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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죽은 내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날, 죽은 내가 화면에 나타났다

작가:  집필화산완결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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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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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다. 하늘에 화면이 열린 뒤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아졌다. “공주, 나와 함께 해연국으로 돌아갑시다.” 해연국 왕이 서슬이 시퍼런 칼을 든 채 눈꼬리를 붉혔다. “짐의 황금을 실은 배 세 척을 속여서 꿀꺽하셨는데 무엇으로 갚으시겠습니까?” 월진국 왕은 주판을 튕기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공주께서는 죽는 것까지 나를 속이셨습니다...” 청운국 세자 또한 피를 토하면서도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서면서, 방금 비밀 서랍에서 훔친 옥패를 꽉 쥐고 달아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느긋하게 닫아 버렸다. 서령국의 섭정왕이자 대군인 배정호가 나를 서재에 가둔 채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매는 서늘했고, 눈빛은 칼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공주, 다른 사람의 빚을 다 갚으셨으면, 이제 제 물건을 훔친 값을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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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챕터
제1화
하늘 댓글창이 열리기 직전에,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인 나는 섭정왕인 대군 사저에서 물건을 훔치고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배정호의 옥패를 훔치는 중이었다.어두운 청색의 그 옥패에는 서령국 국고의 비밀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 대군 사저와 왕실이 함께 재산과 식량을 관할한다는 증표였다.배정호는 그것을 책상의 셋째 칸 비밀 서랍에 숨겨 두었다.배정호가 입궐해서 정사를 논하는 틈을 타서, 나는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자물쇠를 땄다.자물쇠가 열리자마자 하늘 댓글창이 밝아졌다. 내가 옥패를 제대로 챙기기도 전에 누군가 서재의 문을 밀면서 열었다.배정호가 문가에 서 있었다.하얀 옷에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게다가 눈매까지 싸늘해서 저승사자가 강림한 줄 알았다. 배정호의 시선이 먼저 내 손의 옥패에 떨어졌다가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하늘 댓글창은 마침 네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첫째 칸에서는 해연국의 여우가죽 외투를 걸친 내가 해연국 왕 탁수철의 군막에 앉아서, 눈을 내리깐 채 남자를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둘째 칸에서는 흰 비단으로 눈을 가린 내가 월진국 물가의 정자에서 주판 옆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월진국 왕 서강호를 ‘서방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셋째 칸에서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내가 청운국 세자 조윤헌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면서 목숨으로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넷째 칸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였다.왼손에는 옥패를 오른손에는 철사를 들고서 서령국 대군의 서재에 쭈그리고 앉은 채, 도둑질하다 들킨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배정호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서 내 목을 베겠구나 싶을 만큼 꽤 긴 정적이었다.그러다 배정호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공주님께서 정안사에 기도하러 가시더니, 해연국의 왕후, 월진국의 왕실 상인에 청운국의 호위무사까지 되셨습니까?”“게다가 제 사저의 자물쇠를 따는 재주까지 있으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나는 말없이 옥패를 소매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그러나 하늘 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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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해연국은 춥고 척박했다. 