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녹음은 삼 초였다. 1년만 해 주세요. 부부로.
삼 초짜리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빗소리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내 손은 아직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방금 그가 실을 감아 준 반지가 그 안에 있었다. 빼지 않았다. 빼는 법을 또 잊었다.
"……진짜예요. 그 녹음."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둘 다 알아요. 그날 그 말 했어요. 재헌 씨가 했고, 제가 좋다고 했어요. 말로만."
"압니다."
"종이는 남으면 증거가 된다고 했죠. 말도 남더라고요."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와이퍼가 두 번 왕복했다. 창에 빗물이 다시 덮였다.
"이사회에서 그 녹음을 틀 겁니다. 형이."
"알아요."
"그러면 나는 말할 겁니다. 처음엔 1년이었다고. 그리고."
"하지 마요."
그가 나를 봤다.
"지금 그 말 하면요, 다들 이렇게 들어요. 들켜서 급하게 하는 말. 대표 자리 지키려고 하는 말. 재헌 씨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녹음보다 약해요. 녹음이 먼저 틀어지니까."
예식장에서 배운 것. 먼저 튼 음악이 이긴다. 뒤에 트는 음악은 아무리 좋아도 사과처럼 들린다.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그가 들으면 막을 대답이었다.
[재헌]
금요일. 22층. 백 실장이 칠판에 이름 일곱 개를 적었다. 이사 일곱 명.
"할머니는 의장이라 표결에 안 들어가십니다. 작은아버지, 형. 두 표는 확실히 저쪽. 사외이사 네 분 중 두 분은 형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녹음 들은 뒤로."
"윤 이사님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녹음 말고 다른 걸 보고 정하시겠다고."
"그럼 나까지 셋, 저쪽 넷."
"네."
단추를 돌렸다. 흰 매듭. 다듬이질 백 번 한 팔이 아직 뻐근했다.
"부사장님."
"응."
"하채이 씨는 괜찮으십니까."
백 실장이 사적인 걸 묻는 건 칠 년 만에 처음이었다. 칠판을 보던 눈을 돌렸다.
"……모르겠어. 요즘 너무 괜찮아 보여."
"그게 문제입니까."
"그 사람은 안 괜찮을 때 제일 괜찮아 보여. 식장에서 배운 거래."
백 실장이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이번엔 보여 줬다. 처음이었다.
사모님 — 괜찮아 보이면 확인.
"제가 적어 둔 겁니다. 반장님 말씀으로는 결혼식 날 대기실에서도 그 얼굴이었다고."
[재헌]
토요일 오후. 윤 이사님 댁 응접실. 약속 없이 갔다. 윤 이사님은 놀라지 않았다.
"올 줄 알았어요. 앉아요."
"녹음 말고 다른 걸 보고 정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윤 이사님이 찻잔을 들었다. 할머니와 같은 세대의 버릇이다. 찻잔을 들면 기다려야 한다.
"식장 영상이요. 결혼식 날. 신부 입장부터 면사포 올릴 때까지."
"……그걸 왜."
"녹음은 목소리만 남아요. 목소리는 연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손은 연습이 안 돼요. 신랑이 신부 손을 받을 때, 그 손이 어땠는지. 나는 그걸 보고 싶어요."
찻잔이 내려놓였다. 결론.
"부사장님. 그날 손, 떨렸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영상에 있었다. 봄빛 음향실 막내가 편집하던 영상. 신부 입장이 진짜 잘 나왔다던.
그날 저녁 봄빛 뒷문에 차를 댔다. 그녀는 예식 중이었다. 음향실로 올라갔다. 막내가 헤드폰을 목에 건 채 일어났다.
"준수 씨. 결혼식 날 식 스케치. 편집본 있습니까."
"있죠! 다 했어요. 누나한테 드리려고 했는데 누나가 안 받아 가서."
"그거, 원본이랑 같이 주세요. 그리고 그녀한테는."
"비밀이요?"
"……이사회 끝날 때까지만."
막내가 USB를 건넸다. 그리고 덧붙였다.
