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달칵.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열렸다. 짙은 상념을 끝낸 블랑이 거실로 걸어 나오자,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카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따라와요. 당신이 제게 얼마나 유용한 호위인지, 오늘 밤 직접 확인해야겠으니.”블랑은 탁자 위에 놓인 짙은 색의 숄을 집어 들어 얼굴을 깊숙이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카일이 속삭이듯 물었다.“아무도 모르게 나가셔야 하는 겁니까.”“다 알아도 폐하는 몰라야겠지?”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일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목적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쥐새끼 한 마리 눈치채지 못하게 모시겠습니다.”어차피 마차를 부르거나 정문으로 걸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 블랑은 카일의 능력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짧게 목적지를 내뱉었다.“레녹 후작의 저택.”그 이름이 떨어지는 순간, 카일의 가면 아래 감춰진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 재수 없는 여우 새끼.'야심한 시각에 그 자의 사저를 은밀히 찾는다는 것이 불쾌했지만, 카일은 이내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읊조렸다.“실례하겠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일의 단단한 한 팔이 블랑의 얇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앗….”짧은 신음이 새어 나올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이 열린 창밖의 짙은 어둠 속으로 쏘아지듯 허공을 갈랐다.경비병들이 교대하는 찰나의 사각지대. 카일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도약으로 성벽과 지붕을 밟으며 밤의 그림자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었다.블랑은 뺨을 날카롭게 스치는 밤바람 속에서 숨을 죽였다. 공중을 가르는 그의 움직임은 인간의 영역을 가볍게 벗어나 있었다.'마력을 쓰는 건가? 아니면 그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가?‘특유의 마나 파동이 뚜렷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무장한 경비병들의 시야를 완벽하게 기만하며 도약하는 이 기척 없는 은밀함은 평범한 용병이나 기사의 수준이 아니었다.그가 숨기고 있는 진짜 힘의 근원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이 사내는 방금 전 서재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뒤돌아선 카시안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블랑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하아.”긴장감이 풀어지는 것과 동시에 얼굴의 표정도 스르륵 풀렸다.‘전장에 따라가서 이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아파오는 머리에 미간을 찡그리는 찰나, 시선이 느껴졌다.‘참, 카일이 있었지.’블랑은 다시 표정을 다잡으며 짧게 명했다.“혼자 있고 싶으니 따라오지 말고 여기에 있으세요.”자리에서 일어난 블랑은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서재로 들어갔다.달칵. 문이 닫히자, 비로소 정적과 함께 완벽한 고립이 찾아왔다. 블랑은 그제야 길고 깊은 숨을 토해냈다.‘익숙해질 법도 한데, 연기하는 짓도 이제 점점 지쳐가.’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서재 구석의 책장으로 다가갔다.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 가장 두껍고 지루해 보이는 제국 법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책장을 넘기자 속을 정교하게 파내어 만든 좁은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에다를 시켜 남몰래 마련한 텅 비다시피 한 자금 장부와, 블랑이 기억을 더듬어 직접 그려 넣은 아르센의 조악한 지도가 전부였다.카시안의 시선이 닿는 이 별궁에서 그녀가 쥐고 있는 패는 이토록 초라했다. 블랑은 텅 빈 장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이대로 전장의 흐름에 무력하게 휩쓸려갈 수는 없어.'전쟁이 터지면 카시안의 시야는 온통 전선으로 쏠릴 것이다. 그 공백은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혼란을 틈타 뿔뿔이 흩어진 아르센의 난민들을 규합하고, 카시안의 눈을 피해 거대한 자금을 세탁해 세력을 불려야 한다.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완벽한 청사진을 그려두었어도, 텅 빈 두 손만으로는 결코 이 거대한 판을 굴릴 수 없었다.‘단순히 뒤에서 움직여 주는 게 아니라 옆에서 도울 수족이 필요해.’“지금 내게 에다 말고 누가 있을까.”낮게 읊조리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던 블랑이 이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카일!’