군사도 강하고 말도 건장했지만 곡식도 약도 모자랐다.나는 해연국 왕에게 바친 서령국의 벙어리 노비라는 신분으로 탁수철의 군막에 던져졌다.그때의 탁수철은 내란을 갓 평정했던 때라 두 손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웃는 것조차 칼날을 목에 대는 것처럼 살벌하게 느껴졌다.시스템이 내게 준 임무는 아주 간단했다.“해연국의 군수 장부를 손에 넣고, 서령국과의 곡식과 말 교역로를 뚫으세요.”나는 그 자리에서 핵심을 물었다.“어떻게 손에 넣으라는 말입니까?”시스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알아서 하세요.”알아서 한 결과, 나는 반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했다.탁수철이 군사를 논할 때면 나는 곁에 꿇어앉아서 화로에 숯을 넣었다.그리고 탁수철이 병사를 점호할 때면 나는 눈보라 속에 서서 등불을 들었다.탁수철의 장수들이 나를 서령국이 보낸 폐물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장수들이 말한 곡식 창고의 위치, 교대 시각과 마장의 결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웠다.집안 배경이 좋은 해연국의 후궁들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그 여인들은 나를 얼음 창고에 가둔 뒤, 얼어 죽기 전에 책 세 권을 다 베끼라고 핍박했다.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질 무렵 시스템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바이탈이 떨어집니다. 숙주님, 지금 구원을 청하지 않으면 죽습니다.”나도 구원을 청하고 싶었다.그러나 벙어리라는 설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 힘을 짜내서 서릿발 위에 두 글자를 썼다.[곡식]탁수철이 얼음 창고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자마자 본 건 바로 그 글자였다.곧 탁수철은 나를 안아 들고 나갔다. 겉옷으로 나를 단단히 감쌌지만 눈빛은 무섭도록 어두웠다.“얼어 죽게 생겼으면서 아직도 곡식 생각입니까?”말을 할 수 없던 나는, 붉어진 두 눈으로 그저 탁수철을 바라보기만 했다.하늘 댓글창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한순간 잠잠해졌던 해연국의 댓글들이 곧 빽빽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저 여자, 그때 총애를 받았던 그 여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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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런 달달한 모습에 댓글에는 비명이 가득했다.그러나 오직 서재에 서 있던 배정호만이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저 사람을 보고 싶다 하셨습니까?”이에 나는 즉시 말을 바꿨다.“저 사람의 국고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배정호는 말이 없었지만, 하늘 댓글 창은 계속 지나갔다.월진국 편의 끝은 자객의 습격이었다.자객들이 강가의 정자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서강호는 나를 감싸며 밖으로 물러났다.나는 흰옷 차림이었고 눈 위의 흰 비단이 바람에 펄럭이며 소리를 냈다.서강호는 나를 배에 밀어 올린 뒤 자신은 몸을 돌려 적과 싸웠다.그렇게 하면 내가 목숨을 부지하러 달아날 걸로 여겼다.하지만 나는 뒤편의 선창으로 돌아가서, 서령국에서 진작부터 매복시켜 둔 상단을 데리고 곡식을 가득 실은 배 세척과 황금 한 상자, 그리고 수운 금패 하나를 들고 튀었다.떠나기 전, 나는 탁자 위에 차용증 한 장을 남겼다.글씨는 아주 곱게 썼다.[월진국의 돈을 잠시 빌립니다. 3년 안에 갑절로 갚겠습니다.]그 차용증을 확인한 서강호는 차 한 잔 마시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그런 뒤에 섬뜩하게 웃었다.곁에 있던 내관들은 일제히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좋아. 짐이 그 여자를 기억하겠습니다.”영상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월진국의 댓글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갑절? 삼 년이 지났어! 이자는!][왕께서 그 무렵 날마다 차용증을 보며 웃으시길래 나는 연서인 줄 알았어!][서령국 공주, 나와서 돈을 갚아라!]나는 코끝만 만졌다.돈은 갚을 것이지만 갚는 방식은 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를 뿐이었다.이때, 배정호가 탁자를 두드렸다.“곡식을 가득 실은 배 세 척은 어찌하였습니까?”“한 척은 백성들의 구휼에, 한 척은 무기와 바꾸는 데, 다른 한 척은 서령국 전장의 밑천으로 썼습니다.”“황금은 어찌했습니까?”“국경에 곡식 창고를 7채 지었습니다.”“수운 금패는요?”나는 다시 소매를 눌렀다.그 모습을 본 배정호의 미소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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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하늘 댓글창은 밤새도록 훤하게 달아올랐다. 