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05.
산신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해솔의 부루퉁한 표정을 읽었는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체구는 자그마한 놈이 성질은 또 제법 대단하구나. 네가 이 거대한 섭리를 깨고 이곳에 떨어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을 터. 언젠가는 그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
“저, 그렇게 작은 키 아니거든요! 그리고 언젠가 이유를 알게 된다니요, 그게 대체 언제인데요! 언제까지 이 낯선 시대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집에 돌아가고 싶단 말이에요… 흑…”
항변하던 해솔의 목소리가 점차 얇게 떨리더니, 끝내 서러운 억울함으로 일렁였다. 산신은 해솔의 눈물에 순간 멈칫하며, 다부지던 태도를 거두고 짐짓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런… 아이야, 울지 마라. 내 네게 핀잔을 주려 한 것이 아니다.”
“아이 아니라고요! 내가 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가 몇인데요!”
하지만 남자의 다정한 위로 한마디가 둑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물꼬가 되어버렸다. 해솔은 눌러 참았던 만감과 서러움을 마침내 왈칵 터뜨리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캑캑거리며 훌쩍이던 소리가 점차 서글프게 목이 멘 곡소리로 변해갔고 해솔은 두 손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꽉 가린 채 멈추지 않는 눈물을 쏟아냈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해솔을 마주한 산신은 순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난감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그는 커다란 손을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의 부드러운 손짓에 맞추어 산바람이 싱그럽게 스쳐 지나가더니, 흙길 위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거짓말처럼 붕 떠올랐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잎사귀들은 해솔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며 마치 봄날의 꽃잎처럼 유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예쁜 꽃을 꺾어 주고 싶었으나, 살아 숨 쉬는 생명을 함부로 해할 수는 없으니, 이것으로 대신 마음을 받아주려무나. 홀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인데, 내가 눈치 없이 말실수한 모양이구나.”
산신의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감싸자, 해솔은 코를 훌쩍이며 가늘게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꽃이라니요… 제가 여자아이도 아닌데요, 뭐. 훌쩍… 그래도 위로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마음이 너무 조급하고 예민해져 있었나 봐요. 낯선 시대에 떨어져서 솔직히 되게 무섭고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제 상황을 말할 수 있어서 좋네요. 그런데 산신님… 나이가, 아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뜬금없이 들어온 질문에 산신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기웃하며 대답을 건넸다.
“내 나이? 글쎄다. 강산이 열 번도 더 넘게 바뀌는 것을 보았으니… 허나 그것은 갑자기 왜 묻는 것이냐?”
“외모랑 말투가 너무 안 어울려서요. 얼굴은 청년이면서 말투는 완전 할아버지 같잖아요. 좀 어색하지 않나요? 차라리 수염 덥수룩한 할아버지 모습으로 변신해서 말씀하시면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요.”
해솔의 솔직한 발언이 떨어지자, 그간 신령하고 인자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산신의 표정이 순식간에 와르르 일그러졌다.
“할아버지라니! 감히 누구더러 할아버지라는 게냐! 이래 봬도 나는 이 인근 산신들 사이에서는 제법 젊고 어린 편에 속하거늘!”
품격 있게 허허 웃던 산신이 아이처럼 불끈 화를 내자, 해솔은 뜻밖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산이 열 번 바뀌었으면 백번 양보해도 할아버지가 맞죠! 2024년엔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진지하고 올드하게 말씀 안 하신다고요.”
산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해솔을 유심히 쏘아보더니, 이내 재미있는 단어를 발견했다는 듯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2024년…? 그래, 미래는 어떠하냐? 다들 배곯지 않고 살기 편해졌느냐? 자, 이리 와서 앉아 내게 이야기 좀 해 다오.”
산신이 가볍게 손짓하자, 근처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돌덩이 두 개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마치 고급스러운 의자처럼 형태를 잡았다. 산신은 한쪽 돌의자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으며, 옆자리를 다정하게 툭툭 두드렸다.
“여기 앉거라. 네가 살다 온 그 먼 미래의 풍경이 몹시도 궁금하구나.”
