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56화

Author: 십일
재운은 이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다.

“그래서 계속 생각해봤는데, 너무 이상해요.”

정은은 이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이상하네.”

“그 3학년 선배 말로는, 진일 선배 부모님이 건강이 안 좋으시고 자주 편찮으시다고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늦게 오는 거 아닐까요?”

서준은 차분하게 분석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전에도 늦은 적 없으니 이렇게 갑자기 늦을 리 없어. 다른 돌발 상황이 생긴 게 분명해.”

“다른 상황?”

“응. 예를 들어 부모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떠날 수 없거나, 집안에 무슨 변고가 생겨서 올 수 없다든가.”

“만약 진일 선배의 집안 문제라면, 재운이까지 안 온 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건...”

정은이 말했다.

“추측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지금은 직접 선배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이후 며칠 동안 세 사람은 전화, 이메일, 문자, SNS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진일의 답장이 없었다. 문자는 모두 바다에 빠진 돌처럼 소식이 없었다.

“이젠 어떡하죠?”

개학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다행히 정은은 오미선에게 설명했고, 오미선은 학교 측과 협의해 두 사람의 처분을 면하게 했다.

“3주까지만 기다려줄 수밖에 없어. 그 이상은 안 돼.”

오미선이 말했다.

...

“벌써 2주 지났는데... 남은 일주일 안에 안 오면 정말 제적당하는 거잖아요?”

민지는 초조해하며 실험실을 왔다갔다했다.

서준이 말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젠... 운명에 맡길 수밖에.”

“하지만... 정은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정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선배 집 주소부터 찾아보자.”

“주소를요?”

민지가 놀라며 물었다.

“직접 찾아가려고요?”

“무슨 일인지 확실히 알아야 해. 가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나도 갈래요!”

“여자 둘이 가기엔 위험하니 나도 함께 가요.”

“네가?”

민지는 서준을 훑어보았다.

“너 싸움 잘 해?”

‘얘는 자신이 무슨 조폭인 것처럼 말하네.’

