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연애 기획서 v1.2 부칙 제1항. 싸우면 그날 안에 파라솔에서 끝낸다.
(이 부칙은 싸움이 끝난 뒤에야 생긴다. 이틀 늦게.)
[정서윤: 안 싸웠어요, 할머니.]
[이현: 안 싸웠습니다.]
두 사람은 따로 답했다. 삼 분 간격으로. 할머니의 답은 한 번에 두 사람에게 동시에 왔다.
[할머니: 둘다 거짓말]
[할머니: 목소리 안 들어도 안다]
서윤은 휴대폰을 엎었다. 할머니한테는 문자로도 거짓말이 안 통했다. 받침은 틀려도 사람은 안 틀리는 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서윤의 책상 위에 커피가 있었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시럽 1/2, 얼음 조금'. 글씨는 여전히 반듯했다. 그 아래 다른 말은 없었다.
서윤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매직을 꺼내 컵에 답을 적으려다 멈췄다. 뭐라고 쓸지 몰랐다. 매직 뚜껑을 닫았다.
오전 열 시, 까치 2차 업데이트 최종 점검 회의.
"냅킨색 적용 화면 확인 부탁드립니다." 서윤이 화면을 넘겼다.
"네. 좋은 것 같습니다." 이현이 말했다.
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안내 문구는 '따뜻한 종이색'으로 가겠습니다."
"네, 검토해 보니 괜찮습니다."
"……출시일은 다음 주 수요일로 하겠습니다."
"네, 일정 맞추겠습니다."
개발팀 막내가 커피를 들어 올렸다. 마시지 않았다. 컵을 든 채로 굳어 있었다. 5년 동안 이 회의실에서 커피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오늘은 끼어들 싸움이 없었다. 컵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정 선임님 기획 의도 잘 이해했습니다." 이현이 노트북을 열어 둔 채 말했다. 반쯤 덮지 않았다. 어제부터 한 번도.
"차 선임님 검토 감사합니다." 서윤이 말했다.
선임님. 서로에게 '님'까지 붙인 건 5년 동안 처음이었다. 싸울 때도, 설 전에 냉랭하던 3주 동안에도 '선임'까지였다. 민지가 수첩에 '선임님???'이라고 적고 물음표를 세 개 그렸다.
회의는 십 분 만에 끝났다. 역대 최단이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점심시간, 개발팀 막내가 팀장 자리로 갔다. 개발팀 막내 둘 중 키가 큰 쪽, 윤재하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팀장님. 차라리 싸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한테 말하면 뭐 하냐."
"방장님이시잖아요."
팀장은 한숨을 쉬고 씨름 방을 열었다.
[방장: 긴급 공지. 오후 3시 소회의실. 안건: 서로 반박할 것. 불참 시 방장이 운다.]
오후 세 시, 소회의실. 팀장이 두 사람을 마주 앉혔다. 민지는 서기를 자처했다. 윤재하는 문 앞을 지켰다.
"자, 반박해."
"뭘요." 서윤이 말했다.
"아무거나. 날씨라도."
"오늘 날씨 좋네요." 이현이 말했다.
"네, 좋네요." 서윤이 말했다.
팀장이 테이블에 이마를 댔다. 민지가 수첩에 '실패'라고 적었다.
두 번째 날도 비슷했다. 커피는 왔고, 글씨는 반듯했고, 말은 없었다. 회의는 짧았다. 버그는 많이 고쳐졌고, 기획서는 빨리 통과됐다. 숫자만 보면 팀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이틀이었다. 12층의 모두가 그 이틀을 싫어했다.
둘째 날 점심, 국숫집에서 민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선배, 친구분 얘기 해 보세요."
"무슨 친구."
"그 약속 저주 걸린 친구분이요. 요즘 어떠세요?"
서윤은 국물을 떠먹었다. 작년 가을, 이 국숫집에서 그녀는 '친구 얘기'라며 제4조를 털어놓았다. 민지는 그게 누구 얘기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면서 끝까지 '친구분'이라고 불러 줬다.
"……싸웠대."
"왜요?"
"남자친구가 친구 일을 몰래 도와줬대. 친구 모르게."
"그게 왜 싸울 일이에요?"
"친구는 그게 무시당한 것 같대. 자기가 못 할 줄 알았나 보다 하고."
민지가 국수를 한 젓가락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선배. 몰래 도와주는 사람은요, 보통 상대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상대가 이미 너무 많이 하고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서윤은 젓가락을 멈췄다. 민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제 친구 얘기예요." 민지가 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귀가 조금 빨갰다. 서윤은 그걸 봤지만, 오늘은 묻지 않았다.
둘째 날 저녁 여덟 시. 서윤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등대 편지 기획서를 붙들고 있었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민지가 가방을 메고 나가다가 돌아왔다.
"선배. 이거 보셨어요?"
민지가 서윤의 모니터에 공유 폴더를 열었다. 등대 편지 프로젝트 폴더. 개발 쪽 하위 폴더에 파일이 하나 있었다. 파일 이름은 '동기화_대안검토_차이현'. 작성일은 부산 첫째 주 월요일이었다.
"저 이거 우연히 봤어요. 진짜 우연히요. 씨름 방 정보원으로서가 아니라."
서윤은 파일을 열었다.
표였다. 반듯한 표. 이현다운 표.
'동기화 이슈 대응안.'