해솔은 신선이 갑자기 호기심 가득한 동네 형처럼 구는 상황이 어이없고 웃기면서도, 묘하게 낯설지 않은 온기를 느꼈다. 그는 코를 훌쩍이면서 어깨를 으쓱하곤 산신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산신님 정도면 미래 같은 건 이미 다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이 산과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소박한 대리인에 불과한걸. 이름 그대로 산 하나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영물일 뿐이지. 이렇게 오랜 세월 덕을 쌓다 보면 언젠가 하늘로 올라갈 자격을 얻는 거란다. 그래, 미래에서도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산신들을 많이 아껴주고 정성껏 모셔주느냐?”
산신의 뜻밖의 물음에 해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거짓으로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반짝이는 황금빛 시선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만약 제가 살던 곳이 정말 이곳의 미래라면, 죄송하지만… 아니요. 옛날 옛적 과거에는 산신이 계셨을지 몰라도, 현대에는 아무도 믿지 않아요. 산신이나 도깨비, 요물 같은 건 그저 옛날이야기나 매체 속 가상 존재일 뿐이거든요.”
해솔의 덤덤한 이야기에 산신의 황금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일렁이더니,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렇구나… 세월이 흐르며 우리들의 존재감도 자연스레 잊혀가는 모양이로구나. 그래, 그것 말고 또 지금과 무엇이 그리 달라졌느냐?”
“일단 입는 옷도 전부 달라졌고, 먹는 음식 종류도 훨씬 다양해졌어요. 그렇지만… 자연이 많이 파괴되어서 공기는 나빠졌죠. 대신 멀리 떨어진 사람과 얼굴을 보며 바로 연락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겼어요. 사람들은 걸어 다니기보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다녀서 길거리가 좀 시끄럽고 복잡하긴 해요.”
산신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해솔의 말을 아득하게 읊조리듯 반추했다.
“그야말로 신세계로구나… 그래,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야, 우리 같은 옛 존재들이 잊히는 것이 무슨 대수겠느냐.”
산신은 짐짓 담담하고 소탈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지만, 씁쓸함이 감도는 얼굴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 아련한 그늘을 바라보며 해솔은 왜 현대 세상에서 그 신령한 존재들을 볼 수 없었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것 같았다.
자연의 숨결을 사랑하는 그들이 매일 파괴되고 빌딩 숲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07.2층 방문 넘어 들려오는 찬솔의 목소리에 해솔은 책을 덮고 1층 거실로 내려갔다. 탁자 위에는 마을 과수원에서 막 따온 듯한 신선한 과일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 시대의 강원도에서는 망고나 파인애플 같은 남국 과일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지만, 대신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제철 사과만큼은 매일 질리도록 맛볼 수 있었다.게다가 집안이 대대로 고위 군인 집안인 덕분에, 종종 남쪽 지방이나 멀리서 재배된 희귀한 과일들까지 상자째 배달되어 오곤 했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대접받는 일상을 누리며, 해솔은 문득 씁쓸하면서도 솔직한 생각에 잠겼다.‘소설 속이든 현실이든, 역시 금수저로 태어나는 게 제일이네.’간혹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조그마한 손으로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하는 어린아이들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런 참담한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해솔은 자신이 누리는 이 안락함이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지 절실히 깨달았다.하지만 그 편안함의 그늘에서도 불쑥불쑥 피어오르는 불안감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가문의 그늘에 여유롭게 지낸다 해도,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독립하거나 가정을 꾸릴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특히나 이 서슬 퍼런 1950년대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모질고 고단한 삶일지, 해솔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숨겨진 이유 중 하나였다.“해솔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아… 아무것도 아니에요.”생각에 잠겨 있던 해솔은 찬솔의 다정한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며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찬솔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내일 우리 바닷가에 갈까?”“바닷가?”해솔은 약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족여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해솔에게는 점차 아득하고 낯선 개념이 되어가고 있었다.어릴 적에는 부모님 손을 잡고 이곳저곳 다녔지만, 찬솔이 머리가 자란 이후부터는 가목 여행에
06.이후로도 두 사람은 미래의 풍경과 소소한 일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중에 어디선가 나타난 작고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가 해솔의 어깨를 재빠르게 타고 올라가더니 자연스럽게 산신의 어깨 위로 톡 옮겨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고요한 산속의 적막을 깨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랑이님, 랑이님!”“으악! 모, 뭐야, 다람쥐가 말해?!”깜짝 놀란 해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랑이님, 큰일 났어요!”산신은 제 어깨 위에서 삐약거리듯 쫑알대는 다람쥐의 진지한 보고를 차분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솔은 입을 떡 벌린 채 그 기이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놀라지 말거라. 이 녀석은 저 아래쪽 작은 동산을 수호하는 다람쥐란다. 