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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Author: Jino

1화. 제1조, 기간은 추석 연휴까지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36:25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

(냅킨에 쓴 글씨. '자정까지'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빼자는 거죠."

회의실 화면에는 정서윤이 사흘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빼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차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연휴 전에 못 넣는다는 겁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회의실에 앉은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마셨다. 이 회사에서 둘이 부딪히면 다들 그렇게 했다.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탁 내려놓았다.

"유저가 편지를 쓰면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 이게 이벤트의 핵심이에요. 이거 빼면 그냥 출석 체크고요."

"출석 체크가 뭐 어때서요. 제일 잘 돌아가는 콘텐츠인데."

"차이현 씨는 송편 보고도 그냥 떡이라고 하시겠네요."

"떡 맞잖아요."

누군가 쿨럭, 하고 커피를 삼켰다.

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자, 자. 연출은 간소화 버전으로. 차 선임이 내일까지 공수 다시 뽑아 보고. 정 선임은 문구 정리. 됐지?"

"네."

"네."

대답은 동시에 나왔고, 둘은 동시에 서로를 노려봤다.

입사 동기. 같은 날 같은 강당에서 사원증을 받았다. 5년째 같은 층을 쓰고, 5년째 회의 때마다 이랬다. 둘의 회의를 '명절 특집 씨름'이라고 부르는 단톡방이 사내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자리로 돌아오자 옆자리 후배 한민지가 의자를 굴려 왔다.

"선배, 오늘도 차 선임님이랑 3라운드까지 가셨다면서요."

"2라운드. 팀장님이 말렸어."

"근데 선배, 그거 알아요? 차 선임님 회의 때 선배가 말할 때만 노트북 덮어요."

"무시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런가? 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시던데."

서윤은 모니터를 봤다. 기획서 파일 이름이 '달토끼_최종_진짜최종_차이현때문에수정'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파일 이름을 바꿨다. '달토끼_최종_v7'.

"쓸데없는 거 보지 말고 문구나 봐 줘."

"네에."

사건은 퇴근 무렵 탕비실에서 일어났다.

서윤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드르륵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엄마'. 그리고 미리보기.

[서윤아 연휴 둘째 날 점심 비워 놔라. 이모가 소개한다는 총각 치과의사래. 사진 보낸다.]

서윤은 폰을 뒤집었다. 너무 늦었다.

"치과의사."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차이현이 머그컵을 들고 서 있었다.

"……남의 폰을 봐요?"

"테이블에 놓인 걸 봤죠. 알림 글씨 좀 줄이세요. 22포인트는 되겠던데."

"우리 엄마가 노안이라 맞춰 놓은 거거든요?"

"그럼 어머님 폰에서 크게 하시면 되잖아요."

서윤은 대꾸 대신 커피 머신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웅웅거리는 동안 또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이현 쪽이었다. 그는 화면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뭔데요."

"아무것도."

"아무것도가 아닌 얼굴인데."

이현은 잠깐 망설이다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이현아 추석에 선 한 번만 보자. 엄마 친구 딸 약사. 착하대. 싫으면 여자친구를 데려오든가.]

서윤은 입을 막았다. 새는 웃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약사."

"웃지 마세요."

"치과의사랑 약사면, 둘이 병원 차려도 되겠네요."

"그 둘 말고 우리 얘기거든요."

우리. 서윤은 그 단어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그냥 넘어갔다.

한 시간 뒤, 둘은 회사 앞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서윤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또 마주쳤고, 둘 다 집에 가기 싫은 얼굴이었고, 이현이 "맥주 한 캔만" 하고 말했다. 그게 다였다.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부터 이미 한 번 부딪혔다.

"네 캔 묶음이 더 싼데 왜 한 캔만 사요."

"한 캔만 마실 거니까요."

"나머지는 집에 가져가면 되잖아요."

"그럼 그건 한 캔이 아니죠."

결국 이현이 두 캔을 샀다. 하나는 그냥 라거, 하나는 복숭아 맛. 서윤은 제가 복숭아 맛을 만지작거리던 걸 이현이 언제 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계산대에 그게 먼저 올라가 있었다.

탁. 캔 따는 소리.

"우리 엄마 목표는 제가 서른 되기 전에 식장 잡는 거예요." 서윤이 말했다. "올해만 선 자리 네 번. 전부 이모 루트."

"저희는 할머니요. 추석마다 '증손주 보고 죽겠다'로 시작하세요. 올해로 7년째 정정하시고요."

"건강하셔서 다행이네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더 곤란하죠."

서윤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반 캔 만에 볼이 뜨거워졌다. 원래 술이 약했다. 이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편의점에서 사 온 땅콩을 서윤 쪽으로 슬쩍 밀었다.

"근데 아까 그 문자요." 서윤이 말했다. "'싫으면 여자친구를 데려오든가'."

"네."

"데려가면 되잖아요."

"없는데요."

"알아요. 그러니까."

서윤은 캔을 내려놓고 이현을 똑바로 봤다. 술기운인지 기획자 본능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슬라이드가 착착 넘어갔다.

