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4월 3일 정오. 백탑 대신전 앞뜰.
카일 에벤하르트는 경비 줄 맨 끝에 서 있었다. 회색 망토, 허리에 검, 두 손은 등 뒤로. 앞뜰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왕도 세렌 사람 절반이 온 것 같다고 옆에서 루카스가 말했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숫자를 셌다. 앞줄 귀족 의자 백이십 개. 그 뒤로 선 사람들. 담 위에 올라앉은 아이들. 강 건너 지붕 위에까지 사람이 있었다.
“대장님, 저기 보세요. 저게 기적의 단이래요.”
루카스가 턱으로 가리켰다. 앞뜰 한가운데 하얀 돌로 쌓은 단. 사람 키만 한 높이. 단 위에 금실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끝에 일곱 개의 촛대.
“예순 년 만의 성녀 강림이래요. 남부에서 오셨대요. 산골에서 기도하다가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대요.”
“누가 그래.”
“다들요.”
카일은 다들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열네 살 이후로.
종이 울렸다. 일곱 번. 백탑 꼭대기 종. 소리가 강을 건너 왕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앞뜰이 조용해졌다.
대주교 마르쿠스 벨이 먼저 나왔다. 하얀 수염, 금실 사제복. 걸음이 느리고 부드러웠다. 단 앞에서 두 팔을 벌렸다.
“세렌의 자녀들이여. 오늘 신께서 우리에게 다시 손을 내미셨습니다.”
목소리가 낮고 따뜻했다. 앞줄 귀족 부인 몇이 벌써 손수건을 꺼냈다. 카일은 대주교 손을 봤다. 반지가 다섯 개. 그중 둘은 왕실 보물 목록에서 본 적 있는 모양이었다.
‘기부금이 줄었다더니.’
카일은 그 생각을 접었다. 오늘 임무는 경비였다. 사람이 넘어지지 않게, 소매치기가 없게, 귀족 의자 쪽으로 밀려들지 않게.
†
성녀가 나왔다.
작았다. 카일이 처음 든 생각이 그거였다. 사제 둘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데, 사제들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 하얀 옷. 길고 넓은 소매. 갈색 머리를 하나로 땋아 등 뒤로 늘였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맨발이었다.
카일은 그걸 봤다. 하얀 옷자락 아래로 맨발 두 개. 돌바닥 위를 걸었다. 4월 초. 돌은 아직 찼다. 발끝이 빨갰다.
“맨발이시네.”
루카스가 속삭였다.
“신성한 땅에 신을 신지 않는 거래요. 성녀님은.”
“누가 그래.”
“…다들요.”
성녀가 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 일곱 칸. 발이 계단에 닿을 때마다 아주 잠깐 멈췄다. 찬 돌. 카일은 그 멈춤을 셌다. 일곱 번.
단 위에 섰다. 대주교가 성녀 뒤에 섰다. 손을 성녀 어깨 위에 얹었다. 성녀 어깨가 조금 굳었다. 카일은 그것도 봤다.
“신의 딸이여. 세렌에 빛을 보여 주소서.”
성녀가 두 손을 들었다. 넓은 소매가 팔꿈치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바닥을 하늘로.
빛이 났다.
푸르고 하얀 빛. 손바닥 위에서 피어올랐다. 작은 불꽃 수백 개가 손에서 솟아 흩어지는. 정오 햇빛 아래서도 보였다. 앞뜰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켰다. 누가 무릎을 꿇었다. 그 옆 사람도. 파도가 밀려가듯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귀족 의자에서도 몇이 일어났다가 무릎을 꿇었다.
루카스가 무릎을 반쯤 굽혔다. 카일이 루카스 망토 끝을 잡아당겼다.
“경비는 서 있어.”
“아, 예.”
빛이 꺼졌다. 열을 세기 전에. 성녀가 손을 내렸다. 소매가 다시 손목을 덮었다.
카일은 서 있었다. 경비 줄 맨 끝. 단에서 스무 걸음. 그리고 봤다.
성녀가 손을 내릴 때, 오른쪽 소매 끝에서 무엇이 떨어졌다. 아주 조금. 바람에 날렸다. 푸른 가루. 단 위 금실 천에 내려앉았다. 햇빛에 반짝였다. 다시 빛나지는 않았다.
카일은 그 가루가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기사단 야간 훈련 때 쓰는 신호 가루. 인광석을 빻은 것. 손바닥에 비벼 열을 주면 잠깐 빛난다. 밤 숲에서 서로 위치를 알리는 데 쓴다. 한 봉에 은화 둘.
