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2화. 수프를 남김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09:30:21

4월 4일 아침 여섯 시. 백탑 6층.

카일은 다시 문 앞에 서 있었다. 교대하고 두 시간 자고 돌아왔다. 의자 위 빵은 그대로 있었다. 반 덩이. 밤새 굳어 있었다.

문이 열렸다. 이번엔 성녀가 아니었다.

“아! 회색이다!”

열여섯쯤 된 여자아이가 문을 열고 나오다 카일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흰 두건, 주근깨, 손에 세숫대야. 물이 출렁여 카일 장화에 튀었다.

“죄송해요! 아니, 안 죄송해요, 왜 문 앞에 서 계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저씨가 왕실에서 온 회색 아저씨예요? 사제님들이 그러던데요, 회색 망토 입은 무서운 사람 온다고.”

“…호위 기사 카일 에벤하르트.”

“에마예요. 수련 수녀요. 성녀님 시중들어요. 회색 아저씨는 아침 드셨어요? 안 드셨죠? 얼굴이 안 드신 얼굴이에요.”

에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세숫대야를 들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도 말했다. 「저 빵 성녀님이 준 거죠? 왜 안 드셨어요? 성녀님 서운하실 텐데.」 목소리가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내려갔다.

카일은 의자 위 빵을 봤다.

‘서운할 일이 아니다.’

빵을 집어 망토 안주머니에 넣었다. 버리면 저 아이가 또 떠들 게 뻔했다.

†

성녀의 하루는 정해져 있었다. 대주교 비서 사제가 종이 한 장을 줬다.

「여섯 시 기상. 일곱 시 아침 기도(본당). 여덟 시 아침 식사. 아홉 시~열두 시 축복(앞뜰 기적의 단, 신도 행렬). 열두 시 점심. 한 시~네 시 휴식 및 묵상. 네 시 저녁 기도. 여섯 시 저녁 식사. 일곱 시 이후 거처.」

카일은 종이를 접어 넣었다. 호위 기사는 성녀가 탑 밖으로 나갈 때 세 걸음 뒤에서 따른다. 탑 안에서는 문 앞.

일곱 시. 아침 기도.

성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하얀 옷, 땋은 머리. 맨발. 카일을 봤다. 아무 말 없이 계단으로 갔다. 카일이 세 걸음 뒤에서 따랐다.

212칸. 성녀는 계단을 내려가며 한 번도 난간을 잡지 않았다. 맨발이 돌계단을 디딜 때 소리가 거의 없었다. 카일 장화 소리만 탑 안에 울렸다. 쿵, 쿵. 성녀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장화를 봤다. 다시 내려갔다.

본당 기도는 한 시간이었다. 성녀는 맨 앞 제단 아래 무릎을 꿇었다. 대주교가 제단 위에서 기도문을 읽었다. 성녀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움직였다. 기도문을 따라 하는 것 같았다. 카일은 본당 기둥 옆에서 그 입술을 봤다. 기도문은 「영광」으로 시작하는데 성녀 입술은 그 박자에 맞지 않았다.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지.’

카일은 그 생각을 적어 두었다. 머릿속에.

†

여덟 시. 아침 식사.

성녀 식사는 5층 작은 식당에서 했다. 긴 탁자 하나. 성녀 혼자. 에마가 시중. 카일은 문 옆.

식사가 나왔다. 하얀 빵 두 덩이, 버터, 꿀, 삶은 달걀 둘, 고기 수프 한 그릇, 우유 한 잔, 사과 하나. 기사단 아침의 세 배였다.

성녀가 기도를 짧게 했다. 수프를 떴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세 숟가락. 숟가락을 놓았다.

수프가 그릇에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성녀가 빵을 하나 뜯었다. 반을 먹었다. 나머지 반과 다른 빵 하나를 무릎 위 냅킨으로 쌌다. 냅킨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소매 안에 넣었다. 달걀 하나도. 사과도.

에마가 아무 말 없이 수프 그릇을 들고 나갔다. 카일은 에마가 그 그릇을 어디로 가져가는지 봤다. 부엌이 아니라 계단 위로. 6층으로.

카일은 그걸 그대로 머릿속에 적었다. 식사를 반 이상 남김. 빵과 달걀과 사과를 숨김. 남은 수프를 거처로 옮김.

‘사치를 안 부리는 척인가. 아니면 굶주린 산골 버릇인가.’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카일을 봤다. 카일 눈이 성녀 소매에 가 있는 걸 봤다.

