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채이]
펜션 현관 불빛 아래서 언니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한 번 시작하자 멈추지 않았다. 둑이 터지면 원래 그렇다.
"그날 아침 열 시. 화장 끝나고 나 혼자 대기실에 있었어. 회색 양복이 노크했어. 강 전무님 비서라고. 봉투를 줬어. 안에 제주행 비행기표. 오후 세 시 사십 분. 그리고 전하래. 지금 아니면 평생 못 간다고. 결혼하면 그 사람은 영영 못 본다고."
"그 사람이 진우 씨를 알았어?"
"다. 언제 만났는지, 어디서. 나도 몰랐던 것까지."
언니가 작업복 재킷을 여몄다.
"무서웠어. 근데 솔직히 고마웠어. 누가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아서. 열두 시 십 분에 비상계단 문 열어 둘 테니까 트렁크는 미리 계단에 갖다 놓으래. 그다음은 신경 쓰지 말래. 식장은 알아서 될 거라고."
"알아서."
알아서 된 게 아니었다. 내가 뛰었다. 원장님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예약 일곱 건이 날아갔다. 그 사람은 식장이 무너지길 바랐다. 신랑 혼자 서 있는 사진을 원했다.
"문자는 남아 있어요?"
그가 처음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지우라고 했어요. 번호도. 비행기표는 공항에서 버렸고. 미안해요. 증거가 제 말밖에 없어요."
"사과는 제가 해야 합니다. 형이 한 일이니까."
언니가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봤다. 세 번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안 본 얼굴을.
"부사장님. 채이, 잘 부탁해요. 얘 괜찮은 척 진짜 잘해요. 어릴 때부터."
"압니다."
너무 빨리 대답해서 언니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못 들은 척 문틀만 봤다. 펜션 문틀은 흰색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가 세 군데. 다 셌다.
[재헌]
방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소파에 앉지 않았다. 창가에 섰다. 단추를 돌리지 않았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괜찮아요?"
"화가 납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거짓말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 약속이 이럴 때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형이 날 싫어하는 건 압니다. 대표 자리도 원하고. 그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당신 홀을. 원장님을.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돌아섰다.
"내일 서울 가자마자 형 사무실로 가고 싶습니다."
"가서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가지 마요."
그녀가 침대 끝에 앉았다.
"증거가 없잖아요. 언니 말 하나. 그거 들고 가면 전무님은 웃을 거예요. 그리고 언니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거고요. 도망간 신부가 무슨 말을 못 하겠냐고."
"……"
"식장에서 사고 나면요, 제일 먼저 하는 게 소리 지르는 거 아니에요. 뭐가 남아 있는지 보는 거예요. CCTV, 무전 기록, 누가 어디 있었는지. 그다음에 움직여요."
"예식장 규칙입니까."
"오 년 동안 써먹은 규칙이요."
그녀를 봤다.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
그녀가 그제야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내 소매가 움직이는 걸로 그녀가 숨을 쉰다. 이상한 연결이다. 끊고 싶지 않은 연결이다.
"알겠습니다. 뭐가 남아 있는지부터."
그날 밤 다리는 새벽까지 소파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한 번 깼을 때 발에 담요가 덮여 있었다. 내가 덮은 게 아니었다.
[채이]
금요일 저녁 비행기. 창가. 해 지는 바다가 날개 아래로 멀어졌다.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그쪽이 저 부를 때 하채이 씨, 하는 거 너무 웃기다고. 은행 번호표 부르는 것 같대요."
그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쪽도 날 강재헌 씨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요. 우리 둘 다 은행이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 한 번, 나 한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단추.
기내 방송. 곧 착륙. 방송이 끝나자 낮은 목소리.
"……채이 씨."
창에 이마를 댄 채 굳었다. 기다렸다. 아무 말도 안 이어졌다. 부른 게 전부였다. 호명. 식장에서 사회자가 신랑 신부 이름을 부르는 걸 호명이라고 한다. 이름이 불리면 걸어 나가야 한다.
