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혼인 후 처음으로 함께 입궁했다.정식으로 왕께 인사를 올리는 자리였다. 이겸의 회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왕은 벌써 몇 차례나 입궁을 재촉해왔다.
이겸은 몸이 아직 여의치 않다는 핑계로 미뤄왔지만, 더는 미룰 수 없는 자리였다.궁인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스쳤다. 석 달을 죽어가던 왕족과, 그를 골라 낭군으로 삼은 여인. 궁 안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낯선 조합이었다.
서리는 그 시선들을 굳이 피하지 않고 지나쳤다. — 정전 안은 서늘했다.이겸이 먼저 예를 올렸고, 서리가 그 뒤를 따랐다.
"영안공 이겸, 부인 서리. 폐하를 뵙습니다."
왕의 시선이 이겸에게 먼저 머물렀다. 석 달을 누워 있던 사람이 제 발로 서 있었다. 얼굴에 아직 핏기가 덜 돌았으나, 등은 곧았다.
"살아 돌아왔구나."
"염려 끼쳐 송구합니다."
"염려는 짐만 한 것이 아니다."
왕의 시선이 서리에게로 옮겨갔다.
"영안공부인이라."
"예, 폐하."
"곁을 지켰다 들었다."
"의관들이 애썼습니다. 저는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영안공의 몸이 아직 온전치 않을 것이다. 안에서 살피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으로 공식적인 인사는 끝났다.
왕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안공은 잠시 남거라."
서리가 물러날 때, 이겸이 그 등을 잠깐 눈으로 좇았다.
— 전각 밖으로 나오자 볕이 눈을 찔렀다.내관 하나가 다가와 기다릴 자리를 안내하려 했으나, 서리는 사양했다.
"뜰이나 걷겠습니다."
봄빛이 이제 막 완연해지는 계절이었다.
서리는 회랑을 따라 걸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셋째 기둥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회랑이 끊기고, 거기서 돌계단 다섯을 내려가면 후원이었다.
발이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 왕후였던 시절의 서리는 이 후원을 자주 걸었다.왕의 처소와 왕후궁은 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닿는 거리였다. 아침에 문안을 올리고, 저녁에 한 번 더 들러도 무리가 없는 거리.
나중에는 그 가까움이 더 못 견딜 일이 되었다.
그날도 서리는 왕의 처소로 걸어갔다.
전각 앞에서 내관이 먼저 나와 허리를 숙였다.
"전하께서 지금 정무 중이십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서리는 뜰 한쪽에 섰다.
해가 기둥 그림자를 옮기는 동안, 사람이 여럿 그 문을 드나들었다. 승지가 들어갔다 나왔고, 내관이 서찰을 들고 들어갔다. 누군가는 웃으며 나오기도 했다.
서리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 뒤에 내관이 다시 나왔다.
"마마, 전하께서 오늘은 돌아가시라 하셨습니다."
서리가 물었다.
"내가 왔다고 아뢰었느냐."
내관이 잠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 마마."
그것으로 되었다.
몰라서 만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서리는 왕후궁 쪽으로 곧장 가지 않았다.
회랑에서 왼쪽으로 꺾어 계단을 내려갔다. 후원 안쪽이었다.
그 자리에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나무에 가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연못이 앞에 있어 물소리가 났다.
서리는 그 안에 앉았다.
궁녀가 차를 내왔다. 서리는 그것을 앞에 두고 마시지 않았다. 식어서 김이 그친 뒤에도 그대로 두었다.
"마마,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조금만 더 있자."
해가 기울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찾아갔다.
처음에는 기다리게라도 했다. 그다음에는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는 말을 먼저 들었다. 어느 때부터는 서리가 뜰에 들어서는 것을 본 내관이 먼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악담을 들은 적은 없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다툰 적도 없었다.
다툴 일이 생기려면 우선 마주 앉아야 했다.
그런 날들이 쌓여갔다.
왕후였던 시절의 서리는 그렇게 그 정자를 자주 찾았다.