“꼭 싸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57화

    J시의 건조한 기후와 달리, Y시는 전형적인 습한 기후였다.고속열차가 도착할 때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은 일행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을 스치는 찬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추위가 모공마다 스며들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민지는 목도리를 꽉 조이며 어깨를 움츠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치 살찐 메추라기와 같았다. “정은 언니, 빨리 가요. 열차역은 사방으로 뚫려서 너무 추워요.”입으로 말을 할 때마다 하얀 김이 서렸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먼저 역을 나가자.”커다란 역도, 북적이는 인파도 없는 작은 시골역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부유하지 않은 마을답게 한적하기 그지없었다.“방금 알아봤는데, 역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버스는 하루 한 대뿐이래요. 막차는 이미 떠났으니 오늘은 탈 수 없어요.”서준이 냉정하게 분석했다. “오늘 내로 가려면 승합차를 타거나 전세를 내어 차 한 대 빌릴 수밖에 없어요.”“전세차?”정은이 물었다.“호객하는 사설 승용차예요.” 서준이 보충했다.정은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에 버스를 타는 게 낫지 않을까?”민지는 즉시 동의했다. “그래요! 낮에 움직이는 게 안전할 거예요.”서준도 수긍했다.세 사람이 작은 여관에 체크인할 때는 이미 밤 8시, 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민지가 창문을 열자, 몇 안 되는 가게 불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을 뿐이었다.“정은 언니... 너무 조용해서 소름 끼쳐요...”정은은 인스턴트 푸드와 라면을 건넸다. “이것밖에 없어. 참아.”원래는 바비큐를 먹으러 가려 했지만, 가게 주인이 철판 닦던 수건으로 고기를 닦는 걸 보고 세 사람은 식욕이 떨어져 버렸다.민지는 라면 냄새를 맡으며 환호했다. “맛있겠다.”“너답지 않네.” 정은이 웃었다.“왜요?”“입맛이 까다로운 네가 라면을 좋아하다니.”“배고프면 뭐든 맛있죠.” 민지는 후루룩 라면을 들이켰다.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58화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516번 버스에 올라탔다.그런데... 차 안은 어르신들로 가득 찼다. 광주리와 바구니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안에는 갓 딴 채소와 농산물이 가득했다. 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죠?”세 사람은 승차하자마자 중간으로 밀려났다. 발밑에는 광주리들이, 옆에는 앉지 못하고 서 있는 노인들이 바글거렸다. 상대방이 하품만 해도 아침에 뭘 먹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정은 언니, 무서워요...” 민지는 눈물이 맺힌 채 정은을 찾았지만, 이미 뒤로 밀려난 정은 대신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너...”“쮼, 나 무서워...”서준의 마음이 약해졌다. “이...이쪽으로 와.” 그는 옆을 가리키며 자리를 비켰다.민지가 다가오자 서준이 설명했다. “아침에 채소를 팔려고 나가시는 거야.”그리고 그 노인들은 딱 봐도 시골 사람들이었다.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민지를 밀쳤고, 그녀는 앞으로 넘어졌다. 서준은 재빨리 품으로 민지를 안으며 그녀가 의자에 부딪히는 걸 막았다.“괜찮아?” 서준은 긴장해하며 민지를 살폈다.“서준아, 숨... 숨 막혀...”서준이 즉시 창문을 열자, 주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추운데 창문을 왜 열어!”“머리 아프니까 닫아!”“빨리 닫으라고!”서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제 친구가 숨이 막혀서 그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뚱뚱하면 버스 타지 말지 그래!”“우리 노인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민지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서준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몸무게와 상관없이 표 샀으면 버스를 탈 권리가 있어요. 여러분의 광주리들도 자리 많이 차지하시던데, 광주리의 표까지 사신 거예요?”차 안이 조용해졌다. 기사도 거울로 서준을 흘끗 보았다.“요즘 애들 입만 살았네...” 누군가 중얼거렸다.서준은 태연한 표정이었다.민지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숨을 고르더니 감탄했다. “쮼, 너 방금 완전 멋있었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59화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마침내 읍내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모두 방금 악몽 같은 경험을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이제 도착한 거죠?” 민지는 산 음료수를 몇 모금 마신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여긴 읍내야. 선배네 집은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해.”“네? 또 버스를 타야 한다고요?!” 민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민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삼륜차만 있거든.”“뭐??”...10분 후. 민지는 삼륜차의 요동에 수천 번 흔들거리다 모퉁이를 돌 때 또 양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이게 ‘약간' 흔들리는 거라고?”서준은 창백한 얼굴로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내비 보니까 거의 다 왔어. 좀만 더 힘내자!”그도 이 길이 이토록 험난할 줄은 몰랐다. 아스팔트 대신 수리가 되지 않은 흙길이 계속 이어졌다.“너 괜찮아? 안색이...” 민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서준은 손을 저으며 버텼다. “괜, 찮...”“멀미 난 거 아니야?” 정은의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서준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토했다.정은과 민지는 할 말을 잃었다.서준은 다 토한 뒤, 진정하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진짜 괜찮아요!”정은과 민지는 눈빛을 교환했다.‘지금 믿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글쎄요.’민지는 가방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서준에게 건넸다. “시큼한 사탕 하나 먹어. 그럼 속이 괜찮을 거야.”“사양할게.” 서준이 거절하려는 순간, 민지는 억지로 그의 손에 쥐어줬다.“뭐가 그렇게 쑥스러워? 그냥 먹어!”“아니...”“알아, ‘괜찮다'는 말 그만 좀 해.” 서준이 마지못해 받아먹자, 민지는 정은에게 눈짓했다.‘서준이 쟤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정운도 눈짓으로 답했다.‘서준이 너무 놀리지 마.'‘뭐가 어때서요!'옆에 있던 서준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60화

    정은이 대답했다.“저희는 그 아드님을 찾으러 왔어요.”“남진일이?”“네! 그 아이를 아세요?”“아는 건 아니야. 그래도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합격한 아이이고, 심지어 명문대학에 붙었으니 나름 기억하고 있지.”민지가 물었다.“저희는 진일 선배와 같은 과 후배예요. 아저씨, 저희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실 수 있어요?”기사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마침 돌아가는 길이니까 너희들을 남 씨 집 앞에 두면 되지.”“감사합니다!”서준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 집안의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왜 절름발이 남 씨라고 부르시는 거예요?”“절름발이 때문이겠지, 길을 걸을 때 절뚝거리기 때문에 모두가 붙여준 별명이야.”이야기를 나누면서, 세 사람은 진일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만성병이 있어 일년 내내 약을 먹어야 했다.집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진일의 아버지 하나밖에 없었는데, 일찍 공사장에서 부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절고서야 핍박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근년에 과수를 심기 시작하면서 수확이 좋을 때도 있었다.그러나 집에 장기간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가 있는 데다가, 먼 J시에서 공부하면서 일상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들이 있었기에 남 씨는 도무지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세 사람은 다 듣고 침묵했다.그들은 진일이 전에 송지혜에게 속고 착취당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의 가정 조건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짐작했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곧 삼륜차가 멈추었다.“다왔어. 절름발이의 집은 바로 요 앞에 있어. 너희들 스스로 걸어가. 난 문 앞까지 바래다주지 않을게.”“네, 감사합니다.” 정은은 핸드폰으로 돈을 지불했다.눈앞에 낡아빠진 구식 시골집을 보면서 세 사람 모두 마음이 좀 복잡했다.삼륜차는 줄곧 읍내를 지나 도중에 다른 한 마을을 지났다. 멀리 바라보니 전부 몇 층 되는 스스로 지은 주택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61화

