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285. 비를 맞던 사람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4 20:03:54

이튿날 아침, 왕부의 안채에는 늦도록 볕이 들었다.

월령은 낯선 나른함에 눈을 떴다. 곁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위지헌이, 그녀가 깰 때까지 곁에 있었다.

"…일찍 안 일어나셨네요."

"오늘은, 그 버릇을 쉬었다."

지난 봄, 그녀가 그에게 하던 말을 그가 돌려주고 있었다. 월령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웃는 얼굴 위로, 아침빛이 앉았다.

위지헌은 그 웃는 얼굴을 오래 보았다. 아침빛에 잠긴 그 얼굴을, 지난 생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죽어 가는 얼굴은 보았어도, 아침에 웃는 얼굴은 이번 생이 처음이었다.

*

낮에, 위지헌이 문득 낮게 말했다.

"떠올랐다."

"…무엇이요."

"형장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그 사람."

월령의 손이 멎었다.

"온전히 떠오른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밤사이 되살아났다. 그 사람은 비를 맞으면서도, 손에 든 것을 코에 대고 있었다. 냄새를 맡는 사람처럼."

"…손에 든 게, 무엇이었어요."

"붉은 꽃이었다."

*

월령의 숨이, 한 박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9. 안쪽의 처소

    류담희가 가리킨 안쪽 처소는, 오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자리였다.궁의 깊은 곳, 늙은 후궁 하나가 조용히 지내는 처소였다. 총애를 잃은 지 오래라, 드나드는 발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 처소는, 밤에 무엇이 드나들어도 아무도 세지 않았다.'연'은, 그런 자리를 골랐다.*강무진이 그 처소를 며칠 지켜본 뒤, 낮게 옮겨 왔다."밤에, 그 처소로 붉은 실로 묶은 명부를 지닌 자가 듭니다. 그리고 나올 때는, 향을 지니고 나옵니다.""향을.""남쪽 절터에서 나던 것과, 같은 향입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성 밖 절터의 향이, 이제 궁 안의 처소에서 났다. 절터를 걷고 자취를 감춘 '연 어른'이, 궁의 깊은 처소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벽 뒤에 숨은 얼굴이,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그 늙은 후궁이, '연'입니까."위지헌이 물었다.월령은 잠깐 생각했다."아닐 거예요. 그 후궁은, 처소를 빌려준 벽일 뿐이에요. 총애를 잃은 처소는 아무도 안 봐요. 그런 자리를 빌리면, '연'은 궁 안에 숨을 자리를 얻어요.""그럼, '연'은 그 처소에 얹힌 손이로군.""채운 상궁이 동쪽 처소에 얹혀 있던 것처럼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처소의 주인이 아니라, 처소에 든 손. 그 손을 찾아야 해요."동쪽 처소에서 안쪽 처소로. 성 밖 절터에서 궁 안 깊은 곳으로. '연'은 잡힐 듯하면 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갔다. 쫓을수록 깊어지는 자리였다.*그러나 그 손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늙은 후궁의 처소는 궁의 깊은 곳에 있었다. 순검의 손도, 왕부의 눈도 함부로 닿지 못하는 자리였다. 그곳에 든 '연'의 얼굴을 보려면, 궁 안의 사람이라야 했다.월령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막혔다."부군의 순검도, 저 안까지는 닿지 못해요. 저 처소는, 내명부의 자리니까요.""황후께, 다시 청하랴.""…아직요."월령이 낮게 말했다."황후마마께 올린 그 명부로, 바깥 매듭은 이미 풀렸어요. 또 올리면, 이번에도 조용히 걷어 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8. 봄밤의 가마

    붉은 꽃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뜻밖에도 궁 안으로 다시 이어졌다.동쪽 처소의 밤 가마가 멎은 뒤로, '연'의 손은 성 밖으로 물러난 듯 보였다. 그러나 강무진이 붉은 꽃의 자취를 따라가자, 그 길이 다시 궁성 쪽으로 휘고 있었다.바깥 매듭이 풀렸다고 여긴 자리에서, 새 실 하나가 조용히 다시 자라고 있었다.*월령은 그 무렵, 황후의 봄 다회에 다시 들었다.류담희가 여전히 청화각 뜰에서 유자를 까고 있었다. 봉숭아 물이 옅어진 손톱으로."왕비마마."류담희가 반갑게 다가왔다."요즘, 그 밤 가마가 다시 나가요."월령의 걸음이 잠깐 멎었다."…다시?""네. 한동안 안 나가더니, 요 며칠 또 나가요. 이번에는 동쪽 처소가 아니라, 다른 문에서요."류담희는 그것을 아무 셈 없이 말했다. 신기한 것을 신기하다 말하는 얼굴로.*월령은 그 말을 무겁게 받았다.동쪽 처소가 닫히자, '연'은 다른 문을 찾았다. 벽을 하나 치우면 다음 벽으로 옮겨 가는, 그 자리의 방식대로.류담희의 밝은 눈이, 이번에도 그 옮겨 간 자리를 무심코 비추고 있었다."류 귀인."월령이 낮게 물었다."그 다른 문이, 어느 처소인지 아세요?"류담희는 잠깐 생각하다, 손가락으로 담 너머를 가리켰다.이번에는, 동쪽 끝이 아니었다. 더 안쪽, 궁의 깊은 곳에 있는 처소였다.*월령의 손끝이, 잠깐 식었다.류담희가 가리킨 처소는, 자녕궁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자녕궁도 아니었다. 자녕궁의 그늘이 얇아지자, '연'의 실이 자녕궁 곁의 다른 처소로 옮겨 간 것이었다.벽을 옮긴 것이었다.숙비가 얇아지는 동안, '연'은 이미 다음 벽을 골라 두었다. 숙비를 쳐 봐야, 그 실은 벌써 다른 벽에 기대어 있었다.*돌아오는 길, 월령은 그 처소의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류담희의 밝은 눈은, 오늘도 아무 셈 없이 진실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궁 안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궁 안의 가장 은밀한 걸음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있었다.월령은 그 밝은 얼굴 하나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7. 친모의 목