카일은 성녀 얼굴을 봤다.
성녀는 앞뜰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무릎 꿇은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자기 오른쪽 소매 끝을 보고 있었다. 떨어진 가루를. 그리고 맨발 하나를 조금 움직였다. 금실 천 위의 가루를 발가락으로 문질렀다. 가루가 천 결 사이로 들어갔다. 보이지 않게 됐다.
그 발가락이 빨갰다. 찬 돌 때문에.
카일은 그날 처음으로 성녀와 눈이 마주쳤다. 스무 걸음 너머. 성녀가 고개를 들었고, 수천 명 중에서 왜 경비 줄 맨 끝을 봤는지 카일은 몰랐다. 서 있는 사람이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성녀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웃지도, 놀라지도. 그냥 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
강림식은 두 시간 걸렸다. 축복, 찬송, 대주교의 긴 말, 귀족들의 헌금 행렬. 헌금함이 세 번 바뀌었다. 성녀는 그동안 단 위에 서 있었다. 맨발로. 의자는 대주교 것만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 카일은 단 옆을 지나갔다. 금실 천을 사제들이 걷고 있었다. 카일은 허리를 굽혀 장화 끈을 고치는 척했다. 천이 걷힌 단 돌바닥에 푸른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찍었다. 장갑에 묻었다.
“대장님, 뭐 하세요?”
“끈.”
“대장님 장화 끈 없는 거잖아요. 버클인데.”
카일은 일어났다.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다물었다.
“성녀님 진짜 예쁘던데요.”
루카스가 화제를 바꿨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작으시고. 맨발이시고. 빛 나실 때 저 진짜 소름 돋았어요. 대장님은요?”
“발이 시려 보였다.”
“…네?”
†
저녁 일곱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
그레타 볼크가 창가에 서 있었다. 은발을 짧게 깎은 뒤통수. 파이프 연기. 왼다리 의족이 바닥을 짚을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났다.
“문 닫아.”
카일이 문을 닫았다. 루카스도 따라 들어오려다 문에 코를 박았다.
“에벤하르트. 오늘 강림식 봤지.”
“봤습니다.”
“어땠어.”
카일은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 끝에 묻은 푸른 가루를 책상 위에 털었다. 그레타가 고개를 숙여 봤다. 파이프를 입에서 뗐다.
“인광 가루군.”
“단 위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성녀 소매에서.”
그레타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흔들렸다.
“그럴 줄 알았지.”
그레타가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봉인이 뜯겨 있었다. 왕실 문장.
「왕명. 백탑 대신전 성녀에게 왕실 기사 한 명을 호위로 붙인다. 호위 기사는 성녀의 언행을 매일 기사단장에게 보고한다.」
“호위.”
“명목상.”
그레타가 파이프로 종이를 툭 쳤다.
“폐하께서는 대주교를 못 믿으신다. 사촌 형인데도. 기부금이 3년 사이 반으로 줄었는데 갑자기 성녀가 나타났어. 남부 산골에서. 누가 봐도 냄새가 나지. 근데 신전 일에 왕이 대놓고 손을 못 대. 그래서 호위야. 네가 가서 보고 와. 가짜면 가짜인 증거를.”
“왜 저입니까.”
“너 신전 싫어하잖아.”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놈이 제일 잘 보지. 좋아하는 놈은 빛만 봐. 저 녀석처럼.”
그레타가 문을 가리켰다. 문 너머에서 루카스가 코를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보고는 매일. 세 줄.”
“세 줄입니까.”
“세 줄 넘기면 안 읽는다. 나는 바빠. 날짜, 대상, 특이 사항. 끝.”
“확인했습니다.”
카일이 경례했다. 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그레타가 말했다.
“에벤하르트.”
“예.”
“발이 시려 보였다며. 루카스가 복도에서 떠들더라.”
카일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서 있었다.
“그런 건 보고서에 쓰지 마.”
“…쓸 생각 없었습니다.”
“그래. 가 봐.”
†
밤 열 시. 백탑 대신전.
탑은 일곱 층이었다. 성녀 방은 6층. 계단은 안쪽 벽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카일은 올라가면서 칸을 셌다. 기사의 버릇이었다. 도망칠 길, 지킬 길. 숫자로 머리에 넣어 둔다.
212칸.