    여자아이는 문을 쾅 닫았고, 발소리를 들으니 상황을 살펴보러 달려간 것 같았다.민지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우리를 이렇게 경계하다니.”서준은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금방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집 문어귀에 서서 그들 일행을 살펴보았는데, 세 사람이 남진일의 집을 향해 걸어가자, 사람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심지어 삼삼오오 모여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멀리 떨어져 있던 서준은 비록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에서 뭔가를 알 수 있었다.의심, 의아함으로 가득 찬 따가운 시선...곧 문이 다시 열렸다.이번에 문을 연 사람은 진일이었다.그는 주방에서 동창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정은 그들을 떠올렸다.너무 놀란 진일은 그릇 하나까지 깼다.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은 일행이 서 있었다.“너희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진일의 눈에는 놀라움이 번쩍였지만, 곧 경악해졌고, 또 걱정을 내비쳤다.J시에서 마을까지 오려면 진일은 중간에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서 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정은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내가 대체 뭐라고...’“괜찮아요?” 정은은 위아래로 진일을 훑어보았다.팔다리는 멀쩡했고, 정신도 나름 괜찮아 보였지만...추운 날, 진일은 뜻밖에도 얇은 외투밖에 입지 않았다. 실험을 하고, 기자재를 들고, 키보드를 두드려야 할 손이 빨갛게 얼었다.목은 심지어 목도리조차 두르지 않았다.민지는 눈을 부릅뜨더니 저도 모르게 말했다.“춥지도 않은 거예요?!”진일은 머리를 긁적였다.“습관이 되어서 안 추워.”말을 마치자 진일은 그제야 정은 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진일은 불을 켰다.어쩐지 안이 어두컴컴하나 했더라니, 불을 켜지 않았던 것이다.정은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낡은 기와집, 거실 한 칸, 침실 세 칸, 그리고 뒤뜰이 주방과 연결되어 있었다.위층은 널빤지로 한 층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62화

    언뜻 들으면 기분이 상하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진일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너희들 번호를 기억하지 못해서...”“그럼 재운이는 어떻게 된 거예요? 선배와 마찬가지로 핸드폰이 망가진 거예요?”재운을 언급하자, 진일의 눈빛은 어두워졌다.“재운이는 지금 병원에 있어.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서 전화할 수가 없었어...”“혼수상태요?!” 세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정은이 물었다.“무슨 일 생겼어요?”“말하자면 우리 두 집과 관련이 있는데...”갑자기 기침 소리가 침실에서 들려왔고, 진일은 무언가 생각난 듯 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갔다.걸으면서 고개를 돌려 세 사람에게 말했다.“미안해, 너희들 먼저 앉아 있어. 이현아, 언니 오빠에게 물 좀 따라줘.”이현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더니, 낡은 그릇 세 개를 가져와 보온병으로 뜨거운 물을 따랐다.민지는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이현아! 난 목마르지 않아!”이현은 듣지 않고 세 사람에게 한 그릇씩 물을 따랐다.정은이 말했다.“고마워.”“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우리 오빠 친구들이잖아요.”말하고는 구석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앉으세요, 전 들어가서 살펴볼게요...”말을 마치고 이현은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정은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한약 냄새를 맡았다.솥은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진일은 수건으로 싸서 두 손을 들더니, 뜨거운 약을 세 그릇에 부었다.이것이 바로 진일 어머니가 하루 먹어야 할 양이었다.한꺼번에 달여서 세 끼니로 나눈 다음, 나머지 두 끼는 직접 데워 마시면 된다. 그럼 땔감까지 절약할 수 있었다.이어서 진일은 또 약찌꺼기를 쏟아낸 다음 솥을 깨끗이 씻었다.마지막으로 약 한 그릇을 들고 거실을 지나 그 중 한 침실로 들어갔다.“어머니, 약 다 되었으니 일어나서 마셔요.”“그래.”민지는 일어나서 따라갔지만, 그래도 입구에서 멈추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침대에 한 어르신이 누워 있었다. 몸이 매우 마른 데다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으며, 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63화