— 그러나 지금, 서리가 모퉁이를 돌아 마주한 자리에는 완성된 정자가 없었다.목재가 쌓여 있었다. 기둥이 넷 서 있었고, 지붕은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 대패질을 하던 목수 둘이 서리를 보고 물러섰다.
'아직 짓는 중이구나.'
서리는 잠깐 걸음을 늦췄다.
거기 앉아서 보낸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 식은 차도, 해가 기울 때까지 앉아 있던 날도 없었다.
기둥 넷뿐인 자리를 보고 있으려니 묘했다.
왕후궁 쪽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여럿이었고, 웃음이 섞여 있었다.
저쪽은 왕후궁 방향이었다.
곧 회랑 저편에서 여인 넷이 걸어 나왔다.
가운데 선 여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백색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 소매 끝에는 이제 막 벙그는 백목련이 곱게 수놓여 있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게 완성된 인상이었다.
지나가던 궁녀가 그 여인을 보고 먼저 허리를 숙였다.
"목 소저,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구나. 네 어미는 좀 나으셨느냐."
"예, 덕분에요."
서로의 걸음이 가까워지자 양쪽 다 자연스럽게 멈췄다.
일행 중 하나가 서리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누구신지요."
가운데 선 여인이 먼저 예를 갖췄다.
"목가 연이라고 합니다."
"서가 리입니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왼쪽의 여인이 작게 소리를 냈다.
"서가 리…… 혹시, 영안공부인 아니십니까."
"어머."
여인들이 서로를 한 번씩 보았다. 이름은 익히 들었으나 얼굴은 처음이라는 반응이었다.
목연도 그제야 서리를 다시 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진작 알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오른쪽의 여인이 급히 예를 갖췄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영안공부인께서는 어찌 혼자 계세요."
"폐하께서 영안공을 잠시 남기셔서요. 기다리는 동안 후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럼 오늘 영안공께서도 함께 입궁하신 건가요."
"예."
여인들 사이에 잠깐 말이 끊겼다.
"많이 나으셨나 봐요."
왼쪽의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저는 아직 자리에 계신 줄만 알았어요. 함께 입궁하셨다기에 놀랐습니다."
"저도 그리 알았는데, 그럼 이제 거동도—"
"어머, 한 분씩 물으셔야지요."
목연이 부채를 살짝 들어 보였다. 웃음기 있는 목소리였고,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는데 말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오늘 처음 입궁하셨는데 영안공 이야기만 여쭤보면, 정작 궁 구경도 못 하시겠어요."
"아, 그렇네요."
"송구합니다."
서리는 그 정리되는 모양을 잠깐 보았다.
"오늘이 처음이세요?"
오른쪽의 여인이 물었다.
"예."
"그럼 저희가 안내해드릴 걸 그랬네요. 다음에 다과 자리가 있으면 그때 꼭 오세요. 달마다 한 번씩 모이거든요."
"그리하겠습니다."
"연택례 때는 정말 모두 놀랐지요."
왼쪽의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날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오른쪽의 여인이 말을 받았다.
"영안공 함자가 불렸을 때, 뒤쪽에서 다들 숨을 삼켰지요. 저도 제 귀를 의심했고요."
"저는 마지막까지 태자저하를 고르실 줄 알았어요."
"저도요. 다들 그리 여겼지요."
서리는 그 말들을 그대로 받았다. 무어라 해명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놀라실 만했겠습니다."
그뿐이었다.
그때, 회랑 저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목연의 눈이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미소는 반 박자 늦게 뒤따라왔다.
이겸이 걸어오고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돌아온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겸의 시선이 그 자리를 훑었다.
그리고 서리에게서 멈췄다.
"영안공."
목연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녕하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목가 아가씨로군요."
이겸이 짧게 답례했다.
"오랜만입니다."
예의를 갖춘 인사였다. 그뿐이었다.
이겸의 시선은 그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서리에게로 옮겨갔다.
