에벤하르트.”
“예.”
“5월 2일 장. 「나는」 다음에 뭐라고 쓰려고 했는지는 안 물어보겠다.”
카일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굳었다.
“그것까지 읽으면 내가 너무 늙은이가 되니까.”
†
카일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레타는 혼자 앉아 있었다. 금고를 봤다. 쇠문. 그 안의 상자.
창 너머로 백탑 6층 촛불이 꺼졌다.
그레타가 일어났다. 의족. 창가로 갔다. 창을 닫으려고 손을 뻗었다.
멈췄다.
창 아래. 본관 3층 창 바로 밑 처마. 처마 위에 그림자 하나. 사람. 웅크리고 있었다. 그레타가 창을 열고 내다보려는 순간 그림자가 움직였다. 처마를 따라 기어서, 모퉁이 홈통을 타고 내려갔다. 빨랐다. 땅에 내려서서 뛰었다. 기사단 마당을 가로질러, 서문 쪽으로.
키가 컸다. 어깨가 넓었다. 턱이 각졌다. 달빛에 턱선만 보였다.
그리고 망토. 회색이 아니었다. 하얀 바탕에 금실. 신전 경비대.
그레타가 창틀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한 시간.”
그레타가 혼잣말을 했다. 카일이 서 있던 한 시간. 창은 열려 있었다. 여름이라. 파이프 연기를 빼느라.
그레타가 창을 닫았다. 빗장을 걸었다. 그리고 금고를 돌아봤다.
『감시 보고서 — 7월 5일
대상: 하지 축제 행진 준비.
특이 사항: 원본 제출. 단장님 금고.』
(18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