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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6 09:58:08

카일의 병실을 뒤로하고 자신의 응접실로 돌아온 블랑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짙고 우아한 홍차 향에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는 단정한 제복 차림의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레녹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귀족의 미소였으나, 블랑의 안위를 살피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옅게 배어 있었다.

"저는 무사해요, 레녹. 하지만 아이린이 자결했다고 들었어요."

블랑의 말에 레녹은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감금 중인 죄인의 품에서 독병 하나 찾아내지 못하다니…… 황실 기사단의 무능함이 참으로 한심할 따름입니다.”

그의 표정에는 죽은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조차 없었다.

"그녀를 살려두는 편이 서연합의 꼬리를 밟기에는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페온을 버린 서연합의 남은 끄나풀들을 일망타진할 훌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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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40화

    카일의 병실을 뒤로하고 자신의 응접실로 돌아온 블랑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짙고 우아한 홍차 향에 걸음을 멈추었다.눈앞에는 단정한 제복 차림의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자리에서 일어난 레녹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귀족의 미소였으나, 블랑의 안위를 살피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옅게 배어 있었다."저는 무사해요, 레녹. 하지만 아이린이 자결했다고 들었어요."블랑의 말에 레녹은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감금 중인 죄인의 품에서 독병 하나 찾아내지 못하다니…… 황실 기사단의 무능함이 참으로 한심할 따름입니다.”그의 표정에는 죽은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조차 없었다."그녀를 살려두는 편이 서연합의 꼬리를 밟기에는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페온을 버린 서연합의 남은 끄나풀들을 일망타진할 훌륭한 미끼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지나간 장기말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지만, 꽤 아쉬운 수이긴 합니다."“하지만 이 일로 폐하께서 페온가를 따르던 귀족들도…….”“예. 지금쯤 귀족 사회를 공포로 물들이고 계시겠지요.”블랑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레녹은 테이블 위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가볍게 밀어 놓았다."그래서 저는 다른 것을 준비했습니다. 내일 아침, 귀족 회의에 상정될 특별 법안입니다."블랑의 시선이 매끄러운 양피지 위로 향했다. 빼곡하게 적힌 법률 조항과 귀족들의 명단이 눈에 들어왔다."지난 의회에서 페온 가문이 서연합과 내통했다는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까발려졌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공작가의 뿌리는 폐하의 검만으로는 온전히 뽑히지 않지요.""이건…….""페온 공작가가 지난 반년 간 운용했던 모든 차명 계좌의 동결, 그리고 그들과 단 한 닢이라도 채무 관계로 얽혀 있는 모든 귀족 가문들에 대한 전면적인 세무 조사 발의안입니다."블랑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39화

    카일은 핏발 선 눈동자를 굴려 낯선 천장과, 제 곁에서 겁에 질려 굳어 있는 시녀를 차례로 담아냈다. 무심히 허공을 맴돌던 그의 시선이 시녀의 얼굴에 가닿는 순간, 눈매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에다.'에다의 존재는 블랑이 곧 로제라는 가장 완벽한 증명이었다. 타들어 가는 화상의 고통 속에서도 카일의 입매가 애틋하고도 잔혹한 호선을 그렸다.그는 독기로 인해 긁힌 듯한 쇳소리를 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그녀… 블랑 백작님은 무사하신가.”“아…, 네, 네! 덕분에요.”에다가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카일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맹수처럼 그녀를 굽어보았다. 목숨을 걸고 주인을 구한 호위가, 자신이 모셔야 할 상전의 처지를 가늠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압박이었다.“원래 드라켄의 사람이었나?”“그, 그건 왜 궁금하시죠?”카일은 문밖을 슬처 쳐다보면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아무도 없으니 하는 말인데,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영애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 나도 용병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 보니 감이라는 것도 있고.”그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사실 내가 보기엔 황제가 허울 좋게 작위만 준 창부 같거든.”“무슨 말도 안되는!”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에다는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그, 그게……! 백작님은 과거의 기억이 없으셔서 기댈 곳이 폐하뿐이십니다……. 그러니까 창부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에다의 입에서 결국 '기억이 없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카일의 핏발 선 눈동자가 번뜩였다."기억을 잃어?""네, 네! 그러니까 제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백작님은 그저…….""그럼 기댈 곳이 황제 하나뿐이라는 건데. 황제의 총애가 언제까지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줄 알고?"카일이 비죽 입꼬리를 비틀며 한층 더 거칠게 도발했다.“상황을 보니 황궁 안팎으로 적이 득실거리는 모양이던데. 만약 황제가 다른 여인이라도 들이면 아니, 정식 황후라도 생긴다면 그때 네 주인은 꼼짝없이 뒈지는 거 아니야?”“폐하께서는 백작님을 끔찍이 아끼십니다!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38화

