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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 04.

Author: ALL장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03:06:29

04.

늑대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섞인 회색 머리카락이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깊고 차분한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해솔의 얼굴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남자는 푸른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한복을 걸치고 있었으며, 짐승일 때의 신령한 아우라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였다. 짐승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의 존재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해솔은 입을 멍하게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장황한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남자가 조용히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해솔의 목덜미 가까이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으악, 뭐, 뭐 하시는…!”

당황한 해솔이 흠칫하며 몸을 물리려 했지만, 남자의 묵직한 시선에 사로잡혀 팔다리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해솔의 살냄새와 숨결을 차분히 살피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나직하고 깊은 웃음을 흘렸다.

“민식이네 둘째 아이구나. 하지만… 네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묘하구나.”

남자의 혼잣말에 해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신령한 존재는 단번에 해솔이 이 몸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너는 이곳의 아이가 아니로구나.”

순간, 캄캄하던 해솔의 머릿속에 희미한 희망의 줄기가 번개처럼 꽂혔다. 해솔은 절박한 마음에 물러서던 발걸음을 돌려 덥석 다가서며 외쳤다.

“맞아요! 저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혹시… 제가 살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아시나요?”

산신은 해솔의 절박한 부르짖음을 가만히 듣더니, 차분하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곤 해솔의 영혼까지 파헤치려는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나는 이곳에 다다르는 법도 다른 세계로 발을 딛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궤도를 벗어나 이곳에 깃든 너의 영혼 역시 이미 정해진 섭리였을 터. 정해진 운명은 곧 하늘의 뜻이다.”

해솔은 그 무심한 대답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아니요! 제가 여기 올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제가 살던 곳과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요. 여기는… 여기는 그냥 소설 속 세상이란 말이에요!”

해솔의 떨리는 목소리가 서늘한 산속에 흩어졌다. 이곳이 단순한 과거도 평행세계도 아닌 자신이 읽던 텍스트 속이라는 확신이 울컥 터져 나왔다. 남자의 단정한 표정이 미묘하게 일렁였지만, 기대만큼 큰 놀람의 기색은 없었다.

“소설 속 세상이라…?”

산신이 낮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네! 여긴 제가 읽던 글 속에 나오는 세상이라고요!”

현실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법한 고백들이 이 남자의 묵직한 존재감 앞에서는 마치 제방이 터지듯 저절로 흘러나왔다. 남자는 잠시 숲의 정적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글 속이라… 천기누설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너는 그 천기누설의 기록을 읽었던 것이고?”

산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덤덤했으나, 그 안에 담긴 까마득한 무게감이 해솔의 머릿속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천기누설이요? 예언서 같은 게 아니라고요! 나 혼자 본 게 아니라, 몇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읽은 글이란 말이에요!”

해솔이 억울함과 당혹감이 섞인 얼굴로 외치자, 산신은 짙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글쎄다. 아무리 수많은 자가 그 글을 읽었다 한들, 그것이 천기(天機)인 줄 깨닫지 못한 채 넘어갔다면 결국 진실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셈이지.”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에는 해솔이 무언가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있었다. 해솔은 혼란스러움과 아득함에 연신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렇지만… 저도 그냥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었을 뿐이라고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천기누설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 기록에 가깝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과거도 아니잖아요…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 세계인데…!”

그러나 산신의 대답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가득했다.

“내가 이 산에 깃들어 살아온 세월이 전혀 짧지 않다. 이곳은 태초부터 언제나 모든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엄연한 세상이었다. 네가 훗날의 기록을 글의 형태로 미리 접했다면, 거기에는 필시 너만의 특별한 이유가 얽혀있을 터.”

해솔은 그의 당당한 눈빛 앞에서 당황과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읽던 그 웹소설의 무대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면, 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혹시 말로만 듣던 이 세계 차원 이동 같은 건가? 해솔은 산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고요한 호수처럼 평온했고 깊은 황금빛 눈동자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의 궤적을 품고 있었다. 산신은 해솔의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해졌다는 것을 알아챈 듯,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네게 특별한 징조나 일은 없었느냐?”

“특별한 일이요…? 아… 여기 오기 바로 전날 밤에 소설이랑 관련된 꿈을 꾸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좋아하는 연예인 꿈을 꾼 것처럼 그냥 흔하고 평범한 꿈이었는데요.”

“그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이 나느냐?”

“그냥… 소설 속 등장인물이 나온 것 같은 느낌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어요.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당장 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해솔의 말투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대화는 계속 제자리를 돌며 겉돌기만 했고 산신의 오묘한 대답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괜한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물론 이 세계 사람들에게 산신이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신성하고 존엄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인 해솔의 눈에는 그저 얼굴 잘생기고 아우라 엄청난 캐릭터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산신이란 자는 겉모습과 달리 지나치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오며, 어딘가 친근하고 쓸데없이 살가운 태도로 대화를 끌어가고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묵직하고 신비로운 첫인상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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