온 천하도 덩달아 밤을 새웠다.해연국과 청운국과 월진국의 전갈이 거의 동시에 서령국에 닿았다.탁수철의 서신이 가장 짧고 명료했다.[공주를 내놓으십시오.]서강호의 서신이 가장 두꺼웠다. 모두 서른일곱 장이나 되었다.첫 장에는 예전의 정을 적었고, 둘째 장에서는 마음이 아프다고 적었다.그리고 셋째 장부터는 이자를 계산했다.서령국 호부상서는 끝까지 계산해 놓은 걸 힐끗 보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조윤헌은 서신을 쓰지 않고, 청운국의 군사를 이끌고 곧장 서령국 국경에 닿았다.유난히 날이 좋지 않았던 그날, 성루에는 서령국의 신하와 백성이 가득 서 있었다.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하늘에 떠 있는 화면에는 여전히 내가 과거에 했던 범행 기록이 송출되고 있었다.누군가는 나를 사기꾼이라 욕했고, 누군가는 내가 서령국의 위엄을 깎았다고 했다.그 욕설 사이로 문득 한마디가 비집고 들려왔다.“그래도 공주가 아니었으면, 재작년 흉년에 우리는 벌써 죽지 않았겠어요?”그 한마디는 마치 마른 건초에 불씨를 떨어뜨린 것만 같았다.이내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해연국과의 교역이 열린 뒤에야 변방의 성에 말과 소금이 들어왔잖아요.”“월진국에서 온 곡식이 우리 온 식구를 살렸어요.”“청운국에서 얻어 온 처방전으로 역병을 고쳐서 내 아들이 지금도 살아 있어요.”욕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이해한다는 지지자들도 적지 않게 생겼다.마지막에는 누구인지 몰라도 한마디가 터져 나다.“공주가 진 빚은 서령국이 함께 갚자!”나는 성루 뒤에 선 채 가슴이 너무나 시큰했다.내 곁에 선 배정호의 겉옷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배정호는 나를 보지 않고 성 밖만 바라보았다.“들으셨습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배정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고, 눈에는 밤을 꼬박 새운 듯 핏발이 가득했다.“그러니 달아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나는 멈칫했다.배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공주, 서령국은 공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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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내가 배정호의 옥패를 훔친 것은 사실 서령국을 위해서가 아니었다.적어도 처음에는 아니었다.3년의 임무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시스템이 약속한 2조 원의 자산과 원래 내가 있었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도 코앞이었다.돌아가려면 옥패 네 개가 필요했다. 그 네 개를 다 소유해야만 돌아갈 좌표를 얻을 수 있었다. 해연국 황후의 옥패, 월진국 수상운수 금패, 청운국 호위무사 호패, 이 세 가지는 진작에 손에 넣었다.배정호가 쥔 서령국 국고 옥패 하나만 모자랐기에 그걸 훔치러 갔던 것이었다.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그 옥패를 훔쳤다. 배정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지만, 딱히 왜 그랬느냐고 묻지는 않았다.아마도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시스템은 내 자존심을 세워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화면이 서재에서 자물쇠를 따기 직전 내가 혼잣말을 한 장면을 그대로 내보냈다.댓글 창 속의 나는 비밀 서랍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물쇠를 따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대군 자가, 미안하게 됐습니다.][현대로 돌아가서 2조 원을 받게 되면 순금으로 만든 주판을 꼭 바치겠습니다.]온 성이 침묵했고, 배정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눈을 감았다 떴다.서령국 댓글 또한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잠시 뒤, 어느 눈치 없는 사람이 먼저 댓글을 달았다.[순금 주판이면 꽤 비싼데.]곧이어 하늘 가득 올라왔다.[대군 자가, 받으세요.][공주가 달아나려고 하긴 했어도 비싼 걸 바칠 생각을 했잖습니까?][이 정도면 안 나쁘지 않습니까?]그러자 배정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쥔 찻잔을 박살을 냈다.남자가 지금 화가 많이 났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즉시 자세를 바로 하고 냅다 사과부터 했다.“제가 잘못했습니다.”배정호는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뭘 잘못했습니까?”“훔치지 말아야 했습니다.”“또 있습니까?”“주판만 바치겠다고 한 것도 잘못했습니다.”