6층 복도는 짧았다. 문 하나. 하얀 나무 문. 문 앞에 의자 하나. 호위 기사 자리라고 사제가 말했다. 사제는 카일을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서둘러 내려갔다. 계단 아래로 촛불이 멀어졌다.
카일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문 옆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창이 하나 있었다. 복도 끝. 왕성 쪽을 보는 창. 강 건너 언덕 위 왕성에 불이 몇 개 켜져 있었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 불도. 그레타는 아직 안 잤다.
카일은 머릿속으로 보고서를 썼다.
날짜. 4월 3일. 대상. 성녀. 강림식 거행. 특이 사항. 인광 가루.
세 줄이면 충분했다. 첫날에 끝나는 임무였다. 가루를 증거로 가져가면 그레타가 왕에게 올리고, 왕이 대주교를 부르고. 성녀는 남부 산골로 돌려보내지거나, 그보다 나쁘게 되거나.
그보다 나쁘게.
카일은 그 생각에서 멈췄다. 사기죄. 신성 모독. 신전이 직접 재판하면 대주교는 성녀 혼자 했다고 하겠지. 산골에서 온 여자가 혼자 인광 가루를 구해서 혼자 강림식을 꾸몄다고.
‘그건 내 일이 아니다.’
카일은 벽에 등을 댄 채로 눈을 감았다. 증거를 찾아 보고하는 것까지가 일이었다.
문 안에서 소리가 났다.
발소리. 맨발이 나무 바닥을 걷는 소리. 작고 가벼웠다. 문 쪽으로 왔다. 멈췄다. 문 너머에서 숨소리가 났다. 문에 귀를 댄 모양이었다.
카일은 눈을 떴다. 움직이지 않았다.
문고리가 돌아갔다. 천천히. 문이 손바닥 하나만큼 열렸다. 틈으로 촛불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눈 하나.
갈색 눈이 카일을 봤다. 아래에서 위로. 카일 장화부터 망토, 검, 얼굴까지. 키 차이가 커서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문이 조금 더 열렸다.
성녀가 서 있었다. 하얀 옷 대신 낡은 갈색 잠옷. 땋은 머리를 풀어 어깨에 흩어 놓았다. 맨발. 한 손에 촛대, 한 손에 빵 반 덩이.
왼쪽 귀 밑에 작은 점이 있었다. 카일은 그걸 봤다. 낮에 단 위에서는 머리를 땋아서 못 본.
성녀가 빵을 내밀었다.
“배고프세요?”
목소리가 낮고 조금 쉬어 있었다. 남부 말씨가 끝에 붙었다. 두 시간 단 위에서 찬송을 따라 부른 목.
카일은 빵을 봤다. 저녁 식사에 나온 하얀 빵. 반을 뜯은 자국. 나머지 반은 어디 갔는지.
“…근무 중입니다.”
“근무 중에도 배는 고파요.”
성녀가 빵을 더 내밀었다. 카일 가슴 높이까지. 팔을 끝까지 뻗어서.
카일은 받지 않았다. 성녀는 빵을 거두지 않았다. 둘이 문틈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호위 기사 카일 에벤하르트입니다. 오늘부터 문 앞에 있습니다.”
“알아요. 사제님이 말해 줬어요. 왕실에서 오는 분이라고.”
성녀가 카일 망토를 봤다. 회색 망토. 왕실 기사단.
“감시하러 오셨죠?”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녀도 더 묻지 않았다. 빵을 문 옆 의자 위에 놓았다. 호위 기사 자리라던 그 의자.
“앉으세요. 밤 길어요.”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촛불 빛이 문 아래 틈에서 한참 있다가 꺼졌다.
카일은 의자 위의 빵을 봤다. 반 덩이. 아직 따뜻하지 않았다. 저녁 먹을 때부터 이 사람이 손에 쥐고 있던 빵.
카일은 앉지 않았다. 빵도 먹지 않았다.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새벽 세 시쯤, 문 안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누가 맨발로 창가에 가서 서는 소리. 한참 서 있다가 돌아오는 소리.
카일은 그날 밤 보고서를 쓰지 못했다. 새벽에 교대가 오자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서,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고 한참 있었다. 인광 가루라고 쓰려다가, 맨발이라고 쓰려다가, 빵이라고 쓰려다가.
결국 세 줄만 썼다.
『감시 보고서 — 4월 3일
대상: 성녀. 강림식 후 6층 거처로 들어감.
특이 사항: 관찰 계속.』
(1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