아무래도 내 손길이 필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랑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해솔은 이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내렸다. 비록 산신과의 만남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져 짓눌려 있던 마음이 묘하게 보듬어지던 시간이었다. 이 위안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끝난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저… 혹시, 나중에 여기에 다시 오면 산신님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해솔의 망설이는 물음에 랑은 그윽한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고말고. 나는 언제나 이 산자락에 깃들어 있단다. 네 이름이 해솔이지? 내 이름은 ‘랑’이다. 산에 올라 부르면, 언제든 너를 맞이하러 오마. 오늘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해솔아.”“네…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다람쥐님도 만나서 반가웠고요.”산신 랑이 다시금 나직하고 신령스러운 어조로 인사를 건네자, 해솔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도 배시시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솔은 랑에게 다정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그의 어깨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다람쥐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그러자 다람쥐는 제 폭신한 꼬리를 꼭 붙잡은 채,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해솔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앙증맞고
05.산신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해솔의 부루퉁한 표정을 읽었는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나직하게 웃었다.“체구는 자그마한 놈이 성질은 또 제법 대단하구나. 네가 이 거대한 섭리를 깨고 이곳에 떨어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을 터. 언젠가는 그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저, 그렇게 작은 키 아니거든요! 그리고 언젠가 이유를 알게 된다니요, 그게 대체 언제인데요! 언제까지 이 낯선 시대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집에 돌아가고 싶단 말이에요… 흑…”항변하던 해솔의 목소리가 점차 얇게 떨리더니, 끝내 서러운 억울함으로 일렁였다. 산신은 해솔의 눈물에 순간 멈칫하며, 다부지던 태도를 거두고 짐짓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이런… 아이야, 울지 마라. 내 네게 핀잔을 주려 한 것이 아니다.”“아이 아니라고요! 내가 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가 몇인데요!”하지만 남자의 다정한 위로 한마디가 둑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물꼬가 되어버렸다. 해솔은 눌러 참았던 만감과 서러움을 마침내 왈칵 터뜨리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캑캑거리며 훌쩍이던 소리가 점차 서글프게 목이 멘 곡소리로 변해갔고 해솔은 두 손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꽉 가린 채 멈추지 않는 눈물을 쏟아냈다.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해솔을 마주한 산신은 순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난감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그는 커다란 손을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그의 부드러운 손짓에 맞추어 산바람이 싱그럽게 스쳐 지나가더니, 흙길 위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거짓말처럼 붕 떠올랐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잎사귀들은 해솔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며 마치 봄날의 꽃잎처럼 유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뭐… 뭐 하시는 거예요?”“예쁜 꽃을 꺾어 주고 싶었으나, 살아 숨 쉬는 생명을 함부로 해할 수는 없으니, 이것으로 대신 마음을 받아주려무나. 홀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인데, 내가 눈치 없이 말실수한 모양이구나.”산신의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04.늑대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섞인 회색 머리카락이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깊고 차분한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해솔의 얼굴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남자는 푸른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한복을 걸치고 있었으며, 짐승일 때의 신령한 아우라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였다. 짐승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의 존재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해솔은 입을 멍하게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장황한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남자가 조용히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해솔의 목덜미 가까이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으악, 뭐, 뭐 하시는…!”당황한 해솔이 흠칫하며 몸을 물리려 했지만, 남자의 묵직한 시선에 사로잡혀 팔다리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해솔의 살냄새와 숨결을 차분히 살피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나직하고 깊은 웃음을 흘렸다.“민식이네 둘째 아이구나. 하지만… 네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묘하구나.”남자의 혼잣말에 해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신령한 존재는 단번에 해솔이 이 몸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너는 이곳의 아이가 아니로구나.”