"오래 서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뜰을 구경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시지요."
이겸은 목연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남기고는, 서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서리가 그 옆을 따라 걸었다.
나란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걸음이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회랑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여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나는 입을 다문 채, 다른 하나는 슬쩍 목연의 눈치를 살폈다.
"목 소저."
"예."
"저희도 그만 가볼까요."
"그러지요."
목연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표정에는 흠 하나 없었다.
동행한 여인이 무어라 말을 건넸고, 목연은 웃는 낯으로 가볍게 받았다.
늘어진 소매 아래, 부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대나무 살 하나가, 소리 없이 미세하게 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연이 영안궁에 든 것은 해가 제법 높이 오른 뒤였다. 목연이 탄 말이 영안궁 앞뜰에 멎자, 기다리던 하인이 다가와 고삐를 받아 들었다. 목연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한 번 정돈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뒤따라온 시비와 호위들도 차례로 말에서 내렸고, 마당의 시비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손님을 맞았다. 서리는 마루 앞에서 목연을 맞이했다. 예를 갖추는 데 부족한 데가 없었으나, 반가움을 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지나온 회랑에도, 이쪽을 향해 자리를 비켜서는 시비들의 몸짓에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어서, 목연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 궁의 살림이 이미 서리의 손에 익어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내주셔서, 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고 안으로 들었다. — 다과상 위로 김이 옅게 올랐다. "보내주신 향은 잘 받았습니다." 서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것을 받고 서찰만 돌려보내기가 마음에 걸려, 이리 청했습니다." "영안공께서 큰 병을 이겨내셨으니, 그 정도야 마땅한 일이지요." 목연은 찻잔을 들며 옅게 웃었다. "다만 침향은 두는 자리를 조금 가립니다. 볕이 드는 데 오래 두면 향이 얕아지니,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향합째로 옷장 안쪽에 넣어두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리하겠습니다." "요즘은 향낭에 넣어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 아예 조각을 잘게 내어 쓰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기가 아까워서 통으로 두는 편입니다만." "향낭도 그만큼 작아지겠군요." "예. 옷에 걸었을 때 처지지 않을 만한 것을 찾지요. 수가 아무리 고와도 무거우면 손이 잘 가지 않으니까요." 목연은 다과 하나를 집어 작은 접시에 옮겼다. "작은 것을 찾는 건 거울도 비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 이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앞에 엎드린 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친척 되는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물었으나, 그 뒤로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합니다. 연고가 있다는 고을 두 곳도 사람을 보내 살폈습니다만—" "없더냐." "예." 이헌은 서안 위에 놓인 종이를 손끝으로 밀었다. 몇 달째 같은 자리에 같은 내용이 적혀 오는 종이였다. "관청 기록은." "이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신고도, 호적을 옮긴 흔적도 없습니다." "집은." "그대로 비어 있습니다. 다만—" 사내가 잠시 말을 골랐다. "이웃들 말이, 어느 날 보니 사람이 없더랍니다. 짐을 싣는 것도, 나가는 것도 본 사람이 없다고요." 이헌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온 집안이 나가는데, 아무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저희도 그것이 이상하여 몇 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답만 돌아옵니다." 