암살자들을 상대하던 카일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 짐작하는 것보다 훨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무색하게, 블랑의 침소에 내려앉은 공기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무거웠다.방 안으로 들어선 카시안은 묵묵히 다가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부서질 듯 연약한 유리를 쥐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꼭 작별인사로 하는 사람 같네요.”블랑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살갗에 닿은 나직한 속삭임은, 그 다정한 품과는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서연합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아침 인사를 대신한, 건조하고도 잔혹한 출정 통보였다.“갑자기요?”블랑의 은회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너무 빨라. 이제 막 서연합의 심기를 건드려 불씨만 당겨놓았을 뿐인데, 이렇게 단숨에 전면전으로 판을 엎어버린다고?‘블랑은 보이지 않게 입술 안쪽을 지긋이 깨물었다.'불씨를 당기는 데만 집중하느라, 정작 내가 여제가 될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했어. 흩어진 아르센의 난민, 숨어있는 레지스탕스, 그들을 규합할 군자금과 무기… 아직 어느 것 하나 내 손에 온전히 들어온 게 없는데!'판이 너무 일찍 열렸다.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영원히 전리품으로 전락해 카시안이 주는 모이만 먹고 살아야 할 터였다.그녀는 이내 카시안의 제복 옷자락을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당장 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직접 뛰어들어 기회를 탈취해야만 했다.“그럼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카시안이 제 품에 안긴 블랑의 어깨를 천천히 밀어냈다.“어딜 말이지.”“폐하가 계시는 곳 어디든요. 그곳이 전장이라 할지라도요.”그의 커다란 손이 블랑의 뺨을 다정하게, 그러나 결박하듯 감싸 쥐었다. 거리를 둔 채 옭아매는 시선이었다.“거긴 여인들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야. 게다가 널 내내 내 옆에 붙여 놓을 수도 없어.”하지만 블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제 뺨을 쥔 카시안의 커다란 손등 위로 두 손을 겹쳐 쥐며,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망울을 일렁였다.“어차피 폐하가 없는 이 황궁은 제게 감옥이나 다름없을 텐데,
끼이익—.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비원 병실의 문이 열렸다. 피비린내와 독한 약초 냄새가 찌들어 있던 공기 속으로, 이질적일 만큼 우아하고 짙은 홍차 향이 스며들었다.레녹은 우아하게 걸음을 멈추고는, 느릿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병상에 기대어 있는 사내를 관찰했다.'적도 성가시지만, 그녀의 곁을 맴돌 불쾌한 경쟁자라면 더더욱 살려둘 수 없지.'서린 레녹의 푸른 눈동자와, 사선을 넘나들던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체를 꼿꼿이 세운 카일의 핏발 선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혔다.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것은 곁에서 굳어 있던 에다였다. 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굽혔다."레녹 후작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백작님의 은인께서 무사히 깨어나셨는지 확인차 들렀네."레녹이 무미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카일의 곁에서 잔뜩 긴장해 있는 에다를 향해 턱짓했다."에다. 이 자와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겠나.""아, 네. 후작님……."에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려던 찰나였다."멈춰."거칠고 묵직한 쇳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카일의 시퍼렇게 날 선 눈동자가 레녹을 향한 채, 입술만을 비틀어 에다에게 명했다."백작께서 계속 날 간호하라 명하셨을 텐데. 어디에도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예……? 하지만, 후작님께서……."카일은 속으로 차갑게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주인을 지키려 눈을 치켜뜨던 에다는 이미 완벽하게 검증된 아군이었다.반면 눈앞의 사내는 달랐다. 귀족의 오만함을 두른 이 낯선 불청객이, 그저 정탐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살수들과 같은 편인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에다는 카일이 내세운 최소한의 방어선이자 목격자였다.그 기민하고도 날 선 경계심을, 레녹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호오.'레녹의 눈 깊은 곳에 짙은 흥미가 일었다.'단순한 미친개가 아니라, 의심할 줄 아는 영리한 사냥개로군. 마음에 들어. 합격이야.'