    "무, 무슨……!"놀란 아이린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카시안의 거대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블랑이 죽었다는 낭보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지. 어쩌나,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았는데."카시안이 무감각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며 차갑게 비웃었다."다음 계획은 뭐였지? 그간의 정을 봐서 조금 더 놀아줄까도 싶었다만. 네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그 쓸모없는 머리는 이제 영원히 쉬게 해주는 게 낫겠군."자신을 내려다보는 카시안의 얼굴에서, 아이린은 제게 내려질 죽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절망은 이내 소름 끼치는 광기로 뒤바뀌었다."네 뜻대로 이루어주지는 않을 거야, 카시안."아이린은 찢어질 듯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쥐고 있던 독병의 마개를 열어 망설임 없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이, 무슨……! 당장 멈춰라!"뒤따라 들어온 기사단장이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낚아채려 했으나, 카시안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제 손으로 지옥불을 삼키는 꼴을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컥, 커윽……!"순식간에 퍼진 독에 아이린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사지가 찢기는 고통에 몸이 뒤틀렸지만, 그녀는 바닥을 박박 기면서도 카시안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정? 그럼, 큭…… 내가 엘런에게 들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남겨주지.""…….""목이 잘렸다던, 아르센의 황제가 살아있다더군. 제 아내를 찾겠다고 서연합의 경비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주했어."아이린의 핏발 선 눈동자가 저주처럼 번뜩였다."참 이상하지 않아? 서연합이 아르센을 짓밟던 바로 그 시기에…… 당신이 기억을 잃은 출처 모를 여자를 황궁에 들이박았다는 게 말이야."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자가 뱉을 수 있는 가장 지독하고 치명적인 저주였다. 카시안의 붉은 눈매가 일순간 서늘하게 굳어졌다.하지만 그는 이내 무심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서. 패가망신해서 도망친 놈이 언젠가 찾아오기라도 할 거란 경고인가?"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37화

    지하 감옥을 채우던 비명은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멎었다.기사단장이 조심스레 바친 서류에는 고문의 흔적을 증명하듯 검붉은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다."주동자는 아이린 공녀와 옥에 갇힌 페온 공작을 따르던 가문의 잔당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하게 된 원인이 전부 블랑 백작님 때문이라 여겨, 앙심을 품고 벌인 짓이라 자백했습니다."서류를 훑어내리는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번졌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고 감히 원망의 화살을 블랑에게 돌렸다는 사실이, 그의 분노를 더욱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아이린은 지금 어디 있지.""아직 페온 가의 본저에 가택 연금 중이옵니다."보고를 들은 카시안이 핏발 선 눈동자로 잔혹한 호선을 그렸다."페온의 저택으로 간다."낮게 읊조리는 끔찍한 저음에는 이제 감정이라곤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감히 내 것을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가르쳐줘야겠군."..같은 시각, 황실 비원의 깊숙하고 은밀한 객실.단정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블랑은, 홀로 카일이 누워있는 방을 찾았다.짙은 약초 냄새가 무겁게 내려앉은 방 안에는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만 맴돌았다. 해독 전문가가 매달린 덕에 간신히 사선은 넘었으나, 그는 여전히 깊은 의식 불명 상태였다.블랑은 침대 곁에 서서, 붕대가 단단히 감긴 그의 거칠고 거대한 체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자꾸만 밟히는 눈동자.'비록 지금은 굳게 닫혀 있지만, 자신을 감싸 안고 쓰러지던 순간 맹렬하게 부딪쳐 오던 그 형형한 눈빛이 유독 뇌리에 남았다.어쩐지 지독하게 익숙했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그 눈을 닮은 자가 누구인지 블랑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레온.’과거의 흉터처럼 묻어두었던 이름이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블랑은 이내 그 실없는 가정을 서늘한 이성으로 잘라냈다.‘같은 인물일 리가 없지.’골격부터가 완벽하게 달랐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레온과, 눈앞에 죽은 듯 널브러져 있는 이 거대한 사내는 뿜어내는 기백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36화