사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 집에 셈이 남아 있던 상인이 둘 있었는데, 받으러 갔더니 이미 비어 있었다 합니다. 빚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했다기엔, 집이 너무 깨끗했다더군요." "깨끗했다." "예. 쓰던 세간까지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다고요." 이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었다는 소문도, 도망쳤다는 소문도 없었다. 몰락했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면 도성 안에 반드시 말이 돌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돌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웃던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흩어졌다. "내가 태자다." 이헌이 말했다. "태자의 사람들이 반년을 뒤졌는데, 집 한 채가 통째로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가라." 이헌이 종이를 밀어냈다.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리는 비단과 천 조각을 나란히 놓고 이겸을 기다렸다.이겸은 들어서자마자 그 앞에 앉았다. 등불을 끌어당겨 각도를 바꿔가며 두 실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비단의 수실을 쓸어보고, 다시 조각 쪽으로 옮겨갔다."닮았군요.""같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서리가 말했다. "조각 쪽은 흙을 오래 먹어서, 빛깔이 죽었습니다. 물들인 결도 어긋났고요.""그렇다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고.""예."이겸이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렸다."이런 실을 쓰는 곳이 왕후전뿐일 리는 없겠지요.""그렇습니다." 서리가 답했다. "귀한 물건일수록, 오히려 쓰는 집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상단이 들여와서 어디로 가는지가요.""그 길은 부인이 더 빨리 찾겠군요.""바느질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늘 오갑니다."이겸은 잠시 조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나는 그날의 명부를 다시 보겠습니다. 이 조각과는 별개로, 아직 짚지 못한 것이 있으니." — 바느질방 주인은 도성 안쪽에서 귀족가의 자수품을 오래 다뤄온 여인이었다.서리가 영안궁에서 왔다는 말에 여인의 낯빛이 먼저 굳었다. 그러고는 서리가 내민 조각을 흘긋 보더니, 아예 두 손을 내저었다."저희는 궁에서 나온 물건은 손대지 않습니다. 그런 건 만져본 적도 없고요.""궁의 물건이 아닙니다." 서리가 담담히 답했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몰라 여쭈러 온 것입니다."여인은 그 말에도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다만 조각을 받아 들고는 눈빛이 달라졌다.여인은 조각을 손바닥에 펼쳐놓고 한참을 만졌다. 엄지로 바탕천을 문질러보고, 뒤집어 안쪽 결도 살폈다. 그러고는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췄다."이상하네요.""무엇이 말입니까.""이 실이야 제가 봐도 귀한 겁니다. 이런 건 아무나 못 써요." 여인이 실 한 오라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궁의 후원에 꽃이 한창이었다.왕후가 마련한 꽃놀이 자리였다. 물가를 따라 자리가 깔렸고, 늘어진 가지 아래로 잔이 오갔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꽃잎이 상 위로 떨어졌다.서리와 이겸이 함께 들어섰을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차례 그쪽으로 쏠렸다.죽어가던 왕족과, 그를 고른 여인. 그 둘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이 자리의 대부분은 처음 보았다.중심 자리에는 왕과 왕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아래쪽에 이헌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목연이 동행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영안공." 왕이 먼저 반가운 낯으로 손짓했다. "얼굴이 많이 폈구나.""염려해주신 덕입니다." 이겸이 예를 갖췄다.이헌의 시선이 잠시 그쪽에 머물다가, 뒤늦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영안공부인." 왕후가 서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혼례 후 줄곧 병상 곁을 지켰다 들었습니다.""제가 한 일은 많지 않습니다.""겸양이 지나치군요." 왕후가 옅게 웃었다. "저리 회복하신 것이 어디 저절로 된 일이겠습니까. 영안궁의 안살림도 잘 잡혔다 들었고요.""과분한 말씀입니다."왕후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상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이왕 이리 잘 풀린 김에, 영안궁에 또 다른 경사가 들리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알아듣고 웃음을 지었다.