천천히 돌아봤다. 그는 앞좌석 등받이만 보고 있었다. 귀 끝이 빨갰다.
"……재헌 씨."
대답 대신 그가 안전벨트를 한 번 당겨 조였다. 이미 조여 있었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았다. 쿵. 그 진동이 어디서 난 건지 잠깐 헷갈렸다.
그 주말 그는 내 이름을 자주 불렀다.
토요일 아침 현관에서. "채이 씨, 우산." 비 예보 없는 날이었다.
토요일 밤 봄빛 쓰레기통 옆에서. "채이 씨, 여기." 나는 이미 그를 보고 걸어가던 중이었다.
일요일 오후 거실에서. "채이 씨." 돌아보자 할 말을 못 찾았다.
"……버팀이, 물 줬습니까."
"아까 같이 줬잖아요. 재헌 씨가 컵 들고 있었고."
"그랬죠."
소파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다 멈췄다.
"이상합니까. 자꾸 부르는 거."
"아뇨. 연습하는 거잖아요."
"……네. 연습입니다."
서재 문이 닫혔다. 닫힌 문 너머에서 아주 작게 혼잣말이 들렸다. 채이 씨. 채이 씨. 억양을 바꿔 가며.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쓰러졌다. 이 집 방음은 생각보다 나쁘다. 좋은 쪽으로.
[재헌]
일요일 새벽 두 시. 부엌.
팬을 달궜다. 약불. 기름은 두르지 않는다. 누룽지가 바삭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녀가 가르쳐 준 순서다. 이번엔 연기가 안 났다.
한 번 뒤집었다. 노릇해졌다. 접시에 담았다. 그녀가 엄마 조청이라고 부르는 병을 열어 종지에 따랐다.
혼자 먹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누룽지 데우는 법을 배운 이유가 그거였다. 새벽 두 시에 혼자서도.
식탁에 앉았다. 첫 조각을 찍었다. 먹었다. 맛있었다. 그런데 뭔가 모자랐다. 조청이 부족한 줄 알고 더 찍었다. 아니었다.
두 번째 조각을 집다가 손이 멈췄다. 누룽지 네 조각을 데웠다. 혼자 먹을 거면서 네 조각. 접시도 두 개를 꺼내 놓았다. 하나는 비어 있었다.
혼자 먹는 법은 아직 못 배웠다. 배운 건 둘이 먹는 법이었다.
빈 접시를 찬장에 도로 넣으려다 말았다. 누룽지 두 조각을 그 접시에 옮기고 랩을 씌웠다. 식탁 가운데 두었다. 냉장고 문에 메모지를 붙였다. 호텔 메모지.
[데워 드세요. 약불.]
서명은 안 했다. 이 집에 누룽지를 데우는 사람은 둘뿐이다.
[채이]
월요일 아침. 냉장고 문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반듯한 글씨. 약불, 에 밑줄. 선생님 흉내다. 누룽지 두 조각을 데워 먹었다. 조금 눅눅했다. 새벽에 데운 누룽지는 아침이면 눅눅해진다. 그래도 다 먹었다.
출근해서 원장님께 작은 결혼식 얘기를 꺼냈다. 호텔 로즈룸, 오십 명, 금요일 저녁.
원장님이 차를 마시다 말고 나를 봤다.
"그거 우리 손님이잖아."
"네?"
"오십 명짜리 식. 우리 홀 손님이라고. 호텔이 그걸 하면 우리 손님 뺏어 가는 거 아니야?"
머리가 하얘졌다. 그 생각은 못 했다. 파일 세 권을 보면서도 못 했다. 반대편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원장님이 한참 나를 보다가 웃었다.