"부사장님. 삼 분 이십 초부터 보세요. 신부 손 받으실 때요. 확대하면 다 보여요."
뭐가 보이는지는 묻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그날 떨렸다. 떨리는 걸 그녀가 봤다. 그 떨림이 이제 증거가 된다. 녹음이 증거가 되는 세상이면, 손도 증거가 된다.
[채이]
화요일. 자문 날. 직원식당. 제육이었다. 격주가 돌아왔다.
반장님이 식판에 한 국자를 더 얹었다.
"채이 씨. 금요일 이사회 날, 우리 하우스키핑 전원 22층 청소 들어가."
"그날 22층 청소 있어요?"
"없지. 만들었지. 복도 카펫 샴푸. 회의실 앞에서 천천히."
지호가 옆에서 손을 들었다.
"저는 그날 22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거예요. 벨 데스크 지원이요. 지원할 게 없어도요."
윤 팀장까지 식판을 들고 왔다.
"연회팀은 그날 22층 회의실 다과 담당입니다. 원래 총무팀 일인데 바꿨습니다. 다과 옆에 복주머니도 놓습니다. 하가네 걸로요. 많이요."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봤다. 웃었다. 나도 웃었다. 제육을 한 입 먹었다. 목이 멨다. 제육 탓이었다고 해 두자.
이 사람들이 금요일에 22층에 서 있을 이유가 나다. 나는 그날 22층에 없을 것이다. 그 계산이 제육보다 짰다.
[채이]
화요일 저녁. 자문을 마치고 봄빛에 들렀다. 원장실. 원장님이 차를 두 잔 탔다.
"원장님. 이상한 거 하나 여쭤봐도 돼요?"
"해."
"신부가 도망가면 식은 망하잖아요."
"망하지."
"근데 신부가 먼저 나가서 식을 살리는 경우도 있어요?"
원장님 찻잔이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신랑이 신부 때문에 곤란해질 때요. 신부가 없으면 신랑이 안 곤란하면. 그럼 신부가 먼저 나가는 게 식을 살리는 거 아니에요?"
원장님이 나를 한참 봤다. 오 년 동안 내 얼굴만 보고 다 알던 사람이다. 오늘은 오래 걸렸다.
"채이야. 예순한 해 동안 이 홀에서 신부가 도망간 게 딱 두 번이야. 한 번은 네 언니. 한 번은 이십 년 전."
"이십 년 전에도요?"
"그 신부도 그랬어. 신랑 집이 반대해서 신랑이 곤란하다고. 자기가 없으면 된다고. 그래서 도망갔어."
"그래서요?"
"신랑이 그 신부 찾으러 갔지. 식 다 버리고. 결국 둘 다 망했어. 식도 망하고 그 둘도 한동안 망했어."
원장님이 차를 마셨다.
"그 신랑이 탁 실장이야."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탁 실장님. 갈비찜. 수건 던지는 사람.
"……그 신부는요."
"삼 년 뒤에 돌아왔어. 지금 탁 실장 마누라야. 우리 홀 폐백 이모님."
폐백 이모님. 폐백상을 차리는 사람. 우리 결혼식 날 폐백은 생략됐다. 그 이모님이 차려 둔 폐백상에서 우리는 대추를 몰래 먹었다.
"도망가는 건 네 언니 하나로 충분해. 이 홀 역사에 세 번째는 없어."
원장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할머니처럼. 결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님 결론은 맞았다. 다만 나는 도망가려는 게 아니었다. 체크아웃하려는 거였다. 투숙객은 도망가지 않는다. 계산하고 나간다. 그게 다르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채이]
수요일 밤. 언니 전화.
"채이야.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무슨 생각."
"몰라. 근데 은비 씨가 나한테 문자했어. 너 요새 너무 괜찮아 보인다고."
은비는 언제 언니 번호를 땄을까. 봄빛 사람들은 정보를 청첩장처럼 돌린다.
"나 괜찮아."
