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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화 눈이 그친 자리

last update 게시일: 2026-09-06 00:10:28

밤새 창문을 두드리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새벽녘까지 거칠게 울부짖던 바람도 어느 순간 잠잠해졌고, 마을에는 오랜만에 고요한 아침이 찾아왔다.

세린은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눈이 마을을 전부 덮고 있었다.

지붕도, 담장도, 나무도.

어제까지만 해도 갈색이었던 길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세린은 잠시 그 풍경을 바라봤다.

눈이 내린 뒤의 마을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세린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발을 내딛자 푹신한 눈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많이도 내렸네.”

세린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삽을 들었다.

눈을 치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린이 고개를 돌렸다.

진안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발견했을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세린은 삽을 내려놓았다.

“왜 나왔어요?”

진안은 주변을 바라봤다.

“눈이 그쳤소.”

“그건 저도 알아요.” “…….”

“아직 몸 안 좋잖아요.”

“움직일 수 있소.”

“움직일 수 있는 거랑 움직여도 되는 건 다른 거예요.”

진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린은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거기 서 있어요.”

“명령이오?”

“부탁이에요.”

진안은 잠시 세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마당 한쪽에 서 있었다.

세린은 다시 삽을 들었다.

한 번, 두 번.

눈을 밀어낼 때마다 하얀 눈이 한쪽으로 쌓였다.

진안은 그런 세린을 조용히 바라봤다.

작은 체구로 자신이 하기에도 번거로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얼굴에는 추위 때문에 붉은 기운이 올라와 있었다.

한참 뒤 세린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았다.

“휴…….” 진안이 말했다.

“그만하시오.”

세린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몸이 상하겠소.”

“저는 괜찮아요.”

“아까 그대가 했던 말과 같군.”

세린은 잠시 멈칫했다. “…….”

그러다 피식 웃었다.

“진안 씨도 제 말 기억하고 있었네요.”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래도요.”

세린은 다시 삽을 들었다.

“조금만 더 하고 들어갈게요.”

진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봤다.

어쩌면 자신이 이런 풍경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눈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눈이 내리면 길이 막혔고, 발이 묶였으며, 행군은 늦어졌다.

누군가에게는 계절의 풍경이었지만 군에게는

또 다른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누구도 그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치우는 사람이 있었다.

“진안 씨.” 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안이 고개를 돌렸다.

“뭐오.” “아침 먹어요.”

“…….”

“안 먹을 거예요?”

“먹겠소.”

“그럼 들어와요.”

세린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안도 천천히 뒤따랐다.

따뜻한 국물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세린은 식탁 위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따뜻한 걸로 준비했어요.”

진안은 자리에 앉았다.

세린이 숟가락을 건네자 그는 말없이 받아 들었다.

잠시 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세린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맛없어요?”

“아니오.”

“그럼요?”

“먹을 만하오.”

세린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게 칭찬이에요?”

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진안 씨는 정말 말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필요 없소.”

“봐요. 또 그렇게 말하잖아요.”

진안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세린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손을 보았다.

상처를 입은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검을 오래 잡은 사람의 손 같았다.

세린은 잠시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억지로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테니까.

세린은 그저 자신의 몫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세린은 그릇을 치웠다.

진안은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다시 평온한 마을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눈을 치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힘들게 치워놓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뛰어다녔다.

진안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좋죠?”

세린이 어느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무엇이 말이오.”

“저런 거요.”

세린이 창밖을 가리켰다.

“아무 일도 없는 날.”

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은 조용히 말했다.

“전쟁 같은 거 없이, 그냥 눈 오면 눈 치우고……

밥 먹고…… 또 하루 보내는 거.”

진안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소.”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세린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진안이 잠시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마치 눈앞에 있으면서도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처럼.

오후가 되자 세린은 약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안의 상처에 쓸 것들을 따로 골라 작은 천에 싸두었다.

진안은 침상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건 무엇이오.”

“약초에요.”

“필요 없소.”

“필요해요.”

“이미 나아지고 있소.”

“그러니까 더 잘 나으라고 준비하는 거예요.”

진안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세린은 약초를 정리하면서 문득 말했다.

“참 이상하네요.”

“무엇이오.”

“진안 씨는 분명 군에서 온 것 같은데…….”

진안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세린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어쩐지 군사들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안은 세린을 바라봤다.

“어떻게 다르오.” “그냥요.”

세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그렇소.” 진안은 더 묻지 않았다.

세린도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붉은빛이 번졌다.

하얀 눈 위에 석양이 내려앉자 마을

전체가 희미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세린은 창가에 서서 그 풍경을 바라봤다.

“예쁘다.” 진안도 창밖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멀리 이어진 산길.

눈 아래 감춰진 길.

그 너머에 있을 군영.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

진안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자신의 생존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린의 가족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세린이 말했다.

“진안 씨.” “왜 그러오.”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

진안의 시선이 세린에게 향했다.

세린은 별다른 뜻 없이 웃고 있었다.

“그래야 마음 놓고 밖에도 나갈 수 있잖아요.”

진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을 거뒀다.

“그러겠소.”

짧은 대답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마을에는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세린은 등잔에 불을 붙였다.

작은 불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진안은 침상에 앉아 조용히 그 불빛을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밤은 없었다.

늘 검과 피와 명령이 있었고, 잠들기 전에는

다음 날의 전투를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뜻한 방.

작은 등잔 하나.

그리고 조용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진안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주 멀리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진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달라져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전장에서 수없이 위험을 감지했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적인 경계였다.

진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의 어둠을 오래 바라봤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은 평온했다.

세린도 아무것도 모른 채 등잔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이 짧은 평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요한 밤 너머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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