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388. 그때도 있었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8 22:41:20

유씨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심도윤의 갑옷 안소매였다. 해진 데를 꿰매는 손이 빨랐다. 딸이 방에 들어와 앉을 때까지, 그 손이 멎지 않았다.

"어머니."

"말해라. 듣고 있다."

"북문 진영 근처에요, 살구나무 마을이 있었어요?"

바늘이 멎었다.

*

"…누가 그러더냐. 그런 말을."

"부군이요."

유씨가 바늘을 실패에 꽂았다. 그러고는 딸을 보았다. 직설로 보는 눈이었다.

"있었다. 네가 예닐곱 살 때. 네 아버지가 북문 지키던 해에 내가 너를 데리고 진영 근처 마을에 있었어. 살구나무가 많았지, 거기. 너는 그 밑에서 뒤뚱거리고 놀고."

"그 마을에, 열다섯 살 황자가 있었어요? 그때."

유씨가 잠깐 말이 없었다.

"…있었다. 늦둥이 황자를 네 아버지가 맡아 키웠으니까. 말이 없는 아이였어. 밥도 혼자 먹고. 네가 그 아이한테 자꾸 가더라. 왜 가느냐 물으면, 저 아저씨 혼자라서, 그러고."

월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심도윤이 문을 열고 들었다.

손가락 둘이 모자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93. 어린 봄, 다시

    설련이 대문을 두드린 것은, 상이 다 물러난 뒤였다.청아가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엎어 둔 그릇을 바로 놓았다. 밥은 담지 않았다. 대신 더운물 한 대접을 그 자리에 놓고, 젖은 수건을 짜서 설련 쪽으로 밀어 놓았다."…늦었어. 미안."설련이 말했다."늦게 오는 사람 자리부터 놓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언니 자리예요, 이거. 얼른 손부터 닦으세요, 땀범벅이잖아요."청아가 답했다. 설련이 대접을 두 손으로 쥐었다. 뜨거웠다. 데도 되는 온도였다. 설련은 데면서 쥐고 있었다. 담 밖에 하루 서 있던 손이었다. 소나기에 젖었다 마른 손.*"담 밖에서 뭘 봤느냐."월령이 물었다. 설련이 대접을 놓았다."아무것도요. 궁인 셋이 드나들고, 고모는 안 나오고. 사흘째 진지를 안 드신다고요.""그래서 서 있었어?""고모가 저를 자녕궁 찻상 뒤에 숨겨 줬어요. 어릴 적에요. 셈방이 무서워서 울면. 그 손이 지금 혼자 병풍 뒤에 있는 거예요."설련이 소매 안으로 손끝을 접었다."그런데 저는 그 손이 봄 아기씨 이름 적은 걸 알아요. 그래서 못 들어갔어요. 그런데… 돌아설 수도 없어서요.""그러니 서 있었구나.""…예.""다음에 또 서 있고 싶으면 서 있어라. 비는 피하고. 비는."설련이 고개를 들었다. 월령은 부채로 대접의 김을 흩고 있었다. 설련을 보지 않은 채로."마마님은 안 미우세요? 제가 고모 담 앞에 서 있는 게요.""미워할 만큼 한가하지가 않아서."설련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청아가 그것을 보고, 못 본 척 대접의 물을 갈아 왔다. 더 뜨거운 것으로.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 설련의 젖은 소맷단을 보고, 제 마른 겉옷을 그 어깨에 얹었다. 청아가 그것을 보고, 부채질을 설련 쪽으로 돌렸다.*밤에, 위지헌이 궤를 다시 열었다.마른 꽃잎 봉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월령의 손에 놓았다. 탁자에 놓지 않고, 손에."이건 네가 가져라.""부군 건데요, 이거.""네 손에서 온 거다."월령이 봉지를 쥐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92. 병풍이 얇아지다