카일의 병실을 뒤로하고 자신의 응접실로 돌아온 블랑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짙고 우아한 홍차 향에 걸음을 멈추었다.눈앞에는 단정한 제복 차림의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자리에서 일어난 레녹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귀족의 미소였으나, 블랑의 안위를 살피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옅게 배어 있었다."저는 무사해요, 레녹. 하지만 아이린이 자결했다고 들었어요."블랑의 말에 레녹은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감금 중인 죄인의 품에서 독병 하나 찾아내지 못하다니…… 황실 기사단의 무능함이 참으로 한심할 따름입니다.”그의 표정에는 죽은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조차 없었다."그녀를 살려두는 편이 서연합의 꼬리를 밟기에는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페온을 버린 서연합의 남은 끄나풀들을 일망타진할 훌륭한 미끼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지나간 장기말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지만, 꽤 아쉬운 수이긴 합니다."“하지만 이 일로 폐하께서 페온가를 따르던 귀족들도…….”“예. 지금쯤 귀족 사회를 공포로 물들이고 계시겠지요.”블랑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레녹은 테이블 위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가볍게 밀어 놓았다."그래서 저는 다른 것을 준비했습니다. 내일 아침, 귀족 회의에 상정될 특별 법안입니다."블랑의 시선이 매끄러운 양피지 위로 향했다. 빼곡하게 적힌 법률 조항과 귀족들의 명단이 눈에 들어왔다."지난 의회에서 페온 가문이 서연합과 내통했다는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까발려졌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공작가의 뿌리는 폐하의 검만으로는 온전히 뽑히지 않지요.""이건…….""페온 공작가가 지난 반년 간 운용했던 모든 차명 계좌의 동결, 그리고 그들과 단 한 닢이라도 채무 관계로 얽혀 있는 모든 귀족 가문들에 대한 전면적인 세무 조사 발의안입니다."블랑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
카일은 핏발 선 눈동자를 굴려 낯선 천장과, 제 곁에서 겁에 질려 굳어 있는 시녀를 차례로 담아냈다. 무심히 허공을 맴돌던 그의 시선이 시녀의 얼굴에 가닿는 순간, 눈매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에다.'에다의 존재는 블랑이 곧 로제라는 가장 완벽한 증명이었다. 타들어 가는 화상의 고통 속에서도 카일의 입매가 애틋하고도 잔혹한 호선을 그렸다.그는 독기로 인해 긁힌 듯한 쇳소리를 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그녀… 블랑 백작님은 무사하신가.”“아…, 네, 네! 덕분에요.”에다가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카일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맹수처럼 그녀를 굽어보았다. 목숨을 걸고 주인을 구한 호위가, 자신이 모셔야 할 상전의 처지를 가늠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압박이었다.“원래 드라켄의 사람이었나?”“그, 그건 왜 궁금하시죠?”카일은 문밖을 슬처 쳐다보면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아무도 없으니 하는 말인데,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영애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 나도 용병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 보니 감이라는 것도 있고.”그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사실 내가 보기엔 황제가 허울 좋게 작위만 준 창부 같거든.”“무슨 말도 안되는!”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에다는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그, 그게……! 백작님은 과거의 기억이 없으셔서 기댈 곳이 폐하뿐이십니다……. 그러니까 창부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에다의 입에서 결국 '기억이 없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카일의 핏발 선 눈동자가 번뜩였다."기억을 잃어?""네, 네! 그러니까 제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백작님은 그저…….""그럼 기댈 곳이 황제 하나뿐이라는 건데. 황제의 총애가 언제까지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줄 알고?"카일이 비죽 입꼬리를 비틀며 한층 더 거칠게 도발했다.“상황을 보니 황궁 안팎으로 적이 득실거리는 모양이던데. 만약 황제가 다른 여인이라도 들이면 아니, 정식 황후라도 생긴다면 그때 네 주인은 꼼짝없이 뒈지는 거 아니야?”“폐하께서는 백작님을 끔찍이 아끼십니다!
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레온은 그대로 굳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로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저의 폐하를 너무나 연모하거든요.]그 말은 독처럼 달콤했고,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연모……?’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로제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수줍은 여인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어떠했나.첫날밤조차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제대로 안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 본 로제는 달랐다.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밤일’을 운운하고, 적
“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