    월령은 심가의 오래된 찬모부터 살폈다.전생에 어머니의 약을 달인 손이었다. 이번 생에는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손. 그 손에 빚이 걸리기 전에, 먼저 그 형편을 알아야 했다.강무진이 며칠, 그 찬모의 살림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찬모에게는, 앓는 노모가 있습니다. 약값이 많이 듭니다. 아직 빚을 진 것은 아니나, 곧 질 형편입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곧 질 빚. '연'은 그런 빚을 기다렸다. 빚이 지는 순간, 그 목에 손을 걸었다. 전생에도, 아마 그렇게 그 찬모의 목이 걸렸을 것이었다."그 약값을, 왕부가 대요."월령이 말했다."드러나게 대면 안 돼요. 그러면 찬모가 왕부에 목이 매여요. 그냥, 그 노모의 약값이 어느 날부터 싸지도록. 약재상 한 사람만 알게."드러나지 않게 돕는 것이, 드러나게 돕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월령은 그 어려운 쪽을 골랐다. 도움을 받은 줄도 모르게 도와야, 그 사람이 왕부에도 '연'에게도 목이 매이지 않았다.*위지헌은 그 방식을 오래 보았다.빚을 미리 막는 것이었다. 목이 매일 자리를, 매이기 전에 풀어 두는 것. 겨눈 자가 걸 곳을 미리 없애는 것."밭을 덮치는 것보다, 이게 더 어렵겠구나."위지헌이 낮게 말했다."밭은 한 번 베면 끝이에요. 그런데 사람의 목은, 하나를 풀어도 또 하나가 걸려요. '연'은 늘 새 목을 찾으니까요.""그럼, 끝이 없지 않으냐.""끝은 있어요."월령이 말했다."목을 하나씩 푸는 것으로는 끝이 안 나요. 그러나 목을 거는 그 손, '연'을 찾으면 끝나요. 목을 푸는 건, 그 손을 찾을 때까지 사람을 지키는 일이에요."*그 무렵, 심가에는 봄볕이 가득했다.유씨는 딸이 붙여 둔 사람들 틈에서, 이제 편안히 지냈다. 무언가로부터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캐묻지 않았다.월령이 친정에 들른 날, 유씨가 딸의 손을 잡았다."요즘은, 밤에 잘 자느냐.""…네.""전에는, 네 눈 밑에 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6. 두 기억이 만나는 자리

    붉은 꽃이 '연'의 표라는 것을 안 뒤로, 두 사람은 밤마다 기억을 맞춰 보았다.월령이 아는 것과, 위지헌이 아는 것은 달랐다. 월령은 겨눔을 당한 자의 자리에서 보았고, 위지헌은 늦게 닿은 자의 자리에서 보았다. 한 사람은 안에서, 한 사람은 밖에서.두 자리의 기억을 겹치자, 혼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났다.*"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을, 기억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약사발 곁에, 마른 잎 몇이 떨어져 있었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꽃인지 몰랐어요. 지금 보면, 적련초였고요.""그 약을, 누가 달였느냐.""심가의 오래된 찬모였어요. 저는 그 사람을 의심한 적이 없었어요. 이십 년을 심가에서 산 사람이었으니까요."위지헌은 잠깐 생각했다."이십 년을 산 사람이, 왜 갑자기.""…빚이었을 거예요."월령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석중도, 마 어멈도, 밭의 약재상도. '연'은 늘 목이 매인 사람을 골라 썼어요. 이십 년을 산 찬모의 목에도, 어느 날 빚 하나가 걸렸겠죠."*두 사람은, 그 찬모의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전생의 일이었다. 이번 생에 그 찬모는, 아직 심가에서 조용히 밥을 짓고 있었다.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채로."이번 생에는, 그 사람이 어머니를 겨눌 일이 없게 해야 해요."월령이 말했다."그 사람을 내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목에 빚이 걸리지 않게. 걸렸다면, 제가 먼저 풀어서."위지헌은 그녀를 보았다.전생의 가해자를 미리 찾아내, 벌하는 대신 그 목을 푸는 사람이었다. 미움으로 갚는 대신, 미움이 자랄 자리를 미리 없애는 사람.*"…령아."위지헌이 낮게 불렀다."너는, 두 생을 살고도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구나.""미워하는 법은 배웠어요."월령이 낮게 답했다."다만, 미워하는 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배웠어요. 전생에 저는 아무도 미워하지 못한 채 죽었고, 미워할 힘도 없이 어머니를 잃었어요. 이번 생에는, 미워하는 대신 바꾸고 싶어요."위지헌은 그 말에, 그녀의 머리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5. 비를 맞던 사람