    청화각에서 자녕궁까지는 회랑 하나였다.혜귀인 류담희가 그 회랑을 지났다. 소매에서 유자 향이 옅게 났다. 자녕궁 문 앞에 궁인이 하나 서 있었다. 예전엔 여섯이 섰던 자리였다.류담희가 걸음을 늦췄다. 늦추다가, 도로 걸었다. 스물둘의 얼굴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찻잔 뚜껑을 비뚤게 놓고 제 손으로 바로잡는 버릇처럼, 그녀는 지나가며 소매를 한 번 여몄다. 향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자녕궁 안은 조용했다.궁인 셋의 발소리가 낮았다. 낮아서, 이제는 그 발소리가 숙비를 대신 말하지 못했다. 말할 사람이 너무 적었다.숙비는 병풍 뒤에 있었다. 찻상은 그대로였다. 잔 둘. 왼쪽으로 놓인 뚜껑 꼭지."…마마. 진지를 좀.""두어라.""사흘째이십니다, 마마.""두라 하였다."궁인이 물러났다. 숙비는 소매 안의 찌그러진 자물쇠를 만졌다. 오래. 그러고는 손을 뺐다.*왕부에서는 밥상이 컸다.방어멈이 큰 상을 마당에 내다 놓았다. 안채 상으로는 모자랐다. 사람이 많았다.초비와 묵아가 장작을 패고 온 손으로 앉았다. 은매가 무나물을 놓았다. 서윤이 심가에서 건너와, 아란의 손을 잡고 들었다. 송란영이 그 뒤에 섰다. 처음 오는 집이었다. 유씨가 그 등을 밀었다."앉아라, 란영아. 남의 집 아니야. 뭘 서 있어."청아가 소반을 날랐다. 기윤이 그 소반을 받았다. 한 걸음 물러나지 않고. 방어멈이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혀를 차면서 웃었다.독고진겸이 상 한 귀퉁이에 앉았다. 별채 사람이 안채 마당 상에 앉은 것은 두 번째였다. 아란이 그 옆에 앉아, 직구로 물었다."아저씨는 누구야? 처음 보는데.""…셈하는 사람이오.""셈이 뭐야?""…값 매기는 거요. 얼마짜리인지.""당과도 값 매겨? 이것도?"독고진겸이 잠깐 말을 못 했다. 그러다 낮게 답했다."…당과는, 안 매기오. 그건."아란이 만족한 얼굴로 당과 하나를 그 앞에 놓았다. 독고진겸은 그것을 오래 보다가, 먹었다.허도겸이 늦게 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91. 아들의 답

    새벽에, 위명서는 창고 앞에 섰다.궤가 나간 창고였다. 비어 있었다. 찌그러진 매화 자물쇠가 문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떼어 소매에 넣었다.내관이 마당 끝에서 그를 보았다. 무엇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삼전하. 자녕궁에서 사람이 와 있습니다. 답을, 그, 기다리신다고요.""안다.""어찌 아뢸까요.""내가 간다. 그리 전해라."*자녕궁 병풍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숙비가 어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밤새 앉아 있었는지, 병자의 얼굴이 더 야위어 있었다. 위명서는 그 앞에 섰다."생각하였느냐.""예.""그래서."위명서가 소매에서 자물쇠를 꺼냈다. 찌그러진 매화. 어머니 앞에 놓았다. 탁자 위에. 손에 쥐여 주지 않고."이건 제가 부쉈습니다. 제 손으로."숙비가 그것을 보았다. 오래."어머니가 제 문양을 달아 주셨고, 저는 그 문양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봤습니다. 다 봤습니다. 보지 말라 하신 것을, 다.""그래서.""아니오."*방 안이 조용해졌다.숙비의 손끝이 탁자 위에서 멎었다. 아들이 그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스무 해 동안."아니오, 라 하였느냐.""예. 그 아이를 궁으로 데려오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그다음에 무엇을 하시든, 그 앞을 제가 열어 드리지 않습니다.""그 여인의 편에 서겠다는 말이냐.""아닙니다."위명서가 말했다. 낮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숙부 편도 그 여인 편도 아닙니다. 어머니 편도… 아니고요. 저는 제 자리에 섭니다. 삼황자 자리에. 거기 서서 제 이름으로 치른 값이 있으면 제가 갚고, 제 이름으로 진 빚이 있으면 제가 집니다. 다만 어머니 대신 남의 아이를 지우는 것은, 제 값도 제 빚도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숙비는 오래 답하지 않았다.그러다, 웃었다. 옅게. 야윈 얼굴에, 그 웃음이 이번에는 조금 오래 갔다."네가 셈을 배웠구나.""어머니께서 가르치셨습니다.""그래. 내가 가르쳤지."숙비가 찌그러진 자물쇠를 집었다. 손끝이 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90. 마지막 패