    진일 어머니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았지만, 입맛이 없고 물조차 마실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설날 전후에 일이 좀 생겨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진일 집안의 조상은 줄곧 농사를 지었는데, 5년전, 진일의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뜻밖에 부상을 입고 절름발이가 되었기에, 외지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남봉수는 아예 마을에 남아 밭을 심었고 또 뒤의 산을 개간하여 과수를 심었다.처음 몇 년은 아직 초보라서 남봉수는 나무를 너무 많이 심지 못했다.뒤에 점점 경험을 쌓자, 그도 해마다 재배 면적을 넓혔다.재작년에는 더욱 대풍년을 맞이했고, 시세가 좋아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그때 마을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또한 진일네는 평소에 같은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아, 모두들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그러나 뜻밖에도 작년에 날씨가 좋지 않아 수확이 절반으로 줄었을 뿐만 아니라, 과일의 질도 좋지 않았다.계속된 폭우로 많은 과수의 뿌리가 물에 잠겨 전부 썩어서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다.다행히 진일은 지예를 대신해서 논문을 냈기에 송지혜에게서 돈을 받았고, 걱분에 집안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그 후 진일은 몰래 밖의 실험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꽤 많이 모았다. 그는 이 돈을 이자까지 붙여 송지혜에게 돌려주었다.뿐만 아니라 집에 돈을 좀 남겨두면서, 남봉수에게 좀 좋은 과일모종을 사게 했다.그렇게 작년에 심은 앵두나무가 올해 열매를 맺었다.남봉수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앵두 열매는 크고 달았으며, 올해 초 수입국의 앵두 재배원은 대면적의 해충으로 앵두 가격이 보편적으로 올랐다.남봉수는 이 기회를 틈타 외지의 한 딜러와 수매계약을 맺었는데, 상대방은 모든 앵두를 도급맡았을 뿐만 아니라, 내년의 앵두까지 직접 예약했다.남봉수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섣달 그믐날 때, 온 가족은 기쁨에 넘쳐 마침내 살림이 좋아졌다며 미래에 희망을 품었다.그러나 이튿날 바로 사고가 날 줄이야...“오빠! 물 좀 마셔요, 제가 말할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64화

    그러나 꾹 참은 진일 부자는 평화 대신 더욱 심해지는 모욕을 맞이했다.서씨 형제는 분풀이를 위해 한밤중에 진일 집에 몰래 들어가, 우리에 있는 닭을 훔쳤고 문을 지키는 개까지 죽였다.그리고 또 돈으로 사람을 찾아 진일 집 벽에 똥을 뿌렸다.정월 대보름날에는 더욱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거들먹거리며 진일 집에 쳐들어와 그의 부모님을 두들겨 팼다.그래서 진일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음식을 넘기기조차 어려웠고, 도시에 가서 진찰을 받을 수도 없었다.서씨 집안은 또 마을 사람들을 협박하며, 집에 차가 있는 사람들이 전부 진일을 돕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진일의 핸드폰도 실랑이 때문에 고의로 짓밟혀 망가졌다.충돌이 발생한 날, 재운도 진일 집에 있었는데, 밀치락달치락하다가 머리를 다쳐 당시 피를 줄줄 흘렸다.서씨 형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일은 구급차를 부르려다가 서지강에 의해 팔이 꺾여 땅에 엎드린 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결국 재운의 부모님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야 서씨 형제의 용서를 받아 아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었다.그날 저녁, 재운은 마을 병원에 호송되었는데, 의사는 치료할 수 없다며 밤새 시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다.재운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이현이 말했다.“그 사람들은 무덤을 옮기려는 게 아니라, 우리 집 돈을 벌 수 있는 앵두나무가 탐났던 거예요. 그래서 산을 강점하려는 거라고요!”민지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있지? 이, 이거 강도와 다름이 없잖아?”민지는 진일을 바라보았다.“처음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건 그렇다 쳐요, 왜 맞았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재운이는 그렇게 심하게 다쳤잖아요?!”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오빠 경찰에 신고했어요! 경찰도 왔지만 소용없었어요...”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진일은 문을 열자, 입을 떼며 말했다.“아버지.”문이 열리자, 몸을 구부리고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