"차이현 씨는 여자친구가 필요하고, 저는 남자친구가 필요해요. 기간은 딱 추석까지. 서로 집에 한 번씩 보여 주고, 연휴 끝나면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 하면 끝. 최소 내년 설까지는 조용하겠죠."

이현이 한참 서윤을 봤다.

"……그거 지금 기획하신 거예요?"

"삼십 초 만에요."

"공수를 너무 적게 잡은 거 아닌가."

"또 그 소리."

"리스크가 커요. 회사에서 알면."

"그러니까 조건을 달죠."

서윤은 가방에서 볼펜을 꺼냈다. 종이가 없었다. 테이블 위엔 땅콩 봉지와 냅킨 몇 장뿐이었다. 그녀는 냅킨 한 장을 펼쳤다.

"계약서요?"

"말로 하면 차이현 씨가 나중에 딴소리할 거잖아요."

"딴소리는 정서윤 씨 전문 아닌가."

서윤은 못 들은 척 적었다. 냅킨이 얇아서 볼펜이 자꾸 걸렸다.

제1조.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까지.

"자정까지로 하죠." 이현이 말했다. "마지막 날 저녁에 갑자기 끝내면 이상하니까."

"오, 디테일."

"개발자라서요."

이현이 셔츠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자정까지'를 덧붙였다. 글씨가 번졌다.

제2조. 사내에선 비밀.

"이건 당연하고."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이 사귄다고 하면 팀장님 쓰러지세요."

"씨름 방 사람들은 축제 하겠죠."

"그 방 진짜 있어요?"

"있대요. 저도 초대 못 받았어요."

그다음 조항에서 서윤의 볼펜이 멈췄다.

"스킨십은……."

이현이 맥주를 마시다 멈췄다. 파라솔 위로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둘 사이에 이상하게 긴 정적이 흘렀다.

"……필요하면 손잡기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윤이 먼저 말했다. 말하고 나니 귀가 뜨거웠다. 맥주 탓이라고 생각했다.

"손잡기까지만." 이현이 말했다.

"그것도 필요할 때만."

"필요할 때만."

제3조. 스킨십은 손잡기까지만. 그것도 필요할 때만.

서윤은 '필요할 때만'에 밑줄을 두 번 그었다. 냅킨이 살짝 찢어졌다.

"마지막." 서윤이 말했다. "이게 제일 중요해요."

"뭔데요."

"서로한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이현이 피식 웃었다. 드문 일이었다. 회의실에서 그가 웃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저도요. 그래도 조항은 넣어야죠. 리스크 관리."

"제 말 따라 하시네."

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벌칙도 있어야죠." 이현이 말했다.

"벌칙?"

"조항을 어기면요. 안 그러면 계약서가 아니라 낙서예요."

"뭐로 할까요."

이현이 잠깐 생각했다. "어긴 쪽이 회의에서 한 번 져 주기."

서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차이현 씨는 절대 안 어길 자신 있다는 거네요."

"서윤 씨도 자신 있으면 받으세요."

"받죠."

부칙.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서윤은 맨 아래에 '갑 정서윤'이라고 쓰고 볼펜을 넘겼다. 이현은 그 옆에 '을 차이현'이라고 썼다. 글씨가 의외로 반듯했다. 밤새 코드를 짜는 사람 글씨 같지 않았다.

"왜 제가 을이에요."

"제가 먼저 제안했으니까요."

"그런 규칙이 어디 있어요."

"방금 생겼어요."

이현은 뭐라 하려다 말았다. 대신 냅킨을 반으로 곱게 접어 서윤에게 내밀었다.

"원본은 갑이 보관하세요."

"사본은요?"

이현은 휴대폰을 꺼내 냅킨을 찰칵 찍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이걸로."

서윤은 접힌 냅킨을 지갑 카드칸에 끼워 넣었다. 맥주 한 캔에, 도장 대신 땅콩 부스러기. 이상한 계약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연애하는 거예요?" 이현이 빈 캔을 구기며 물었다.

"내일부터가 아니라 지금부터요. 계약은 서명 즉시 효력 발생."

"그럼 지금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하나."

"버스 타고 갈 거예요."

"정류장까지는요."

정류장까지는 오 분 거리였다. 둘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걸었다.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서윤은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둘째 날 점심 안 돼. 나 남자친구 있어.]

답장은 삼 초 만에 왔다.

[누구??????? 사진!!!!!!!]

물음표가 일곱 개였다. 서윤은 차창에 이마를 댔다. 술이 확 깼다.

그때 메신저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이현이었다. 회사 메신저가 아니라, 5년 동안 한 번도 쓴 적 없는 개인 메신저였다.

[차이현: 저희 쪽도 보냈습니다. 할머니가 사진부터 달라고 하십니다.]

[차이현: 내일 퇴근하고 찍죠. 커플 사진.]

서윤은 화면을 오래 내려다봤다.

커플 사진. 그러려면 적어도 한 번은, 제3조를 써먹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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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5화. 친구 얘기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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