성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매를 내리지도 않았다. 우유를 마셨다. 다 마셨다. 그건 남기지 않았다.

†

아홉 시부터 열두 시. 축복.

기적의 단 앞에 줄이 섰다. 아침부터. 앞뜰 문 밖까지 이어졌다. 아이를 안은 엄마, 지팡이 짚은 노인, 붕대 감은 남자. 성녀는 단 위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의자가 있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올라와 무릎을 꿇었다. 성녀가 그 머리에 손을 얹었다. 짧게 무슨 말을 했다. 사람이 내려갔다. 다음.

카일은 단 아래 세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성녀 말이 들렸다.

“아이 열이 언제부터예요?”

“사흘째예요, 성녀님.”

“물 많이 먹이세요. 끓였다 식힌 물. 이마 말고 겨드랑이를 닦아 주세요.”

“…예?”

“축복합니다.”

다음 사람.

“무릎이 아프세요?”

“예, 겨울부터.”

“밤에 더 아파요, 아침에 더 아파요?”

“아침에요.”

“일어나기 전에 이불 속에서 무릎을 열 번 굽혔다 펴세요. 축복합니다.”

카일은 그걸 들으며 서 있었다. 줄은 줄지 않았다. 성녀 손이 사람 머리 위에 얹히고,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 한두 마디. 축복합니다. 다음. 대주교 쪽 사제가 단 옆에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성녀님, 축복만.」 성녀는 듣지 않았다.

열한 시쯤 해가 단 위로 올라왔다. 성녀 이마에 땀이 났다. 하얀 옷이 등에 붙었다. 맨발이 단 돌바닥 위에서 가끔 자리를 바꿨다. 해에 달궈진 돌.

카일은 그 발을 봤다. 어제는 차가워서 빨갰고, 오늘은 뜨거워서 빨갰다. 단 아래 줄에 선 사람들은 아무도 그 발을 보지 않았다. 다들 성녀 손만 봤다. 빛이 나던 손.

‘신을 신으면 되지.’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한 자기가 이상했다. 신을 신든 말든 감시 대상의 일이었다.

†

오후 한 시. 휴식 및 묵상.

성녀는 6층으로 올라갔다. 카일은 문 앞. 문 안에서 소리가 났다. 맨발로 왔다 갔다 하는 소리. 물 붓는 소리. 무엇을 찢는 소리. 그리고 낮게 흥얼거리는 소리. 노래였다. 가사는 안 들렸다. 남부 가락.

에마가 계단을 올라왔다. 손에 바구니. 바구니에 천 조각이 잔뜩.

“회색 아저씨, 점심 드셨어요?”

“먹었다.”

“거짓말. 아저씨 아침부터 여기 서 있었잖아요.”

에마가 바구니에서 무엇을 꺼냈다. 삶은 달걀. 아침에 성녀 소매로 들어간 그 달걀.

“성녀님이 아저씨 드리래요.”

카일은 달걀을 봤다. 받지 않았다.

“감시 대상이 주는 걸 받지 않는다.”

“감시요?”

에마 눈이 동그래졌다.

“호위 아니고 감시예요? 성녀님 감시하러 왔어요? 왜요? 성녀님 아무것도 안 하는데. 기도하고 축복하고 밥 남기고 그게 다예요.”

“밥은 왜 남기지.”

에마가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가 입을 다무는 걸 카일은 처음 봤다.

“…그건 성녀님한테 물어보세요.”

에마가 달걀을 의자 위에 놓았다. 어젯밤 빵이 있던 자리. 그리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카일은 방 안을 잠깐 봤다.

창가 탁자 위에 단지가 하나 있었다. 뚜껑 덮인 질그릇 단지. 그 옆에 냅킨 꾸러미들. 하나, 둘, 셋. 그리고 성녀가 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천을 찢고 있었다. 긴 띠로. 붕대 폭.

문이 닫혔다.

†

저녁 여섯 시. 저녁 식사.

아침 일이 또 있었다. 고기 수프 반 넘게 남김. 빵 숨김. 이번엔 구운 닭 다리 하나도 냅킨에 쌌다. 기름이 냅킨 밖으로 배어 나왔다. 성녀가 그걸 소매에 넣다가 멈췄다. 하얀 옷에 기름 얼룩. 성녀가 얼룩을 봤다. 카일을 봤다. 카일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성녀가 닭 다리를 꺼내 탁자 위에 다시 놓았다. 그리고 에마를 불렀다.