내 대답에 배정호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는데 희한하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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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유는 시스템이 몸을 얻은 분신으로, 시스템의 대리 수행 역할을 많이 했다.6살 여자아이의 모습에 둥근 얼굴과 큰 눈을 가졌고, 머리 위에는 늘 푸른 글자 줄이 떠 있었다.처음 나타났을 때 나는 서유가 나를 감시하러 온 줄 알았다.실제로도 그랬다.해연국에서 벙어리 행세를 할 때, 서유는 날마다 내 머릿속에서 대사를 읊었다.월진국에서 장부를 훔칠 때는 미친 듯이 경보를 울렸다.그리고 청운국에서 죽은 척할 때는 데이터가 날아갈 정도로 울면서 나를 깨웠다.[숙주님, 눈물을 조금만 더 흘리면 진실 점수 3점이 오릅니다.]그때는 서유를 초기화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찮았다.그러나 나중에 서령국에 역병이 돌자, 서유는 밤새 쉬지 않고 처방전을 알아냈다.해연국에서 눈보라로 길이 막혔을 때는 온갖 방법을 생각해 내서, 마차가 지날 수 있는 협곡의 길을 찾아냈다.월진국의 돈과 곡식이 국경을 넘을 때, 서유가 상단의 자취를 가려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서강호의 사람들에게 잡혀갔을 것이다.그 아이는 시스템의 분신이지만, 3년 동안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견딘 전우이기도 했다 지금, 하늘 댓글창의 남은 시간은 계속 줄고 있었다. 서유의 목소리는 곧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졌다.[숙주님, 시스템이 제3안을 내정했어요. 천하 사람들에게 숙주님의 혼인 상대를 고르게 하려는 거예요.]나는 성루 아래에 빽빽하게 들어찬 백성들을 바라보았다.멀리 세 나라 군사들의 깃발이 보였고, 등 뒤에는 배정호가 탁자에 올려놓은 여벌의 옥패가 있었다.“제3안을 물품 거래 목록을 게시하는 것으로 바꿔.”그 말에 서유는 멍해져서 물었다.[뭐라고요?]“저들이 더 큰 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그 판을 깔아 주는 거지.”나는 몸을 일으켜 성루 가장자리로 걸어간 뒤, 시스템의 힘을 빌려서 큰 소리로 외쳤다.“여러분, 밤새 제 웃음거리를 보셨으니, 이제 쓸모 있는 것도 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해연국에는 말과 가죽과 철광이 있고, 월진국에는 수운과 전장과 비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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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동맹을 맺고 화면에서 물품 거래가 이루어지자 천하가 7일 동안 내리 떠들썩했다.첫날에는 월진국 상선이 서령국 나루터를 가득 메웠다.둘째 날, 해연국의 마대에 가죽과 철기를 가득 싣고 국경을 넘었다.셋째 날, 청운국 약재상이 서령국에 싼값으로 약을 파는 약방 스무 곳을 열었다.넷째 날, 서령국 전장이 사람에 밀려 터질 지경이 되자, 호부상서는 주판을 끌어안은 채 웃다가 경련을 일으켰다.다섯째 날, 시스템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벌을 내렸다.곧 화면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경고. 숙주가 감정선에서 심각하게 벗어났습니다. 강제적으로 전개 수정을 개시합니다.“네 채권자는 향 하나가 타는 동안 숙주의 귀속을 결정하십시오.”“승자가 없으면 서령국의 국운을 절반 깎습니다.”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날 뻔했다.시스템은 나를 연애하게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국운까지 깎겠다고 엄포를 놓았다.탁수철은 칼을 뽑았고 서강호는 황금으로 만든 주판을 꾹 눌렀다.조윤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배정호는 나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보호했다.성루의 공기는 순식간에 팽팽해졌다.네 사내는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그 모습을 본 시스템은 몹시 흡족한 모양이었는지, 화면에 친절하게 투표함 네 개를 띄웠다.[해연국 왕후.][월진국 왕후.][청운국 세자빈.][서령국 대군부인.]댓글들이 또다시 쏟아지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막 시스템 욕을 하려는 찰나, 조윤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는 빠지겠습니다.”그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조윤헌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빛은 아주 단단했다.“공주, 아니 장형단은 제 목숨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는 그 사람에게 살길 하나를 남겨줘야 겠습니다.”청운국 투표함이 한 칸 어두워지자, 서강호가 부채를 가볍게 두드리며 아주 편안하게 말했다.“나도 빠지겠습니다.”서강호는 나를 한 번 보았다.“후궁에 가둬 두는 것보다, 월진국을 위해 돈을 벌어서 빚을 갚는 걸 보는 편이 더 낫습니다.”월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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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머릿속이 너무나 조용해서였다.