    쾅—!대리석 바닥을 부술 듯 짓이기며 달려온 맹렬한 발소리와 함께, 다이닝 룸의 문이 거칠게 열어 젖혀졌다.안으로 들어선 카시안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실내를 훑었다.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사지가 기형적으로 꺾인 암살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맹독에 당해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카일이 널브러져 있었다."블랑."마침내 카시안의 시선이 카일의 곁에 꼿꼿하게 서 있는 블랑에게 가닿았다. 그녀의 실크 드레스 자락이 길게 찢겨 나가 있었다.카시안의 서늘한 시선이 그 거친 단면을 훑었다. 난전 중에 암살자들의 칼날에 찢긴 흔적이 아니었다.'스스로 찢었군.'그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쓰러진 카일의 어깨로 향했다. 그녀가 제 손으로 가차 없이 뜯어낸 치맛자락은 그의 상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상황을 파악한 카시안의 눈동자가 이내 다시 블랑에게로 되돌아왔다. 그의 붉은 눈매가 불쾌함으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하얀 손끝과 남은 치맛자락에는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그래도 빨리 오셨네요."블랑이 피 묻은 손을 젖은 냅킨으로 가볍게 닦아내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서늘한 얼굴로 카시안을 마주 보았다. 조금 전까지 암살자들의 칼날이 오가던 방에 있던 여자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이 자를 살려주세요."블랑은 떨림 없는 목소리로 바닥에 쓰러진 카일을 턱짓했다."맹독입니다. 제 목숨을 대신해 다친 자이니, 폐하께서 어떻게든 살려내 주시죠."부탁이 아니라 당당한 요구였다. 제 목숨을 빚진 호위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 꼿꼿한 눈빛을 받으며, 카시안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그리고는 핏발이 선 서늘한 눈동자로 블랑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다친 곳은."낮은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뺨과 목덜미, 드레스가 찢겨 드러난 어깨를 살피는 카시안의 손길은 강박적일 만큼 집요했다.혹여나 보이지 않는 생채기라도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35화

    순간, 타티아나의 숨이 턱 막혔다.'군사 기밀? 비밀 보급로?'속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혀 매질만 당하던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엘런은 자신의 소유물인 그녀에게 전술 지도의 자락조차 보여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모른다고 대답하는 순간, 눈앞의 유일한 동아줄이 끊어질 것이 뻔했다.카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그녀의 쓸모를 저울질하듯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생각해. 생각해내야 해!'타티아나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집었다. 엘런이 술에 취해 지껄였던 끔찍한 말들, 채찍을 휘두르며 퍼붓던 욕설의 파편들. 살아남기 위해 바닥을 박박 긁듯 기억을 파헤치던 그녀의 뇌리에 불현듯 몇 가지 조각들이 스쳤다."아, 알아! 나, 나 알아, 얀!"타티아나가 카시안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허겁지겁 말을 쏟아냈다."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어. 엘런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욕을 했거든. '빌어먹을 검은 뱀 계곡'이라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돼서 군량미 수레가 도무지 빠져나오질 못한다고 성질을 냈어!""검은 뱀 계곡……."마수들이 득실거려 아무도 쓰지 않는 버려진 사지(死地).서연합의 은밀한 주력 보급로가 그곳이었단 말인가. 카시안의 눈빛이 흥미롭게 번뜩였다. 그 반응에 용기를 얻은 타티아나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다음 퍼즐을 다급히 끼워 맞췄다."그, 그리고 제라드! 남부의 제라드 백작! 엘런이 그 사람 서신을 찢으면서 죽여버리겠다고 했어! 뒤로 무기를 빼돌리고 있다면서……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그 늙은이 목부터 쳐야 한다고 했어!"그것은 타티아나에게는 그저 공포스러웠던 폭력의 기억일 뿐이었으나, 제국을 굴리는 황제 카시안에게는 서연합의 숨통을 한 번에 끊어버릴 가장 치명적이고 완벽한 열쇠였다.조용히 그녀의 자백을 머릿속에 조립해 낸 카시안의 입매가 진득한 호선을 그렸다.'완벽해. 적의 끊어진 보급로와, 내부에서 곪아 터질 반역자의 목줄이라니.'그는 다정한 구원자의 얼굴을 한 채, 타티아나의 눈물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6화

    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5화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4화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레온은 그대로 굳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로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저의 폐하를 너무나 연모하거든요.]그 말은 독처럼 달콤했고,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연모……?’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로제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수줍은 여인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어떠했나.첫날밤조차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제대로 안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 본 로제는 달랐다.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밤일’을 운운하고, 적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3화

    “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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