서리의 손이 잔 위에서 아주 잠깐 멎었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답이 반 박자 늦어졌다. — 전생에 왕태자비였던 시절에도, 봄 꽃놀이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그때 서리는 이헌의 곁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상은 나란히 놓였고, 궁인이 술을 따르면 이헌은 서리의 잔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들었다.그 아래 자리에서 한 부인이 웃었다."두 분이 나란히 계신 걸 뵈니 참 보기 좋습니다."서리는 잔을 내려놓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문 밖 옛 가마터는, 듣던 것보다 더 오래 버려진 자리였다.무너진 가마 아궁이 위로 마른 덩굴이 뒤엉켰고, 깨진 기왓장이 잡초 사이에 반쯤 묻혀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잔 기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오간 자국을 찾기에는, 비도 바람도 너무 여러 번 지나간 뒤였다.서리는 포로가 그린 약도를 펼쳤다. 남문에서 갈라진 길을 되짚고, 종이를 돌려 가마터가 있는 쪽과 맞추었다."갈림길은 맞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왔다면 가마 앞을 지나게 되고요."이겸은 그들이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에서는 가마의 윗부분만 보였다.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자 무너진 담장 너머로 다른 비탈이 드러났다."뒤쪽도 살펴라.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백우가 데려온 자들을 나누어 보냈다. 둘은 담장을 따라 돌고, 나머지는 가마 안쪽과 터 가장자리를 훑었다.포로가 가마터를 알려주며 함께 짚어준 표식 자리는 길목에 있었다. 담장 끝에 박힌 쇠고리는 비어 있었다. 백우가 고리 아래에 엉킨 마른 풀을 걷어냈다."이 자리입니다."고리 아래 벽면에 얕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리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무언가 매달려 벽에 닿았던 듯했으나, 남은 끈이나 조각은 없었다."걸려 있던 것은 없군요.""주변에도 떨어진 것은 없습니다."이겸은 고리를 살피고 손을 거두었다."언제 거둔 것인지는 모르겠군."서리는 약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가 종이를 접었다. 길과 표식을 보았다는 자리는 포로의 말과 맞았다.가마 앞은 기왓조각이 촘촘히 박힌 단단한 땅이었다. 백우가 몸을 낮추고 움푹 팬 곳을 살폈다. 그 안에도 잘게 부서진 기와와 흙이 가득 차 있었다."발뒤꿈치 자국 같기는 합니다만, 가장자리가 다 무너졌습니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서리는 가마 곁의 평평한 돌을 살폈다. 잠시 앉아 기다리기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씨는 빗을 들기 전에 서리의 무릎 위에 놓인 문서부터 보았다."그것은 내려놓으세요.""읽고 있지 않아.""제가 들어올 때까지는 읽고 계셨지요."서리가 문서를 접었다. 감씨는 그것을 받아 거울 옆에 놓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등 뒤로 모았다.빗이 머리 끝에서 잠깐 걸렸다. 감씨가 손가락으로 엉킨 곳을 풀었다."어젯밤에는 언제 누우셨어요.""그리 늦지 않았어.""궁에 다녀오셨으면 좀 쉬셔야지요. 옷만 갈아입고 곧장 문서를 찾으셨다면서요.""기다리던 것이 와 있어서.""그 기다리던 것들 때문에 저녁상도 두 번이나 데워 올렸습니다."서리는 거울 속 감씨를 보았다."먹기는 했다.""얼마나 드셨는지도 물어보았어요."빗질이 다시 이어졌다. 서리가 옆에 놓인 문서로 손을 뻗자 감씨는 팔꿈치로 가볍게 막았다."머리 다 빗을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계세요."서리는 손을 무릎 위로 돌려놓았다."아침은 다 먹을게.""그 말씀은 기억하겠습니다."감씨는 빗에 걸린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목덜미부터 천천히 빗어 내렸다."한집에 계셔도 두 분 다 각자 일만 붙들고 계시니, 누가 누구더러 쉬라고 하겠어요. 영안공께서는 탕약이라도 드시지요. 이러다 마님께서 먼저 앓아누우시겠습니다.""걱정도 많네.""앓기 전에 하는 말씀입니다."서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감씨가 머리를 한데 모으는 동안 거울 옆의 문서 모서리만 손끝으로 눌렀다.감씨가 빗질을 마저 하며 낮게 말을 얹었다."영안공께서 기력을 많이 되찾으셨다 들었어요. 그러면 마님께서도 이제 슬슬, 앞날을 생각하셔야—""그래서 박가 객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냐."서리가 담담히 받았다."가문의 앞날이라면, 이미 생각하고 있어."감씨의 손이 잠시 멈췄다."……제가 말씀드린 앞날은, 그 앞날이 아닙니다.""그럼 무슨 앞날이란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