'대안 A. 기획 수정. 편지 80자를 40자로 축소. 불빛 네 바퀴. 공수 반나절. 리스크 없음.'
'대안 B. 서버 쪽 해결. 기획 원안 유지. 공수 사흘. 야근 필요.'
'결론: B.'
그 아래 사유 칸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사유: A는 정 선임 기획의 핵심을 깬다. 기다리는 80초가 이 기획이다. 40초면 설렘이 아니라 로딩이다.'
그리고 맨 아래 비고.
'비고: 본부장 보고 전 해결되면 리스크로 보고하지 않는다. 해결 안 되면 보고한다. 봐주는 게 아니라, 원안이 맞아서 지키는 것.'
서윤은 화면을 오래 봤다.
이 사람은 그녀의 기획을 봐준 게 아니었다. 검토했다. 두 개를 놓고 따졌다. 쉬운 길은 그녀의 기획을 깎는 거였다. 5년 동안 그가 회의실에서 늘 하던 일. 그런데 이번엔 깎지 않았다. 대신 자기 공수를 깎았다. 사흘 야근으로.
부산의 목요일이 떠올랐다. 서버 장애. 테스트 서버가 본 서버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 주에 그는 까치 2차 테스트와 등대 편지 동기화를 동시에 돌리고 있었다.
"……민지야."
"네."
"차 선임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씨름 방 정보에 따르면요." 민지가 휴대폰을 봤다. "퇴근하셨는데 댁에 안 가셨대요. 윤재하 씨가 봤는데, 회사 앞 편의점 쪽으로 가셨대요. 어제도요."
서윤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
5월의 편의점 파라솔은 따뜻했다.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 이현이 앉아 있었다. 라거 한 캔. 따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 옆에, 따지 않은 복숭아 맛 맥주 한 캔.
서윤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첫날 밤 자리였다.
"어제도 여기 있었어요?"
"네."
"왜요."
"오실까 봐요."
"안 왔잖아요."
"그래서 오늘도 왔어요."
서윤은 복숭아 맛 맥주를 땄다. 탁. 한 모금 마셨다. 볼이 금방 뜨거워졌다.
"대안 검토서 봤어요."
이현의 손이 라거 캔 위에서 멈췄다.
"……누가 보여 줬어요?"
"공유 폴더에 있었어요. 공유 폴더는 공유하라고 있는 거예요."
"숨긴 건 아니에요."
"말을 안 한 거죠. 그게 더 나빠요." 서윤이 캔을 내려놓았다. "제 기획 지키느라 사흘 야근한 거, 그걸 왜 말 안 했어요. 부산 목요일 장애도 그거 때문이잖아요."
이현이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말하면 서윤 씨가 A를 고를 것 같아서요. 저 야근하는 거 싫다고. 그럼 기획이 깨지잖아요."
"……그건 맞아요. 제가 A 골랐을 거예요."
"그러니까요."
"그래도 제가 골랐어야죠. 제 기획이니까." 서윤이 이현을 봤다. "그리고 이현 씨 야근도 제 일이에요. 이제는."
이현이 라거를 땄다. 처음으로. 한 모금 마셨다.
"미안해요. 말 안 한 거."
"저도요. 봐준 거라고 한 거. 봐준 게 아니었어요."
"그럼 둘 다 부칙 위반이네요."
"부칙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 만들어요."
서윤은 가방에서 연애 기획서를 꺼냈다. 이현은 셔츠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서윤이 불렀고, 이현이 적었다. 반듯하게.
'부칙 제1항. 싸우면 그날 안에 파라솔에서 끝낸다.'
"이틀 늦었네요." 서윤이 말했다.
"첫 적용이라 봐주죠."
"봐주지 않는다면서요."
"회의에서만요. 여긴 파라솔이에요."
서윤이 웃었다. 이틀 만이었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오래 묻어 둔 질문을 꺼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작년 가을 씨름 방 투표요. 누가 질지. '차이현 또 짐' 19표, '정서윤이 짐' 1표. 그 1표, 이현 씨죠."
이현이 캔을 내려놓았다. 부정하지 않았다.
"팀장님한테 부탁했어요. 저는 그 방 회원이 아니라서요. 방장 권한으로 한 표."
"왜 저한테 걸었어요. 제가 진다에."
"옥상에서 서윤 씨가 그랬잖아요. '저도 한 번 질게요.' 서윤 씨는 진다고 하면 지는 사람이에요. 약속을 지키는 사람." 이현이 말했다. "저는 서윤 씨를 봐준 적 없어요. 믿었을 뿐이에요. 그때도, 부산 때도."
서윤은 대답 대신 테이블 밑으로 발을 뻗었다. 운동화 코로 그의 구두 코를 툭 찼다. 이현의 구두가 한 번 툭 되받았다.
둘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할머니였다. 서윤이 먼저 사진을 찍어 보냈다. 파라솔, 복숭아 맥주, 라거, 연애 기획서.
[할머니: 인자 됏다]
[할머니: 또 싸우면 또 보내라]
그리고 삼 초 뒤, 가족 단톡방에서 알림이 하나 더 울렸다. 막내 이모였다. 사진 한 장. 하얀 봉투에 금색 글씨.
[막내 이모: 백 원장 청첩장 왔다. 6월 둘째 주 토요일]
[막내 이모: 너네 둘 같이 와라. 합의서 제3조다. 그리고 너네 자리는 주선자석이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