    "어머니께서 부르셨다 들었습니다."위명서가 병풍 앞에 섰다. 앉지 않았다."북영에서 여기까지가 한 시진이다. 오래 걸렸구나.""말이 느렸습니다.""네 말은 느린 말이 아니지."숙비가 병풍을 접었다. 제 손으로. 궁인을 부르지 않고. 궁인이 이제 몇 남지 않았다는 것을, 위명서는 그 손에서 읽었다.*"앉아라.""서 있겠습니다.""북영에서 그리 배웠느냐.""…예."숙비가 옅게 웃었다. 야윈 얼굴에, 그 웃음이 오래 안 갔다."명서야. 네 창고에서 나간 궤 셋을 네 아비가 봉하였다. 젖줄이 끊긴 것이다. 오라비는 넘어갔고, 오상궁은 잡혔고, 노가는 무너졌다. 이 어미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아느냐.""…모릅니다.""너다."*숙비가 아들의 손을 잡았다.야윈 손이었다. 그런데 쥐는 힘이 야위지 않았다."네 이름으로 치른 값이 있다. 그 값을 네가 거두어라.""…값이라 하시면, 무슨.""섭정왕가의 여아다. 그 아이가 자라면 네 자리는 없다. 위지헌의 피와 심가의 군심을 한 몸에 가진 아이니라. 네 아비가 그 아이를 안는 날, 너는 삼황자로 늙는다."위명서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어미가 못 하는 것을 아들이 하여라. 네 이름으로 치른 값이니 네 것이다. 네가 그 아이를 궁으로 데려오너라. 어린 사촌 누이를 아끼는 오라비로. 그다음은 내가 한다."*위명서의 손이, 어머니의 손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이 손 안에 무엇이든 놓았다. 붓도, 매화 가지도, 처음 쓴 글씨도. 놓으면 어머니가 웃었다."…어머니.""말하여라.""그 아이를 데려오면, 어머니는 그다음에 무엇을 하십니까."숙비가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으로 답했다. 위명서는 그 답을 창고에서 이미 보았다. 붉은 표. 값 대신."효도에도 값이 있느냐."숙비가 낮게 말했다."네 아비가 너를 북영에 보낸 것은 너를 어미에게서 떼려는 것이다. 위지헌 곁에 두는 것은 그 여인을 네게 보여 못 갖게 하려는 것이고. 모두가 셈이다. 너를 위한 셈은 이 방에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89. 미끼