    이튿날 아침, 왕부의 안채에는 늦도록 볕이 들었다.월령은 낯선 나른함에 눈을 떴다. 곁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위지헌이, 그녀가 깰 때까지 곁에 있었다."…일찍 안 일어나셨네요.""오늘은, 그 버릇을 쉬었다."지난 봄, 그녀가 그에게 하던 말을 그가 돌려주고 있었다. 월령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웃는 얼굴 위로, 아침빛이 앉았다.위지헌은 그 웃는 얼굴을 오래 보았다. 아침빛에 잠긴 그 얼굴을, 지난 생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죽어 가는 얼굴은 보았어도, 아침에 웃는 얼굴은 이번 생이 처음이었다.*낮에, 위지헌이 문득 낮게 말했다."떠올랐다.""…무엇이요.""형장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그 사람."월령의 손이 멎었다."온전히 떠오른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밤사이 되살아났다. 그 사람은 비를 맞으면서도, 손에 든 것을 코에 대고 있었다. 냄새를 맡는 사람처럼.""…손에 든 게, 무엇이었어요.""붉은 꽃이었다."*월령의 숨이, 한 박자 멎었다.붉은 꽃. 비를 맞으면서도 그 냄새를 맡던 사람. 형장을 울지도 피하지도 않고 지켜보던 사람이, 손에 붉은 꽃을 들고 있었다.적련초였다.어머니를 죽인 꽃. 이번 생에, 마른 채로 그녀에게 온 꽃. 그리고 지난 생의 형장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자가 손에 쥐고 있던 꽃.같은 붉은 꽃이, 두 생의 가장 아픈 자리마다 놓여 있었다.*"…그 꽃이, 그자의 표였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연'은 명부로 이어진다고 했잖아요. 명부는 저희끼리 감추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저희 사람 이름만 적어 두는. 그런데 이 붉은 꽃은, 감추는 게 아니에요.""드러내는 표로군."위지헌이 말했다."저희끼리 이어 적는 명부와 달리, 이 꽃은 겨눈 자에게 보라고 내미는 표예요. 어머니의 약사발에, 제 형장에, 그리고 이번 생의 제게. 붉은 꽃이 놓인 자리는, 전부 '연'이 겨눈 자리였어요."*월령은 방첩 장부를 폈다.'연' 아래 여러 줄 곁에, 새 한 줄을 적었다.'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4. 촛불이 다 타도록

    마지막 촛불 하나가, 이제는 익숙해진 안채를 낮게 밝히고 있었다.가례의 첫 밤과는, 다른 밤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낯설었다.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열어야 할지 몰라, 손끝 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오늘 밤은, 두 사람 사이에 숨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두 생의 비밀까지 다 꺼내 놓은 뒤였다.숨길 것이 없는 밤은, 더 뜨거웠다.*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맥이 뛰는 자리였다. 그 맥이 빨랐다. 그를 향해 뛰고 있었다. 위지헌은 그 뛰는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손끝으로, 그 박동을 하나씩 세듯이."…부군."월령이 낮게 불렀다. 그 두 글자가, 그의 안에서 오래 눌러 둔 무언가를 무너뜨렸다.그가 고개를 숙여, 그 맥이 뛰는 자리에 입술을 대었다. 월령의 어깨가 떨렸다. 무서움이 아닌 것에 떠는 떨림이었다. 그 떨림을, 위지헌은 입술로 고스란히 받았다.*입맞춤은, 처음에는 봄볕처럼 옅었다.그러나 옅은 것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졌다. 옅던 것이 짙어지고, 짧던 것이 길어졌다. 월령은 숨을 어디서 쉬어야 할지 몰라, 그의 옷깃을 쥔 손에만 힘을 주었다.옷고름이 풀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비단이 낮게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소리였다.월령은 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촛불이, 붉게 물든 귓불을 비췄다. 열어도 된다고 스스로 말해 놓고도, 몸은 아직 오래된 수줍음을 다 벗지 못했다.위지헌은 그 붉은 귓불에 입술을 대었다."부끄러우냐.""…네.""부끄러워도 된다."그가 낮게 말했다."오늘은, 부끄러운 것까지 다 나에게 보여도 된다."*그의 손이, 풀린 옷고름을 따라 그녀의 어깨를 지났다.전장에서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겨울에 덴 화상 자국 위로, 새 흉이 얹힌 손. 그 거친 손이, 그녀의 살결 위에서는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오늘은 거두지 않았다.늘 한 뼘을 남기던 사람이었다. 문밖에 서고, 손을 뻗기 전에 멎고, 닿기 전의 거리를 지키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8. 문턱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 그늘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