"농담이야. 호텔 오는 손님이랑 우리 오는 손님은 달라. 호텔 가는 사람은 사진을 보고, 우리한테 오는 사람은 밥을 봐. 그리고 너 그거 하면서 우리 홀 얘기도 할 거잖아. 혼주 한복은 하가네, 갈비찜은 탁 실장."
"……그래도 돼요?"
"안 되면 너 거기 왜 보냈어. 우리 홀에서 배운 거 가서 써먹으라고 보냈지. 써먹어. 대신 금요일 저녁에 여기 바쁘면 너 여기 있어야 된다."
"금요일 저녁엔 여기 예식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원장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은 허락도 농담처럼 한다. 오 년 동안 그렇게 허락받아 왔다.
[채이]
화요일. 연회팀 사무실. 윤 팀장 책상에 봄빛 수첩을 펼쳤다.
"작은 결혼식이요. 로즈룸을 칸막이로 반. 한쪽은 식, 한쪽은 식사. 하객 오십 명. 주례 없이, 폐백 없이. 대신 밥이 맛있어야 돼요. 연경 주방이면 돼요."
"최소 인원 백 명인 건 수지 때문입니다."
"평일 저녁이면요?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로즈룸 올해 스무 번 넘게 비었어요. 파일 세 권 다 봤잖아요, 저."
윤 팀장이 파일을 넘겼다. 빨간 포스트잇이 금요일 칸마다 있었다.
"……손님이 올까요. 호텔 결혼식은 크게 해야 한다는 게 다들 생각이라."
"첫 손님은 제가 알아요."
문이 열리고 반장님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침에 불러 둔 참이었다.
"반장님. 따님 결혼, 가을로 미뤘다고 하셨죠. 비용 때문에."
반장님이 멈칫했다. 지난주 고등어를 먹으며 흘린 말이었다. 호텔에서 평생 남의 식을 치웠는데 제 딸 식은 못 해 준다고.
"금요일 저녁에 로즈룸에서 하시면 어때요. 오십 명. 직원가로. 첫 번째 작은 결혼식."
반장님 얼굴이 붉어졌다. 윤 팀장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직원가는 제 권한 밖입니다만. 부사장님께 올려 보죠."
"벌써 올렸어요. 아침에."
휴대폰을 보여 줬다. 답장 두 글자.
[승인]
그 밑에 한 줄.
[첫 번째 신부한테 제일 좋은 금요일을 주세요.]
한 줄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이제 조금 보였다. 백 실장님 말이 맞다. 칠 년까진 안 걸린다.
반장님이 화면을 보고 끝내 울었다. 윤 팀장이 티슈를 건넸다. 자기 눈가도 조금 붉었다.
[재헌]
같은 시각. 22층 임원 복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 형과 마주쳤다. 커피를 들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제주 좋았어? 신문에 났더라. 애월 해안도로. 제수씨 창가 쪽 좋아하나 봐?"
"형."
"응."
형을 봤다. 삼십이 년 동안 본 얼굴. 명절마다 같은 상, 할머니 생신마다 나란히 절. 1207호에 처음 놀러 온 사람도 이 사람이었다. 그땐 형도 웃었다. 눈까지.
뭐가 남아 있는지부터.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커피 식겠습니다."
형의 웃음이 조금 흔들렸다. 옆을 지나쳤다. 등 뒤에서 형이 뭔가 말하려다 마는 기척.
[채이]
밤 열 시. 언니였다. 이번엔 원래 번호.
"채이야."
겁에 질린 목소리.
"진우 씨 공방 계약 해지 통보가 왔어. 한 달 안에 비우래. 그리고 아빠 회사, 은행에서 대출 연장 안 해 준대. 엄마가 쓰러졌어. 진짜로."
"언니, 천천히."
"근데 누가 엄마한테 연락했대. 돈 빌려주겠다고. 조건이 하나래."
언니가 숨을 삼켰다.
"내가 서울 와서 기자들 앞에 서는 거. 나 서울 올라가, 채이야. 큰일 났어."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