    곤원전 뒤채는 옥보다 밝았다.명부지기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늙은 손이 무릎 위에 포개져 있었다. 옷자락을 쥐지 않았다. 쥘 까닭이 없어진 손이었다. 손자를 끝내 못 찾았다는 기별이 어제 이 방에 닿았다. 절에서 하루 만에 도로 데려간 뒤로, 아무도 그 아이를 보지 못했다고."오실 줄 알았지요. 마마님이 오늘쯤.""왜요.""살구나무 이야기를 들으셨을 테니까요. 심 부인이 입을 열면요, 그다음은 이 늙은이지요. 순서가 그렇습니다."월령이 앉았다. 접지 않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마른 명부의 사본이었다.*"첫 장이 있다면서요. 명부의.""있습니다. 있고말고요.""어디에요."명부지기가 웃었다. 늙은 웃음이었다."그걸 말씀드리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마마님. 저는 답을 하나씩 팔았습니다. 손자 하나에 답 하나. 늙은이 셈이 그랬어요. 느려도 그랬어요.""팔았다고요. 지난 말로.""어제 기별이 왔지요. 절에서 하루 만에 도로 데려갔다고. 그 뒤는 아무도 모른다고. 찾는 사람들이 산 너머까지 갔다는데, 없었답니다."명부지기가 무릎 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옥에서 '위에서'라는 말 하나 드린 건, 그때는 아직 팔 게 있는 줄 알아서였고요. 그 말 하나로 마마님이 옥까지 오셨고, 옥에서 그 향을 맡으셨지요. 아닙니까?"월령은 그 말을 받았다. 맞는 말이었다."그런데 이제 팔 것이 없어져서요. 없어지니까 입이 열립니다, 마마님. 늙은이 셈이 그렇습니다.""그럼 이번 답 값은요. 뭘 받으시려고요.""…제 목숨이지요. 그것밖에 남은 게 없어서."*"명부지기는요, 대를 잇습니다."명부지기가 낮게 말했다."앞의 손이 제게 넘겼고, 저는 다음 손에 넘겨야 하지요. 그런데 이제 넘길 손이 없습니다. 오상궁이 잡혔으니까요. 그 아이가 제 다음이었거든요.""그래서요.""그래서 제가 마지막입니다. 제가 죽으면 명부는 끊깁니다. 그러니 마마님이 저를 안 죽이셔야, 명부 끊기는 날까지 제가 답을 팔지요. 하나씩. 천천히."월령은 그 늙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88. 그때도 있었다

    유씨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심도윤의 갑옷 안소매였다. 해진 데를 꿰매는 손이 빨랐다. 딸이 방에 들어와 앉을 때까지, 그 손이 멎지 않았다."어머니.""말해라. 듣고 있다.""북문 진영 근처에요, 살구나무 마을이 있었어요?"바늘이 멎었다.*"…누가 그러더냐. 그런 말을.""부군이요."유씨가 바늘을 실패에 꽂았다. 그러고는 딸을 보았다. 직설로 보는 눈이었다."있었다. 네가 예닐곱 살 때. 네 아버지가 북문 지키던 해에 내가 너를 데리고 진영 근처 마을에 있었어. 살구나무가 많았지, 거기. 너는 그 밑에서 뒤뚱거리고 놀고.""그 마을에, 열다섯 살 황자가 있었어요? 그때."유씨가 잠깐 말이 없었다."…있었다. 늦둥이 황자를 네 아버지가 맡아 키웠으니까. 말이 없는 아이였어. 밥도 혼자 먹고. 네가 그 아이한테 자꾸 가더라. 왜 가느냐 물으면, 저 아저씨 혼자라서, 그러고."월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심도윤이 문을 열고 들었다.손가락 둘이 모자란 손으로 문지방을 짚었다. 아내와 딸이 마주 앉은 것을 보고, 문가에 앉았다."…살구나무냐.""예, 아버지.""그 아이가 네 지아비다."심도윤이 짧게 말했다. 그러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모자란 손이 무릎 위에서 한 번 쥐어졌다."아버지는 아셨어요? 그 아이가 그 아이라는 거.""알았다.""언제부터요.""북경군 받던 날. 열여덟에. 내 앞에 와서 절을 하는데, 소매에 꽃잎도 없는데 꽃잎 떼는 손을 하더라. 버릇처럼."심도윤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때 알았다. 뭘 쥐고 사는지."유씨가 남편을 흘겨보았다."당신은 그걸 알면서 나한테 한마디를 안 했소? 여태?""…안 물었지, 당신이.""이 집 남자들은 다 그 말을 하네. 안 물었지, 안 물었지."유씨가 혀를 찼다. 월령은 그 말에 잠깐, 아주 잠깐 웃었다. 웃고 나서 도로 굳었다.*"어머니. 그 봄에, 궁녀가 있었어요? 마을에."유씨의 손이 실패 위에서 멎었다."침방 궁녀 옷을 입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8. 문턱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6. 그늘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