"거봐. 너 안 괜찮을 때 제일 괜찮다고 해. 어릴 때부터."
"언니."
"너까지 도망가면 나 진짜 화낸다. 양 갈래 머리 다시 풀어 버릴 거야."
웃었다. 웃어서 목이 멨다.
"안 도망가. 그냥 좀 정리하는 거야."
"그게 그거야, 바보야."
전화를 끊고 엄마한테 걸었다.
"엄마. 금요일 새벽에 한복집 갈게."
"왜. 무슨 일 있어?"
"바느질 배우러."
"네가 무슨 바느질을 배워. 스물일곱 해 동안 급한 데 꿰매는 것만 하던 애가."
"이제 배우려고."
엄마가 잠깐 조용했다. 그러다 한숨 같은 소리를 냈다.
"……와. 네 방 이불 널어 둘게."
엄마는 알고 있었다. 바느질 배우러 오는 딸이 이불이 왜 필요한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 캐리어를 꺼냈다. 결혼식 날 밤 은비가 끌고 온 캐리어 두 개. 하나만 꺼냈다. 하나는 두고 가기로 했다. 다 가져가면 정말 도망 같으니까.
[재헌]
목요일 밤. 이사회 전날.
새벽 한 시. 그녀가 부엌에 불을 켰다. 누룽지를 데웠다. 두 주 만이었다.
"드실래요?"
"네."
거실 바닥. 버팀이 옆. 조청 종지.
그녀가 말이 많았다. 오늘 봄빛 신부 얘기, 은비 결혼 날짜 얘기, 준수가 새로 산 믹서 얘기. 탁 실장님이 사실 이십 년 전 신랑이었다는 얘기. 나는 누룽지를 먹으며 들었다.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너무 괜찮아 보였다. 백 실장 수첩이 생각났다. 괜찮아 보이면 확인.
"채이 씨."
"네."
"내일."
"내일은 내일이에요. 오늘은 누룽지 먹어요."
그녀가 누룽지 한 조각을 조청에 푹 찍어 내 입 앞에 내밀었다. 받아먹었다. 달았다. 조청이 너무 많았다. 그녀가 웃었다.
확인하려던 말이 누룽지와 같이 넘어갔다.
그날 나는 소파에서 잠들었다. 이사회 전날인데 잠이 왔다. 이상했다. 그녀가 옆에서 누룽지를 데우는 날은 잠이 온다. 그건 알고 있었다. 오늘 그게 함정이었다는 건 몰랐다.
[채이]
새벽 다섯 시. 그가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버팀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담요를 덮어 줬다. 오늘은 발까지 덮었다. 소파가 여전히 짧았다.
식탁에 앉아 메모지를 꺼냈다. 호텔 메모지. 그의 메모지.
[1년 약속, 제가 먼저 끝낼게요. 가짜 부부가 먼저 헤어지면 녹음은 아무 의미 없어요. 재헌 씨는 그냥 신부가 두 번 도망간 불쌍한 신랑이면 돼요. 그게 제일 세요. 동정표는 녹음보다 세요. 예식장에서 배웠어요.
버팀이 물은 이틀에 한 번. 반 컵. 누룽지는 약불.]
서명을 할까 하다가 안 했다. 이 집에 메모를 남기는 사람은 둘뿐이다.
반지를 뺐다. 흰 실 열 바퀴. 그가 빗속에서 감은 매듭. 빼는 데 한참 걸렸다. 실이 딱 맞아서. 너무 잘 감아서.
메모 위에 올려 두었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다가 돌아봤다. 버팀이. 소파. 식탁 위의 작은 반짝임.
체크아웃. 투숙객은 계산하고 나간다. 도망이 아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재헌]
아침 일곱 시. 눈을 떴다. 담요가 발까지 덮여 있었다.
집이 조용했다. 조용한 건 늘 그랬다. 오늘은 달랐다. 부엌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안 났다.
일어났다. 식탁으로 갔다.
식탁 위에 반지가 있었다. 흰 실 열 바퀴. 내가 감은 매듭 그대로.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