“에마. 이거.”

“네, 성녀님.”

에마가 앞치마 주머니에 닭 다리를 넣었다. 냅킨째로.

카일은 머릿속에 적었다. 시중 수녀가 공범.

‘공범이라니.’

닭 다리 하나에 공범이라는 말은 너무 컸다. 카일은 그 말을 지웠다.

†

저녁 일곱 시. 계단.

성녀를 6층까지 데려다주고 카일은 물을 길으러 내려갔다. 3층 계단참에서 노인 하나를 만났다. 등이 굽은 사제. 지팡이를 짚고 한 칸 오르고 쉬고, 한 칸 오르고 쉬었다. 손이 떨렸다. 지팡이 끝이 돌계단 위에서 달각달각 소리를 냈다.

카일은 노인 옆에 섰다. 팔을 내밀었다. 노인이 카일 팔을 잡았다. 손이 가볍고 차가웠다.

“고맙소. 왕실 기사 양반이군. 회색 망토.”

“카일 에벤하르트입니다.”

“오렌이오. 이 탑에서 제일 늙은 사제. 이 계단이 212칸인 걸 쉰 해째 세고 있소.”

둘이 같이 한 칸씩 올랐다. 오렌은 4층 작은 방 앞에서 멈췄다. 숨을 고르며 카일을 올려다봤다.

“그 아이 밥 남기는 거 봤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봤군. 기사 양반 눈이 그렇게 말하네.”

오렌이 지팡이로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탑 바깥, 강가 쪽.

“남긴 밥이 어디로 가는지도 보시오. 보고서는 그다음에 쓰고.”

오렌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카일은 계단참에 서서 그 문을 한참 봤다. 그리고 물동이를 들고 다시 내려갔다.

†

밤 아홉 시. 6층 문 앞.

카일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의자 위의 달걀은 그대로 있었다. 에마가 두고 간.

복도 끝 창으로 왕도가 보였다. 강, 다리, 왕성. 그리고 탑 바로 아래 언덕 끝, 강가 쪽에 불빛이 몇 개 깜빡였다. 낮은 지붕들. 굴뚝 연기. 왕도 지도에서 「잿골」이라고 적힌 동네. 대장간과 무두질 공방과 날품팔이들이 사는 강가.

카일은 잿골을 오래 봤다. 어머니가 거기서 살았다. 카일이 열네 살 때까지.

그해 겨울 잿골에 열병이 돌았다. 어머니도 걸렸다. 카일은 어머니를 업고 이 언덕을 올라왔다. 백탑 앞. 그때도 줄이 있었다. 「기적을 기다리는 줄.」 대주교가 바뀌기 전이었다. 그때 대주교는 매주 한 번 단 위에서 아픈 사람들 머리에 손을 얹었다. 줄은 사흘을 기다려야 했다. 카일은 어머니를 업고 사흘을 섰다. 사흘째 저녁, 어머니 이마가 차가워졌다. 열이 내린 게 아니었다.

카일은 창에서 눈을 돌렸다. 그 생각은 보고서에 들어갈 일이 아니었다. 감시와도 상관없었다.

‘감시 대상이 수프를 남긴다. 그게 다다.’

문 안에서 소리가 났다. 단지 뚜껑 닫는 소리. 천 묶는 소리. 맨발이 바닥을 오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카일은 벽에 등을 댄 채로 귀를 기울였다.

열 시. 열 시 반. 소리가 멈췄다. 촛불이 꺼졌다. 문 아래 틈이 깜깜해졌다.

카일은 기다렸다. 자는 사람 숨소리는 안 들렸다. 깨어 있는 사람의 조용함이었다.

‘오늘 밤이군.’

카일은 그 생각을 하고, 의자 위의 달걀을 집었다. 껍질을 깠다. 먹었다. 차갑고 퍽퍽했다. 오늘 밤은 길 것 같았다. 그래서 먹었다. 감시 대상이 준 거라서가 아니라.

그날 밤 카일은 보고서를 미리 써 두었다. 교대 전에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감시 보고서 — 4월 4일

대상: 정해진 일과를 따름. 식사를 반 이상 남기고 일부를 거처로 가져감.

특이 사항: 사치를 부리지 않는 척하는 것으로 보임. 관찰 계속.』

(2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7화. 담을 넘음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6화. 승천 계획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5화. 잿골의 증언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4화. 오렌의 장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3화. 단장에게 전부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2화. 쪽지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