책 속으로 들어온 첫날부터 서유는 줄곧 내 귓가에서 떠들었다임무가 어쩌고, 데이터가 어쩌고, 위험이 어쩌고 떠들던 서유가 꽤나 귀찮았다. 하지만 정말로 서유가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난 3년 동안 홀로 이 판에 뛰어들 때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사흘째 밤, 나는 꿈에서 깜짝 놀라 깼다.배정호가 장부 한 권을 들고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내 목은 지독하게 쉬어 있었다.“서유는요?”배정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화면은 남아 있습니다. 물품 거래 내역들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시스템 안내음은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침상 휘장을 노려보다 내가 문득 눈물을 떨어뜨리자, 배정호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었다.그 손짓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치 뭔가 부서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공주, 공주께서는 이미 충분히 잘하셨습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아직 부족합니다.”서유가 나 대신 막아 준 것은 여기 누워서 울고 있으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유는 화면을 남겼고, 물품 거래 내역도 남겼다.그리고 시스템의 마지막 권한까지 내게 남겼다.내가 갑자기 이불을 걷고 일어서자 배정호는 미간을 좁혔다.“어디 가십니까?”“마지막 결산을 할 게 남아서 그걸 하러 갑니다.’마지막 결산은 시스템과 하는 결산이었다.시스템은 국운을 명목으로 나를 묶어놓았고, 서령국의 생사를 빌미로 나를 3년이나 개고생을 시켰다.또한 해연국, 월진국, 청운국으로 밀어 넣고 감정과 임무 사이에서 몇 번이고 고르게 했다.그러고는 마지막에 나를 이용하여 네 국가 사이의 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시스템이 원한 것은 처음부터 국운이 아니라 조회 수였다.또한 모든 사람이 갈등으로 인한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전쟁이었다.나는 겉옷을 걸치고 하늘 댓글창 아래로 걸어갔다.어둠이 깊었지만 화면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수많은 거래 소식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모습은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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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시스템이 사라진 뒤 네 국가의 동맹은 확고하게 세워졌다.해연국과 청운국과 월진국과 서령국이 「4개국 공동 교역 동맹 계약서에 서명했다.[계약서 제1조, 네 국가는 10년 안에 심연화의 귀속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계약서 제2조, 묵은 빚은 분할 납부로 돌리고 공개적으로 갚는다.][계약서 제3조, 화면은 네 국가의 모든 백성이 함께 쓰며, 어느 국가도 함부로 닫을 수 없다.]계약서 제4조는 배정호가 보탠 것으로 붓을 아주 무겁게 눌러서 확고하게 썼다.[공주는 더 이상 어떤 거래의 저울추도 되지 않는다.]이 조항을 보았을 때 가슴이 한 번 뜨거워졌다.탁수철은 냉랭한 얼굴로 옥새를 찍었다.서강호는 그 조항이 재밌는지 웃으면서 옥쇄를 찍었다.그리고 조윤헌은 나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세자인을 찍었다.서명을 마친 뒤에도 세 사람은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세 사람은 동맹 조율이라는 명분으로 서령국에 보름을 머물렀다.그러나 실제로는 돌아가면서 내 앞에 와서 비아냥거리는 것만 같았다.탁수철은 날마다 말을 한 필씩 보냈고, 서강호는 날마다 장부를 한 권씩 보냈다.또한 조윤헌은 날마다 약을 한 사발씩 보냈다.배정호는 날마다 말을 받고 장부를 맞춰 보고, 내가 약을 다 마시는지 지켜보았다.나는 몹시 괴로웠는데 그중에서도 약을 마시는 게 특히 더 괴로웠다.어느 날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약사발을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저는 아픈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그러나 조윤헌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예전에 죽은 척하실 땐 약을 아주 잘 드시지 않으셨습니까?”서강호가 장부를 덮었다.“예전에 돈을 빌리실 때도 아주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으셨습니다.”탁수철이 코웃음을 쳤다.“예전에 나를 속이실 땐 배포가 큰 게 정말로 여장부 같았습니다.”과거에 잘못을 많이 한 터라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이때 배정호가 약사발을 도로 밀어주며 얄짤없다는 듯이 말했다.“드세요.”나는 화가 잔뜩 나서 배정호를 노려보았다.“자가는 대체 어느 편이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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