순간, 캄캄하던 해솔의 머릿속에 희미한 희망의 줄기가 번개처럼 꽂혔다. 해솔은 절박한 마음에 물러서던 발걸음을 돌려 덥석 다가서며 외쳤다.“맞아요! 저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혹시… 제가 살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아시나요?”산신은 해솔의 절박한 부르짖음을 가만히 듣더니, 차분하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곤 해솔의 영혼까지 파헤치려는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나는 이곳에 다다르는 법도 다른 세계로 발을 딛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궤도를 벗어나 이곳에 깃든 너의 영혼 역시 이미 정해진 섭리였을 터. 정해진 운명은 곧 하늘의 뜻이다.”해솔은 그 무심한 대답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03.시간이 흐르며 해솔은 이곳의 일상에 조금씩 번져갔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이모님들과 나란히 앉아 소소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가족들과 온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삶에 어느새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이 깊어질수록,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의구심도 함께 커져만 갔다.해솔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자신이 밤을 새우며 읽었던 그 웹소설과 지독하게 닮았다는 사실이었다.식솔들이 덤덤하게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산신’과 ‘요물’이라는 단어들, 그리고 1950년대라는 배경까지. 모든 정황이 소설 속 묘사와 소름 돋도록 일치했다.그저 찰나의 환상이나 우연이라 치부하며 부정하려 애썼지만, 은은한 붉은빛이 맴도는 회색 털과 자신을 꿰뚫어 볼 듯 날카롭게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던 그 거대하고 신령한 늑대의 존재는 해솔의 의심을 온전한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이곳의 생활에 겉으로는 익숙해졌다 한들, 마음 깊은 곳의 불안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해솔은 불쑥불쑥 차오르는 현실의 문물들과 진짜 가족,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에 흉통을 앓았다.이 거대하고 낯선 세계에 오롯이 혼자 남겨졌다는 고립감이 숨을 턱 턱 막히게 할 때면, 그는 그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묵묵히 산으로 향하곤 했다.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늘한 산바람이 뺨을 스치는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해솔은 비로소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굴레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상쾌한 솔향과 기분 좋은 흙냄새, 귓가를 간지럽히는 벌레 소리는 지친 그를 다정하게 보듬어 주는 듯했다. 오직 이 깊은 산속에서만 허락되는 작은 평온이었다. 하지만 그 안식조차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진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해솔의 입술 사이로 서글픈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두고 온 현실의 잔상이 눈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나누던 의미 없는 농담들, 식탁 위에
02.“형…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야…?”“누구라니, 이분은 우리 집 주치의 선생님이시고 저쪽 분들은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들이잖아. 해솔아, 왜 그래? 설마 아무것도 기억 안 나?”“주치의…? 우리 집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해솔은 형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주치의라니, 자신 같은 평범한 집안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단어였다. 아니, 그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 자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형… 지금 몇 년도야?”“갑자기 연도는 왜… 1952년이잖아.”그 순간, 심장이 밑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 1952년. 머릿속이 하얘졌다. 청바지와 셔츠를 입고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가던 자신의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형과 아버지의 이목구비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말도 안 돼…’해솔은 심호흡하며 침착하려 애썼다.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널찍하고 고풍스러웠지만, 현대의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묵직한 목제 가구들과 벽에 걸린 예스러운 서화들까지, 모든 것이 아득한 옛 시절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해솔아, 정말 괜찮은 거냐?”“어… 아무래도 머리를 부딪친 거 같아요. 형이랑 아버지 얼굴은 알겠는데… 나머지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요.”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태를 파악할 수 없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해솔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숨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괜히 딴소리했다가는 기억상실이 아니라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충격 때문에 일시적인 단기 기억상실이 온 듯합니다. 내일 병원에 오셔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어지럽지 않다면 식사는 해도 될 것 같네.”“아, 괜찮아요. 속이 별로 안 좋아요.”주치의의 말에 해솔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신이었다.“그럼, 오늘은 아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